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05/01(수)
야타-부-따 냐~나가 생기면 거시레벨의 루-빠가 포말(거품) 덩이와 같을 뿐, 미시레벨의 루-빠가 세상 루빠의 실상으로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거시레벨의 루-빠(우리 몸)가 견실하다는 가나 산냐-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이 미시레벨의 루빠가 오염된 마음(윈냐-나)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는 나마루빠 빠리쩨따 냐-나도 생긴다.
2024/05/02(목)
현재 띠삐따까(삼장)에 대해 만연하고 있는 주석서(전통 테라와다불교에서 신봉하고 있는 후기 주석서 및 청정도론)와 현재의 번역서는 모두 뿌툿자나(범부 중생)에 의해 주석되고 번역된 것이다.
띠삐따까(삼장)를 뿌툿자나가 주석하거나 번역한 것에 따라 이해하고 그것을 신봉하는 한, 뿌툿자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중에서 기본적인 첫째 조건(성자와 교제함) 및 둘째 조건(성자의 법문을 들음)부터 충족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024/05/03(금)
모든 유정체가 해야 할 일과 목적은 생멸 상태의 세상에서 생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생불멸의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 해야할 일과 목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 범부 중생이고, 명확하게 알고 실천하는 자가 유학성자고, 명확하게 알고 실천이 완성되어 해야 할 일과 목적을 달성한 자가 아라한(무학성자)이다.
참조: https://cafe.naver.com/puredhamma/3076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339776
2024/05/04(토)
핵심은 각자가 다음 생(바와)에 사람이 될 것인지, 천신이 될 것인지, 동물이 될 것인지는 우리가 바라는 것(또는 기도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발하는 가띠(gati)의 종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따빤나(Sōtapanna)의 가띠(gati)’ 즉, ‘아리야 가띠(Ariya gati)’를 계발함으로써 바로 이번 생에서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쇠는 담마(올바른 세계관)를 배우고 이해함으로써 삼마 딧티(Samma Ditthi, 정견)를 기르고 계발하는 것이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54
2024/05/05(일)
까-마(kāma)를 우선시하는 것이 까-마 라-가(kāma rāga)다.
까-마 라-가(kāma rāga)를 가질 때,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기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
데-와 로까(dēva loka, 천상계)의 데-와(dēva, 천신)들도 라-가(rāga)가 있다. 천신들은 감각 즐거움을 즐기기를 좋아하지만, 다른 자들이 가진 것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로-바(lōbha)를 가지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0
2024/05/06(월)
까-마 라-가(kāma rāga)보다 더 강력한 까-막찬다(kāmacchanda)가 있다. 까-막찬다는 로-바(lōbha)와 같지만, 까-마(kāma)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까-막찬다(kāmacchanda)는 가장 높은 수준의 들러붙음이다. 이 수준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살인, 성폭행/강간, 등)를 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까-막찬다(kāmacchanda)' 수준까지 까-마(kāma)가 높아지면, 자신의 행동으로 생기는 해로운 결과를 알 수 없게 된다. '까-막찬다(kāmacchanda)'는 'kāma + iccha + anda'에서 유래된 말로서, ‘감각 끌림에 따라 눈이 먼’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잇차-(icchā)’는 ‘좋아함’이고, ‘안다(anda)’는 ‘눈 먼’이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0
2024/05/07(화)
모-하와 빤냐-(윗자-)는 심소로서,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
아모-하와 아윗자-는 심소가 아니며, 모-하와 빤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세간 아모-하 또는 아꾸살라 아모-하(아꾸살라 아윗자-)는 빤냐- 심소가 작용하지 않는 상태로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작용하는 상태다(범부중생에게만 작용하는 모-하 상태는 완전히 눈먼 상태로, 모-하로 시작하는 최악의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된다).
출세간 아모-하 또는 꾸살라 아모-하(꾸살라 윗자-)는 빤냐- 심소가 작용하는 상태로서, 꾸살라물라 연기가 작용하는 상태다(꾸살라물라 연기는 유학성자에게만 작용하며, 최상의 빤냐-(윗자-)가 작용하여 아윗자- 아누사야가 제거된 아라한에게는 꾸살라물라 연기도 작용하지 않는 끼리야 찟따가 일어나는 상태다).
