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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빠띠고사 호잔 2024. 8. 31. 04:59

2024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08/01(목)

 

붓다 담마에서 의례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silabbata parāmāsa와 silabbatupādāna가 있는데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수다원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silabbata parāmāsa(의례 의식 차체로 닙바나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지,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되는 silabbatupādāna(의례 의식에 따르는 경향, 및 더 높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여러가지 기교를 사용하는 경향 / 바와 우빠-다-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silabbata parāmāsa를 ‘계금취’로 번역하여 ‘어떤 계율 또는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으로 잘못 알고, 수다원 단계에서 계금취가 제거되면 그 집착이 없어진다고 알고 있는 문제도 여기서 볼 수 있다.

출처 및 참고 포스트: https://cafe.naver.com/puredhamma/2682 

 

2024/08/02(금)

 

부도덕한 행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히리와 옷땁빠다.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도 부도덕한 행이 될 수 있는데, 다사 아꾸살라에 속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행해도 모두 부도덕한 행이기 때문이다.

붓다 담마에서 ‘도덕적 행/부도덕적 행’의 분류기준은 (윤회/괴로움, 즉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올바른 행/그릇된 행’의 분류기준이지 (세상 또는 세상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정의로운 행/정의롭지 못한 행’의 분류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다.

 

2024/08/03(토)

 

왜 각자가 외부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경험하고, 주어진 감각 입력에 대해  자신의 느낌과 인식(예를 들어 같은 사람을 볼 때 사랑이나 분노)을 가질까? 그것이 우리가 ‘내 자신의 마음이 있다’는 것과 같이 느끼는 이유다.

핵심은 외부 감각 입력에 대한 우리 반응이 고유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띠(성향)의 세트를 기초로 그러한 감각 입력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자신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54 

 

2024/08/04(일)

 

우리 각자에게는 고정된 마음이 없다. 즉 우리는 자신의 산냐-(saññā), 웨다나-(vedanā), 상카-라(sankhāra), 윈냐-나(viññāna)를 생성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산냐-악칸다(saññākkhandha), 웨다나-악칸다(vedanākkhandha), 상카-락칸다(sankhārakkhandha), 및 윈냐-낙칸다(viññānakkhandha)를 지니고 있지 않다.

더욱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내 것’으로 삼는 것은 결실이 없다. 그 인식(‘내 것’이라는 인식)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tthi)의 일부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54 

 

2024/08/05(월)

 

갈망을 줄이는 노력(수행)을 하는 것에 대해, 우선 다른 유정체가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줄여야 하는데,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하기를 바라는 것을 줄여야 하고, 마지막으로 무정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줄여야 하는데, 빈 배의 비유와 같이 대개 사람들은 마지막 갈망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하여 화를 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냄은 사악처 중에서도 지옥에 태어나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가장 나쁜 근본 원인이다.

성냄은 근본적으로 관련된 갈망이 없어야 일어나지 않고, 관련된 갈망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특성에 대한 무지(아윗자-)가 없어야 일어나지 않는다.  

 

2024/08/06(화)

 

까-마 구나(kāma guṇa)는 무지한 마음이 감각 입력(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담마-)에 할당하는 ‘잘못된, 마음이 만든 특성’을 말한다. 까-마 구나(kāma guṇa)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것에 들러붙는다(땅하-, taṇhā). 아라한의 마음은 까-마 구나를 생성하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a-guna-origin-of-attachment 

 

2024/08/07(수)

 

아-람마나(Ārammaṇa)는 감각 입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깜마를 생성하기 시작하고 빤쭈빠-다-낙칸다(다섯가지 집착 무더기)에 더한다. 아라한 단계 아래의 어떤 누구도 [순수한] 빤짝칸다(다섯 무더기)를 생성하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kr/arammana-initiates-critical-pr 

 

2024/08/08(목)

 

오염된 마음이 감각 입력에 들러붙지 않을 때라도, 경험하는 중립(아두카마수카, adukkhamasukha) 웨다나-(vedanā)는 여전히 미묘한 ‘동요’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뿌툿자나(범부 중생)에게는 인식되지 않지만 성스런 길에 있는 자(즉, 소따빤나 단계 위)들에 의해 점점 더 경험될 수 있다. 그 마음의 동요는 모하(moha) 또는 무지[아윗자-]로 인해 일어난다.

