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04/01(월)
찟따(특히 자와나 찟따)는 순간적(transient, momentary)으로 생멸하지만, 업씨앗(깜마 바와)을 형성하거나 마노마야 까야(웁빳띠 바와)를 형성하며 수많은 겁동안 지속되는 루빠를 발생시키는 강력한 것이다.
2024/04/02(화)
개념화 작용은 찟따의 요소인 산냐-에 의해 형성/유지되며, 윤회가 계속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어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작용이다. 두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냐로서, 세상의 특성에 대한 잘못된 산냐-인 ‘닛짜 산냐-’는 윤회를 계속되게 하는 산냐-고, 세상의 특성에 대한 올바른 산냐-인 ‘아닛짜 산냐-’는 열반에 이르게 하는 산냐-다.
2024/04/03(수)
아윗자-로 인해 아닛짜 특성의 세상에 들러붙는 찟따에 의해 아닛짜 특성의 세상에 더하여 둑카 특성과 아낫따 특성의 세상이 형성/유지되면서, 범부중생인 각 유정체의 생명흐름에서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윤회 세상이 끝없이 계속된다(유학성자인 각 유정체는 열반에 다가감).
2024/04/04(목)
법안(담마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붓다 담마가 명확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르침이 어렴풋하게 보이다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며, 이것은 빤냐-(빛)가 자람에 따라 아윗자(어둠)가 엷어지고 걷히면서 가르침(붓다 담마)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분명하게 된다는 것이며, 공부와 수행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갑작스럽게(돌발적으로) 또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024/04/05(금)
범부에서 수다원으로, 수다원에서 사다함으로, 사다함에서 아나함으로, 아나함에서 아라한으로 점진적으로 계보가 바뀌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변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무수한 겁에 걸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계보가 바뀌는 조건이 충족되어서 갑작스럽게 보이는 것이지, 조건이 충족되는 기간과 함께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2024/04/06(토)
세간 팔정도와 출세간 팔정도가 모두 그 요소와 함께 무수한 레벨의 사마디를 이루면서 열반을 향한 진전이 이루어지지만, 간단히 세간 팔정도의 사마디와 출세간 팔정도의 사마디라는 두가지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두 세간 팔정도와도 거리가 먼 세간 사견에 따른 길을 가고 있을 뿐이며, 불자들이 팔정도에 따라 살아간다고 말해도 거의 모두 세간 팔사도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다음 바와는 거의 모두 사악처로 가게 된다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셨다. 세간 팔정도에만 따라 살아가도 다음 생이 사악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2024/04/07(일)
닙바-나는 31영역 어느 곳에 재탄생하더라도 결실이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달성되며, 그것을 위해서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뿐냐 깜마-(puñña kammā) 또는 뿐냐-비 상카-라(puññābhi sankhāra)를 행하여 올바른 심적 경향(마음 가짐, 사고 방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26
2024/04/09(화)
아라한에게 ‘부끄러움/두려움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라한에게도 ‘부끄러움/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런 번역말들은 아라한을 오해하기에 충분하므로, 요즘같이 붓다 담마가 왜곡된 시대에 붓다 담마를 가르칠 때는 아라한에게 ‘아히리까/아놋땁빠가 없다’거나, 아라한에게 ‘히리/옷땁빠가 있다’ 등으로 말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잘못된 번역말로 인해 범부 중생들은 세상 생활에서 아라한 또는 깨달은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막행막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충설명)
‘아히리까/아놋땁빠’와 ‘히리/옷땁빠’는 아비담마에서 언급하는 심소(쩨따시까)로서, 모든 불선행(아꾸살라행)의 마음에는 ‘아히리까/아놋땁빠’가 있고, 모든 선행(꾸살라행) 또는 아라한의 해탈행(끼리야행)의 마음에는 ‘히리/옷땁빠’가 있다.