참조 도표: http://naver.me/5FhBiETp
2024/05/08(수)
좋으면(유쾌한/즐거운 느낌이면) 행하고, 싫으면(불쾌한/괴로운 느낌) 행하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좋아도(유쾌한/즐거운 느낌이라도) 행하지 않고, 싫어도(불쾌한/괴로운 느낌이라도) 행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중생은 (유학)성자에 이르기가 지극히 어렵고, (유학)성자에 이르기가 지극히 어려우므로 닙바-나(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도 지극히 어렵다.
2024/05/09(목)
좋아도(유쾌한/즐거운 느낌이라도) 유학성자 또는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자들의 관점(견해)에서 하지 않아야 할 것(다사 아꾸살라 행)이 있고, 싫어도(불쾌한/괴로운 느낌이라도) 유학성자 또는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자들의 관점(견해)에서 해야 할 것(다사 꾸살라 행)이 있다.
동일한 행이라도, 범부중생들은 유쾌한/즐거운 정신적 느낌으로 느끼지만 유학성자들은 불쾌한/괴로운 정신적 느낌으로 느낄 수가 있고, 범부중생들은 불쾌한/괴로운 정신적 느낌으로 느끼지만 유학성자들은 유쾌한/즐거운 정신적 느낌으로 느낄 수가 있다.
(아라한은 정신적 느낌, 즉 삼팟사 자 웨다나를 느끼지 않으며, 육체적 느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느끼게 됨.)
2024/05/10(금)
범부 중생은 그 레벨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또는 타인)의 관점(견해)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성자라고 착각하기도 하므로 빠빠행에 속하는 아꾸살라행도 한다.
(유학)성자는 그 레벨에 따른 아꾸살라행(빠빠행은 아님)을 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견해와 함께 행하지는 않고(삭까야딧티, 즉 오취온의 견해가 제거되었기 때문임), 자신이 아라한의 레벨이라고 착각하지도 않는다(오취온의 견해는 제거되었지만 오취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므로 범부 중생처럼 그 상태가 유여열반이라고 착각하지는 않기 때문임).
2024/05/11(토)
범부 중생이 (아나리야) 자-나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은 오취온의 견해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취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윗자 때문이다.
오취온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완전히 제거되면(즉, 최소한 수다원에 이르면) 오취온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므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취온이 없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2024/05/12(일)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 단멸에 대한 갈애)는 그릇된 유물론에서 생긴다. 이 그릇된 유물론은 붓다 시대에는 웃쩨-다 딧티(uccēda ditthi, 단견)로 알려졌다. 그 사람들은 사람이 죽을 때 존재하는 것이 멈춘다고 믿는다. 그 사람들은 마음은 몸(뇌)의 부산물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몸이 죽으면, 그것이 [삶]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 생의 즐거움을 즐겨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또한 까-마 땅하-(kāma taṇhā, 감각에 대한 갈애)도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즉, 물질이 우선되는 과학 시대)에서는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 단멸에 대한 갈애)를 가지기가 쉽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a-tanha-bhava-t-vibhava-t
2024/05/13(월)
지식 습득에 의한 이해는 세간적 아모-하의 영역, 즉 빤냐-가 작용하지 않는 꾸살라 찟따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영역(로-까 사무다야)의 이해(범부중생의 이해)고,
지혜 발현에 의한 이해는 출세간적 아모-하의 영역, 즉 빤냐-가 작용하는 꾸살라 찟따로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영역(로-까 사무다야)의 이해(유학성자의 이해)다.
지혜 발현에 의한 완전한 이해는 빤냐-가 작용하는 끼리야 찟따로 꾸살라물라 연기도 일어나지 않는 영역(로-까 니로-다야)의 이해(아라한/무학성자의 이해)다.
2024/05/14(화)
세 가지 ‘묶는(들러붙는) 경향’, 즉, 까-마 땅하-(kāma taṇhā), 바와 땅하-(bhava taṇhā) 및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는 까-마사와(kāmasava, kāma āsava), 바와-사와(bhavāsava, bhava āsava) 및 위바와-사와(vibhavāsava, vibhava āsava)로 인해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땅하-(taṇhā)는 아사-와(asāva, 번뇌)로 인해 일어나는데, 세상 것에 깊게 박혀있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들러붙게 된다.