출처: https://puredhamma.kr/uncovering-the-suffering-free 

 

2024/08/09(금)

 

(붓다 담마를 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에게는, 고통/괴로움은 ‘감각적 즐거움을 즐길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면(자-나또 빳사또, jānato passato),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고통/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arammana-initiates-critical-pr 

 

2024/08/10(토)

 

‘흐름에 따라 가고’(즉,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고) 윈냐-나를 오염되게 하는 자는 닙바-나에서 멀어지는 ‘아누소따가-미(anusotagāmi)’라고 불린다. 그 다음 두 가지 유형은 [세상의] 조류에 역행하는 여정을 시작한 자, 또는 길을 따라 중간에 도달한 (즉, 성스런 길에)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ī)’다. 마지막 범주는 여정을 완료한 자(아라한)다.

우리는 흐름에 따라 가는 경향에 저항해야 하고, 흐름/조류에 반대로 가야한다. 따라서, 고통(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ī)가 되어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contamination-of-the-human-min 

 

2024/08/11(일)

 

모든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와 오염된 산냐-(defiled saññā)의 바탕이 되는 산냐-는 세상에 대한 닛짜/수카/앗따(nicca/sukha/atta) 산냐-(saññā)다.

 

2024/08/12(월)

 

라-가(rāga)와 도사(dosa)가 없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항상 모하(moha)(‘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무지)로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중립, 즉 ‘아둑카마수카(adukkhamasukha)’ 웨다-나가 일어나는 대다수의 경우에도 세상에 대한 각자의 왜곡된 견해/인식(딧티 및 산냐- 위빨라사)에 기반한 미묘한 들러붙음이 있다. 이것은 처음에는 보기 어렵다.

출처: https://puredhamma.kr/dukkha-previously-unknown-trut 

 

2024/08/13(화)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재 삶에서 느껴지는 괴로운 느낌(두카, dukha)를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탄생 과정의 상상할 수 없는 괴로움을 끝내는 것(둑카 삿짜, Dukkha Sacca)에 관한 것임에 주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출처: https://puredhamma.kr/dukkha-previously-unknown-trut 

 

2024/08/14(수) 

 

생각은 그것을 깨닫기 전에 이미 오염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각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수십억분의 1초 내에 일어나며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ṇa)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로 오염되어 일어난다. 몇 초내에 그것은 더 오염되어 부도덕한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 짝쿠 윈냐-나는 마음이 대상에 대해 더 나은 개념을 얻음에 따라 이어지는 찟따에서 더 진화하고 그 시각 입력에 어떻게 반응할 지를 결정한다. 마음은 그 과정에서 나중에 깜마를 생성하기 시작하지만, ‘나중’은 상대적이다. 깜마를 행하는 것은 몇 초내에 일어나거나 그 아-람마나(대상)를 처음 접하고 몇 시간 후에도 일어날 수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cognition-modes-sanjanati-vija 

 

2024/08/15(목) 

 

사마누빳사나-(samanupassanā)’는 어떤 특정한 기준(여기서는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따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누빳사띠(samanupassati)’는 ‘누군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들러붙음의 네 가지 방식은 삭까-야 딧티(세상 것들이 자신에게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attato-samanupassati-to-view-s 

 

2024/08/16(금) 

 

아라한 또는 아나함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빠띠가 또는 도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대상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마노 아비상카-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그 대상을 고의적으로 파괴(무정체)하거나 살생(유정체)하는 행(까-야 아비상카-라)까지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범부중생이고, 나아갈 수 없는 자가 수다원 또는 사다함이다. 즉, 수다원 또는 사다함은 (다른 방법으로) 그 대상을 없애는 행을 하지만 사악처에 떨어지는 고의적 파괴행이나 살생행을 자동적으로 할 수 없는 자다.