‘아히리까/아놋땁빠’는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부도덕행(아꾸살라행)과 도덕행(꾸살라행)/해탈행(끼리야행)을 구별하여 알지 못하고, 부도덕행(아꾸살라행)에 대해 부끄러움/두려움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단순히 ‘부끄러움없음/두려움없음’이라고 (번역하여) 말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히리/옷땁빠’는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부도덕행(아꾸살라행)과 도덕행(꾸살라행)/해탈행(끼리야행)을 구별하여 알고, 부도덕행(아꾸살라행)에 대해 부끄러움/두려움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단순히 ‘부끄러움/두려움’이라고 (번역하여) 말해서는 곤란하다.
2024/04/10(수)
인간 수명은 위빳시- 부처님 시대에는 80,000년이고, 고따마 부처님 시대에는 약 100년으로 시기에 따라 변하는데, 그것은 인간 바와(마노-마야 까-야)의 수명이 아니라 육체 수명이라고 한다.
현재 인간 간답바의 수명은 간답바에 따라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이른다고 추정되고 있다.
댓글)
본문의 8만4천 년과 같이, 경전에서 언급되는 8만4천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또는 정확히 그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 담마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붓다 담마에서 8만4천이라는 숫자는 ‘최고의/무수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로, 가장 높은 비상비비상처의 유정체 수명을 8만4천 겁, 최고의 산인 수미산(Sineru,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조밀도의 산임)의 폭과 높이와 깊이를 각각 8만4천 요자나, 8만4천 담마(경장 2만1천, 율장 2만1천, 논장 4만2천을 합하여 도합 8만4천) 등으로 말하고 있다.
2024/04/11(목)
‘아름다움(beauty), 추함(ugliness)’ 등이 외부 루빠에 없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숫닷타까를 이루는 궁극적 루빠요소인 간다(냄새 요소), 라사(맛 요소) 등이 외부 루빠에 없다고 하는 것은 아비담마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추함 등의 개념을 인식하는 것은 순전히 산냐의 개념화 작용이지만, 간다/라사 등의 실재를 인식하는 것은 그 실재와 인식 메카니즘과 산냐의 개념화 작용이 모두 관여하여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괴로움/즐거움/평온함 등의 느낌은 실재인 웨다나-에 속하므로 외부 루빠에는 없다고 말해도 타당하지만, 나마와 루빠로 이루어진 세상에 괴로움이 원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붓다 담마가 아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puredhamma/2817
댓글)
본문의 출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빠따위, 떼조, 와야 요소는 그것을 감지하는데 필요한 까-야 빠사다 루빠의 도움으로 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인식하고,
간다 요소는 그것을 감지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가-나 빠사다 루빠(코 기관과 뇌를 포함)의 도움으로 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인식하며,
라사 요소는 그것을 감지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지와 빠사다 루바(혀 기관과 뇌를 포함)의 도움으로 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인식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24/04/12(금)
우리는 집을 떠나 짧은 여행을 하거나 좀 긴 여행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집으로 돌아온다. 붓다께서는 4개의 가장 낮은 영역(apāya, 아빠-야, 사악처)이 대부분 유정체의 본집(본거지)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28
2024/04/13(토)
많은 사람들은 괴로움을 이해하고 닙바-나(Nibbāna, 열반)를 추구하는 자극을 얻기 위해 고통을 느껴야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고통스러울 때(말하자면, 너무 늙었을 때) 심오한 담마 개념을 숙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는 느낌(vēdana, 웨-다나)을 통해서가 아니라, 완전한 세계관과 이 ‘더 넓은 세상(31영역)’의 세 가지 특성(아닛짜_anicca, 둑카_dukkha, 아낫따_anatta)을 이해하여, 지혜(paññā, 빤냐-)로 볼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28
2024/04/14(일)
닙바-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세분하여 말하면, 범부 중생들은 세간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유학성자들을 출세간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간 팔정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간 정견에 따라 세상(악처/선처)을 올바르게 알아야 하고, 출세간 팔정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출세간 정견에 따라 닙바-나(열반)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2024/04/15(월)
준비된 학생에게만 스승(가르침)이 나타난다.
이 말은 스승의 가르침이 이해될 마음의 준비 단계가 되어야 이해된다는 것이며, 마음의 준비 단계는 마음의 청정도 레벨을 말한다.
마음이 청정도 레벨은 범부 중생일 경우에는 세간 팔정도의 실천에 따른 레벨이며, 유학성자의 경우에는 출세간 팔정도의 실천에 따른 레벨이다.