때때로 위바와-사와(vibhavāsava)는 딧타-사와(ditthāsava, ditthi asāva)와 아윗자-사와(avijjāsava, avijja āsava) 두 가지로 나뉜다. 이것은 위바와-사와(vibhavāsava)가 잘못된 견해(사견)와 무지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a-tanha-bhava-t-vibhava-t
2024/05/15(수)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고 싶다고 하여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선처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여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과나 닙바-나에 이르고 싶다고 하여 도과나 닙바-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사악처나 선처나 태어나게 될 (그 세상 형성의) 근본원인과 조건이 매칭되면 태어나게 되며, 사악처나 선처에서는 세상 형성의 근본원인과 조건이 작용하는 (세상) 상태다.
도과나 닙바-나에 이르게 될 지혜(출세간 아모-하)가 일어나 작용하면 도과나 닙바-나에 이르게 되며, 닙바-나에서는 세상 형성의 근본원인과 조건이 작용하지 않는 (닙바-나) 상태다.
2024/05/16(목)
올바른 붓다 담마를 읽음/들음(자-나또, jānato) 또는 자-나를 얻는 것이 자동적으로 소따빤나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데와닷따는 부처님으로부터 많은 법문을 들었지만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도 얻을 수 없었다. 읽은 것을 ‘지혜로 보아야’(빳사또, passato) 한다. 그것은 자-나와 함께 또는 자-나가 없이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사성제를 이해하지 않고 단지 자-나에 도달하는 것은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나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mma-samadhi-how-to-difine-it
2024/05/17(금)
동물을 포함한 사악처의 중생들은 그 해로운 아헤뚜까의 태어남으로 인해 가띠를 변화시킬 자유의지와 지능이 거의 없지만, 인간계의 중생들은 거의 대부분 띠헤뚜까 태어남으로 가띠를 변화시킬 자유의지와 지능이 있는데도, 대개 가띠를 변화시키게 받쳐주는 공덕이 부족하여 도과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사악처로 떨어지게 된다(올바른 붓다 담마가 전승되는 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육체를 받은 것만도 어마어마한 큰 공덕이지만 이 공덕만으로 도과에 이르기 위해 충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덕(뿐냐 깜마)을 무조건 많이 지어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세간 정견(특히, 업자성 정견)이다.
2024/05/18(토)
물질을 우선시하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대개 공덕을 물질적 보시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나, 공덕을 짓는 것은 선심이 우선이다. 불선심 또는 무(관)심으로 물질을 보시하는 것은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공덕행이 아니며, 단지 그 물질과 관련된 원인/결과의 법칙이 작용하게 될 뿐이다.
업과 과보의 법칙은 선심과 불선심에서만 적용되며, 무(관)심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업씨앗이 생기지 않는다).
물질과 관련된 원인/결과의 법칙에만 관심이 있고 정신과 관련된 원인/결과의 법칙인 업/과보의 법칙에는 관심이 없는 지식인들이 유물론자들(현대의 대부분의 물질과학자들)이다.
2024/05/19(일)
아라한의 끼리야 마음은 범부중생 또는 유학성자의 무(관)심)과는 다르므로, 아라한이 될 때까지는 무(관)심으로 행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선처 또는 열반에 이르기를 바라고(찬다) 결의(아디목카)하는 적극적 선심으로 행하도록 노력하여 뿐냐 깜마(범부중생의 경우) 또는 꾸살라 깜마(유학성자의 경우)를 짓도록 해야 한다.
뿐냐 깜마는 빤냐- 심소가 작용하지 않음(세간적 아모-하)에 따라 선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것이고, 꾸살라 깜마는 빤냐- 심소가 작용함(출세간적 아모-하)에 따라 열반에 이르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것이다.
2024/05/20(월)
실재하는 세상을 닛짜/수카/앗타 특성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환상의 세상이고, 실재하는 세상을 아닛짜/둑카/아낫따의 특성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실제의 세상이다.
즉, 환상의 세상은 각자의 무지와 갈망에 따라 마음에서 형성된 세상이며, 이로서 범부 중생들에 의해 잇짜/수카/앗따 특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세상이다..
실제의 세상은 아닛짜 특성으로 인해, 각자의 무지와 갈망에 따라 둑카 특성과 아낫따 특성이 되며, 범부 중생들은 그 무지와 갈망으로 인해 이 아닛짜 특성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 실제의 세상이 둑카가 되고 아낫따가 된다.
참조 포스트: https://cafe.naver.com/puredhamma/177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683243457
2024/05/21(화)
자-나-띠하여 자-나또가 되지 않으면, 빳사띠하여 빳사또가 될 수 없다.