(참고로, 유정체의 없애는 의도행을 빠알리 낱말로 구분해 보면, 범부중생은 도사가 포함된 의도로 행할 수 있고, 수다원과 사다함은 빠띠가가 포함된 의도로만 행할 수 있고, 아나함과 아라한은 빠띠가가 포함된 의도로도 행할 수 없다.)

 

2024/08/17(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근본 레벨의 순수한 에너지로 생성되었다. ‘고형(견실함)’이라는 인식은 환상(elusion)이다. 즉, ‘물질’의 근본 본질은 환상적(묘사하기 어려운, elusive)이다. 필자가 몽상 또는 비실제적임을 의미하는 낱말인 ‘비실제적(illusive)’을 쓰지 않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본질이 감춰져 있다하더라도, (고통/괴로움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이 있다는 것은 비실제(illusion)가 아니라 진짜(authentic)다.   

그러나, 견실함(solidity)이라는 잘못된 인식(왜곡된 산냐-, 즉 ‘산냐- 위빨라-사’)은 우리가 이 세상 것들을 귀중하게(가치있다고) 여기는 한 가지 이유인데, 즉,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이며, 이는 ‘루-빠는 가치있는(귀중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 왜곡된 인식은 또한 그 루빠들의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일어나는 정신적 실체인,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이어진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nna-vipallasa-distorted-perc 

 

2024/08/18(일)

 

찟따(citta), 마노-(manō), 윈냐-나(viññāna)는 불교(Buddha Dhamma)의 많은 문헌에서 (그 의미가) 차별없이 사용된 ‘흔히 쓰이는’ 낱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관련되어 있지만 다르다.

찟따(citta)는 8단계로 오염되어 윈냐-나(viññāna)가 된다(그리고 또다른 단계에서 윈냐-낙칸다(viññānakkhanda)의 일부가 됨). 그 변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오염의 레벨은 각자의 가띠(gati)(성향/습관)에 따라 다르다.

~

윈냐-나(viññāna)를 없앨 때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한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찟따가 윈냐-나(viññāna) 단계로 오염되지 않는 정도로 마음을 정화할 때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한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05 (2022.08.23. 개정분)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1-thoughts-consciousness-and-m )

 

2024/08/19(월)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의 아닛짜/둑카/아낫따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열반을 이해한다는 것은 열반의 닛짜/수카/앗따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세상/세상행복과 열반/열반지복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자는 어떻게 하면 세상행복(둑카)을 잘/많이 누릴(경험할) 것인가에 관심과 열의와 노력이 집중되어 있고, 언제 열반에 이를 것인지 기약이 없다.

세상/세상행복과 열반/열반지복을 올바르게 이해한 자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열반지복(둑카의 소멸)에 이를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일정기간 내에 열반에 이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세상/세상행복과 열반/열반지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즉 세간 정견 및 출세간 정견의 확립이 우선이다. 정견이 확립되면 자동적으로 올바르게 수행이 가능한 정도로 오염이 벗겨지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2024/08/20(화)

 

범부중생과 유학성자는 붓다담마의 핵심을 배우고 알아도 끊임없이 반복하고 숙고해야 하며, 그 반복과 숙고를 하는 중에 도과에 이르게 되고 더 이상 반복과 숙고가 불필요하여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아라한이 된다.

범부중생이 중간에 그만두면 붓다담마의 핵심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한 자와 별 차이가 없지만, 유학성자는 그만둘 수가 없을 뿐더러 반복하고 숙고하는 중에 출세간 수행을 하는 만큼 열반에 다가가게 된다.