즉, 아리야 상가로부터 성스런(출세간) 가르침을 들어 알지 못하는 자는 그 가르침을 보고 이해하는 자(아리야)가 될 수 없다.
최근까지도 아리야 상가가 사라지고 없어서 자-나-띠도 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자-나-띠부터 시작하여 빳사또가 될 수 있는 참으로 접하기 어려운 기회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현재 퓨어 담마를 접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이 기회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임을 아리야들은 아닛짜 특성으로 말해 주고 있다.
참조 포스트 및 법문: https://puredhamma.kr/janato-passato-and-ajaniya-cri 및 https://youtu.be/dUAP-61NM5k (재생시각 13분 이후)
2024/05/22(수)
<세 가지 삐따까 모두가 제1차 결집에서 염송되었다는 분명한 증거>
테라와-다 위냐야 삐따까(Theravāda Vinaya Piṭaka)의 ‘쭐-라왁카(Cūḷavagga)의 ‘21. Pañcasatikakkhandhaka’ 섹션의 마지막에 있는 ‘Tassuddānaṁ’라는 제목의 작은 섹션에는, “Upāliṁ vinayaṁ pucchi, suttantānandapaṇḍitaṁ; Piṭakaṁ tīṇi saṅgītiṁ,akaṁsu jinasāvakā.”라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우빨리 존자는 위나야를 염송하고(Upāliṁ vinayaṁ pucchi), 아난다 존자는 숫따를 염송하였으며(suttantānandapaṇḍitaṁ 또는 sutta ānanda paṇḍitaṁ), 참석한 500명의 아라한 모두가 세 가지 삐띠까를 모두 염송했다(Piṭakaṁ tīṇi saṅgītiṁ,akaṁsu jinasāvakā).”라고 말한다.
따라서, 띠삐따까의 세 가지 삐따까 모두가 제1차 결집에서 염송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아비담마의 기본 틀만이 제1차 결집에서는 가능했다. 더 많은 개선/확장이 제2차 및 제3차 결집에서 아비담마 삐따까에 더해졌다. 최종 버전이 제4차 결집에서 기록되었다[기록 승인완료].
출처: https://puredhamma.kr/abhidhamma-introduction
2024/05/23(목)
<아-난따리까 깜마 위빠-까의 작용은 간답바 개념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의 뜨리자 까야(trija kaya), 즉 간답바(gandhabba)는 ‘조밀한 인간 육체’에 의해 보호(차폐)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가 죽을 때, 뜨리자 까야(간답바)가 [육체에서] 나오면, 더 이상 육체에 의해 보호(차폐)되지 않는다. 그때에, 아-난따리까 깜마 위빠-까(ānantarika kamma vipāka)가 즉각적으로 시행(적용)된다.
이것이 ‘아-난따리까 깜마 위빠-까(ānantarika kamma vipāka)’라는 용어가 아-난따리까(ānantarika, 지연되지 않음)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 이유다 .
그러므로, 아-난따리까 깜마 위빠-까(ānantarika kamma vipāka)의 작용은 간답바(gandhabba) 개념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34
2024/05/24(금)
붓다 담마는 완전히 청정하고 다른 어느 유정체보다 높은 지혜를 지닌 붓다께서 추론이 아니라 직접 보고 발견하신 자연의 법칙에 대한 가르침이므로, 변할 수 없고 절대적인 궁극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다(붓다 담마는 마음의 청정와 지혜에 의해서만 그 청정/지혜의 레벨로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붓다 담마는 과학처럼 발전되고 수정되며 변화/진화하는 (상대적/인위적) 가르침이 아니다. 대승불교는 범부 중생들에 의해 이런 기본적인 사실(진실)을 무시하고 일어난 왜곡/오염된 불교이며, 예를 들어, (아무리 도덕적으로 청정한) 양부/양모를 죽이면 일반 살생(살인)의 업이지만, (아무리 도덕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생부/생모를 죽이면 왜 무간악업이 되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PS)
생부/생모를 죽이면 왜 무간악업이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붓다 담마에 따라 간답바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이해하여, 육체를 가진 인간과 육체가 없는 인간 간답바의 차이와 각 인간 간답바의 입태 확률의 희소함과 열반에 이르는 수행면에서 그 귀중한 기회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생부/생모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세간 정견으로 가르쳐지고 있으나, 오염된 가르침(간답바를 부정하는 전통 테라와다불교 포함)에서는 왜 특별한 사람인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2024/05/25(토)
불교 명상은 이 세상과 관련된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나리야 요기(수행자)는 호흡이나 흙덩이나 대야의 물과 같은 까시나 대상을 사용한다. 하지만, 불교(아리야) 명상은 빠띳짜 사뭅빠-다, 이 세상의 아닛짜 특성 등과 같은 담마 개념에 기반한다. ( https://puredhamma.kr/janato-passato-and-ajaniya-cri 의 #8 및 #9 참조)
출처: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5-ways-of-meditation/#post-49881
2024/05/26(일)