 

2024/08/21(수)

 

감각 입력이 마음에 흥미를 유발할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자와나 찟따(javana citta)가 생성되지 않는다

그 경우에, 찟따(citta)는 옷타빠나 찟따(votthapana citta) 후에 바로 타고난 바왕가(natural bhavaṅga) 상태로 돌아간다. ~ 

그런 찟따 위티(citta vithi)를 빠릿따-람마나(parittārammana) (약한) 또는 아띠빠릿따-람마나(atiparittārammana) (매우 약한) 찟따 위티(citta vithi)라고 한다. 빠릿따-람마나 찟따 위티(parittārammana citta vithi)는 꿈과 관련되어 있다. 아띠빠릿따-람마나 찟따 위티(atiparittārammana citta vithi)는 호흡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마지막인 가장 약한 유형의 그런 찟따 위티(citta vithi)를 알아 차리지도 못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state-of-mind-in-the-absence-o 

 

2024/08/22(목)

 

<우리는 항상 오문인식과정 및/또는 의문인식과정의 찟따 위티로 살아간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는 오문인식과정의 아띠마한-따-람마나 찟따 위티(매우 강한 찟따 위티, T까지 생성) 또는 마한-따-람마나 찟따 위티(강한 찟따 위티, J까지 생성)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오문인식과정의 빠릿따-람마나 찟따 위티(약한 찟따 위티, V까지 생성)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오문인식과정의 아띠빠릿따-람마나 찟따 위티(매우 약한 찟따 위티, BC까지만 생성)가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흡은 제4자-나 사마-빳띠에서 끊어진다고 하는데, 이때는 의문인식과정의 자-나 찟따가 연속하는 상태다.

생각/상깝바(위딱까/위짜라)은 제2자-나 사마-빳띠(아비담마의 분류에서는 제3자-나)에서 멈춘다고 하는데 이때도 의문인식과정의 자-나 찟따가 연속하는 상태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면서 찟따 위티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아라한의 상수멸에서만 가능하다. 즉, 우리는 항상 오문인식과정 및/또는 의문인식과정의 찟따 위티로 살아간다.

 

참고)

호흡은 마음의 인식과정과는 관련없는 육체만의 작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육체만의 작동에 의한 호흡도 끊어지는 제4자-나 사마-빳띠에 도달하지 않은 제1자-나 내지 제3자-나 사마-빳띠에서는 자-나 찟따의 연속과는 관련없이 육체만의 작동에 의한 호흡이 지속될 수 있다.

알다시피, 일상 생활 중에서도 우리는 마음의 의도를 통해 폐 호흡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육체 피부를 통한 산소공급(피부 호흡)이 가능하다.

인간의 육체만의 작동에 의한 무의식적 호흡은 육체 형성시에 육체에 각인된 내장 산냐-(왜곡된 산냐-)의 작용에 의한 것(찟따 위티가 없음)이며, 자궁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무의식적 호흡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라한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육체의 자율신경계는 이 내장 산냐-(왜곡된 산냐-)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 육체는 마노-마야 까-야와 세포(DNA) 청사진에 의해 형성되는데, 알다시피 과학에서는 세포(DNA)의 청사진만을 인정하고 다룬다. 

 

2024/08/23(금)

 

왜 세상 것 또는 유정체들에게 안타까워하는가? 

화내는 것보다 낫지만 세상 모든 것의 아닛짜 특성을 모르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심하면 안타까워하지 않겠지만, 이 경우에는 어리석은 마음에 의한 무관심일 경우가 많다.

무관심은 들러붙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어리석은 마음으로 무관심하며 세상 것 또는 유정체에게 들러붙은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는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아꾸살라) 마음에 해당한다.

 

2024/08/24(토)

 

빠띳짜 사뭅빠-다(연기)의 모든 용어는 정신적 실체고, 어떤 것도 외부 세계의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

그 때문에 빠띳짜 사뭅빠-다의 모든 항목들은 닙바-나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면 일어나지 않는다. [깜마가 생성되는]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은 살아있는 아라한에게 작용(작동)하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nna-vipallasa-distorted-perc 

 

2024/08/25(일)

 

느낌이 둑카인 줄 모르면 세상에서 벗어나는 수행도 불가능하고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좋은 느낌을 추구하며 불선행을 하거나 선행을 하기 때문에 (각자의) 세상이 계속 형성되고 형성된 세상에 묶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어떤 느낌이든 느끼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느끼되 세상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고 느낌없음의 지복(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출세간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출세간 수행에서도 느낌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느낌(즉, 세상의 느낌)에 들러붙지 않는 수행이 출세간 수행이다. 

 

PS)

보통 사람은 세상의 좋은 느낌(즐거운 느낌 또는 평온한 느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과, 각자는 각자의 (윤회) 세상을 계속 구축하며 세상(물질계 및 정신계, 즉 오온 또는 18계)에 항상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들러붙어(나와 깜마 또는 뿌라나 깜마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 즉 오취온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024/08/26(월)

 

뿌툿자나(보통 사람)의 마음은 항상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상태로 시작하며 결코 빤짝칸다(pañcakkhandha) 상태로 시작하지 않는다.

감각 입력을 받아들여 일어나는 찟따 위티(citta vithi)의 처음 찟따도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와 함께 일어나고 즉시 그것에 들러붙고 ‘오염된 산냐-’로 이어진다(‘왜곡된/오염된 견해’도 또한 자동적으로 작용함). 따라서, 뿌툿자나의 마음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상태로 시작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bhassara-citta-and-sanna-vip

 

2024/08/27(화)

 

붓다 담마에서는 세상을 가르치고 세상의 형성 원인을 가르치고 세상의 형성원인이 없을 때의 상태를 가르치고 이 상태에 이르기 위한 길, 즉 사성제를 가르친다.

이는 세상의 특성(틸락카나)을 가르치고 세상 형성 메카니즘(빠띳짜 사뭅빠-다)를 가르치고 닙바-나의 특성을 가르치고, 닙바-나에 이르는 성스런 길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이는 간단히 말하여 각자의 세상, 즉 각자의 윤회에서 벗어남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2024/08/28(수)

 

각자의 세상(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유정체/무정체와의 관계(연기), 즉 모든 유정체/무정체의 세상에서도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 벗어남은 로까 사무다야의 행(로바/도사/모하 및 세간적  알로바/아도사/아모하에 의한 행)에서 로까 니로다야의 행(출세간적 알로바/아도사/아모하에 의한 행)으로 이행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 이행하는 수행이 완성되면 해야할 일을 해 마친 아라한이 된다.

 

2024/08/29(목)

 

로까 니로다야의 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로바/도사/모하에 의한 로까 사무다야의 행에서 세간적 알로바/아도사/아모하에 의한 로까 사무다야의 행으로 이행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범부 중생의 세간 수행이라고 한다.

출세간적 알로바/아도사/아모하에 의한 행은 빤냐- 심소의 작용에 따른 유학성자의 출세간적 수행(꾸살라물라 연기가 작동)이다.

 

2024/08/30(금)

 

그 모든 인식은 마음이 만든(mind-made)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이 실제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육체가 그 인식이 박히게 하는 업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이다. 그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아라한조차도 그 왜곡된 산냐-/인식을 얻는다. 그러나 아라한은 그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했고, 따라서 ‘오염된 산냐-(defiled saññā)’에 이르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bhassara-citta-and-sanna-vip 

 

2024/08/31(토)

 

루빠는 실제의 외부 루빠와, 이 실제의 외부 루빠를 왜곡된 산냐- 또는 오염된 산냐-로 인식하는 오온의 루빠 또는 오취온의 루빠를 잘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실제의 외부 루빠를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게 중립 상태로 인식할 수는 없으며, 실제의 외부 루빠를 왜곡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중립 상태로)' 인식하는 경우는 아라한의 팔라 사마-빳띠에서만 가능하다. 아라한의 일상 생활에서도 실제의 외부 루빠를 오염되게 인식하지는 않지만 왜곡되게 인식하기는 하는데, 이 때가 순간오염 3단계이며, 이 3단계까지는 일반적으로 오염된 인식이 아니라 왜곡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s://cafe.naver.com/puredhamma/3271 의 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