범부 중생이 닙바-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 결함으로 인해 색맹이나 장님이고 전생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색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색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육체 결함이 치유되거나 간답바가 육체 밖으로 나가서 세상의 대상을 보아야 한다. ( https://puredhamma.kr/three-types-of-bodies-potthapa 의 후부에 있는 ‘선천적으로 눈먼 여성이 처음으로 세상을 봄’ 부분을 참조)
2024/05/27(월)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 단멸에 대한 갈애)가 있으면, 까-마 땅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바와 땅하가 제거(수다원 및 사다함)된다고 해서, 반드시 까-마 땅하-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까-마 땅하-가 있으면, 바와 땅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까-마 땅하-가 제거(아나함)된다고 해서, 반드시 바와 땅하-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바와 땅하-가 제거되면(아라한), 위바와 땅하-도 없고 까-마 땅하-도 없다. 즉, 위바와 땅하-가 제거되지 않았고 까-마 땅하-가 제거되지 않았는데 바와 땅하가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밋차 위뭇띠(그릇된 해탈) 상태로 막행막식하는 자일 뿐이며, 무아견에서 이런 상태가 될 확률이 높다.
2024/05/28(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각 행위는 결과를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깜마의 법칙). 숨길 곳이 없다. 우리는 가끔 법 집행 기관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속일 수는 없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kamma-is-everything-d
2024/05/29(수)
아누사야가 남아 있는 상태(범부 중생 및 유학성자)에서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하거나 모든 업을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붓다 담마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범부 중생은 세간 팔정도 수행 밖에 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수행을 통해 뿐냐 깜마를 많이 짓도록 노력해야 하고, 유학성자는 출세간 팔정도 수행이 가능하므로 그 수행을 통해 꾸살라 깜마를 많이 짓도록 노력해야 한다.
뿐냐 깜마는 아사와(번뇌의 줄기와 잎)를 약화시키면서 번성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여 선처에 태어나고 꾸살라 깜마를 짓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깜마고, 꾸살라 깜마는 아누사야(번뇌의 뿌리)까지 약화시키면서 제거하여 닙바-나에 다가가게 하는 깜마다.
2024/05/30(목)
자-나는 업을 짓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부중생의 아나리야 자-나일 경우에는 강력한 뿐냐- 깜마가 되는 자-나 찟따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유학성자의 아리야 자-나일 경우에는 강력한 꾸살라 깜마가 되는 자-나 찟따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범부 중생이 강력한 뿐냐- 깜마가 되는 자-나 찟따로 잘못하여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띠를 기르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무상유정천에 태어나 닙바-나로 가는 면에서는 아무런 의미없이 허송세월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세간 자-나에 중독된 범부 중생들이 강력한 뿐냐- 깜마가 되는 자-나 찟따로 다른 범천 영역에 태어나도 닙바-나로 가는 면에서는 그곳에서 고요하게 색계 세상을 즐기면서 의미없이 허송세월하게 되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유정체는 닙바-나로 가는 것에 도움이 되는 행(또는 수행)을 할 경우에만 참된 의미가 있다. 세상에서 즐기거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행(수행)은 결국 참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닛짜/둑카/아낫따 특성을 지닌 곳이기 때문에 결국 사악처에 떨어져 상상할 수 없는 불행(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4/05/31(금)
<무한대는 실제다>
무한대가 쓸모없거나 가짜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자들은 무한대 없이 많은 적분을 할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항상 무한대를 다룬다(그러나 그들은 유한한 물리적 값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무한대의 개념은 실제적이다. (그리고, 기이/기묘하다). 예를 들어, 모든 유한한 길이의 선에는 1인치이든 1000마일이든 무한한 점이 있다. 뉴턴(Newton)과 라이프니츠(Leibniz)에 의한 미적분학의 발명은 그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다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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