(여기서, ‘스승의 가르침’은 ‘붓다 담마’를 말한다.)
2024/04/16(화)
<단순한 행와 업행 - 1>
다른 사람(또는 유정체)를 위해 행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업행을 할 수는 없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한다는 말은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을 위해 업행을 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업행은 자신만을 위한 좋은(유익한) 업행이거나 나쁜(해로운) 업행일 수만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다고 하는 행은 다른 사람이 어떤 업행을 하는데 하나의 외부 조건일 뿐이며, 단순한 행일 뿐이다.
그 단순한 행은 그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 좋은(유익한) 업행도 아니고 나쁜(해로운) 업행도 아닌 단순한 행일 뿐이다.
‘다사 아꾸살라행’도 아니고 ‘다사 꾸살라행’도 아닌 ‘단순한 행’은 ‘다사 아꾸살라행’보다는 낫지만, 선처에 태어나거나 열반에 이르기 위한 자신의 업적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24/04/17(수)
<단순한 행와 업행 - 2>
하나의 외부 조건일 뿐인 그 단순한 행의 행위자에 대해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고마움을 표하며 행하는 것은 그 행하는 사람의 좋은(유익한) 업행이며 그 사람 자신에게 좋은(유익한) 업행이지, 그 조건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좋은(유익한) 업행은 아닌 것이다.
고마운 마음도 없이 그냥 그 조건을 단순히 받는 것은 그 사람(주는 사람)이나 자신(받는 사람)에게도 그냥 단순한 행일 뿐이다. 이에 대해 고마워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나쁜(해로운) 생각/행을 하는 것은 행하는 사람의 해로운 업행일 뿐이며, 대상자의 업행과는 관련이 없다.
나쁜(해로운) 업행인 ‘다사 아꾸살라행’은 다른 어떤 누구에게 나쁜(해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나쁜(해로운) 것이며, 좋은(유익한) 업행인 ‘다사 꾸살라행’은 다른 어떤 누구에게 좋은(유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좋은(유익한) 것이다.
2024/04/18(목)
<단순한 행와 업행 - 3>
아라한에게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유정체)에게 그냥 단순한 행이 아니라, 자신에게 나쁜(해로운) 업행을 하지 않고 좋은(유익한) 업행을 하려고 노력한 결과로, 마음이 완전히 청정하게 되어 업행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고, 지혜가 작용하여 세상의 그 상황/관계에서 가장 적절한 단순한 행이 자동적으로 일어날 뿐이며, 이것이 끼리야 행이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수행을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기적 수행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이기적인 것은 수행이 아니며, 탐진치가 작용하여 자신에게 나쁜 업행이 될 뿐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갈망(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행위에 불과하며 단순한 행도 아니고 좋은(유익한) 업행도 아니며, ‘다사 아꾸살라행’에 속하는 나쁜(해로운) 업행일 뿐인 것이다.
2024/04/19(금)
우리가 어떤 일 또는 행위를 하는 선택에서 우선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대상(유정체 및 무정체)의 일반적 원인/결과의 문제에 따른 책임(또는 결과)보다는 우리 각자의 업/과보의 문제에 따른 책임(또는 과보)을 우선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대상 유정체의 업/과보의 문제는 우리 각자에게는 대상의 일반적 원인/결과의 문제로만 간주하면 됨).
대상(유정체 및 무정체)의 일반적 원인/결과의 문제는 객관적 사실의 문제고, 각자의 업/과보의 문제는 각자의 마음(견해를 포함하는 불선심/선심)에 따른 주관적 사실의 문제다.
업/과보의 문제에 따른 책임(또는 과보)을 우선 중요하게 고려하여 일하거나 행하는 자가 세간/출세간 팔정도에 따라 세간/출세간 삼마- 사띠하며 일하거나 행하는 자(범부중생 또는 유학성자)다.
참고 포스트: https://cafe.naver.com/puredhamma/2758
2024/04/20(토)
무정체에게는 물질적인 일반적 원인/결과의 법칙만 작용하지만, 유정체에게는 물질적인 일반적 원인/결과의 법칙 외에 업/과보의 법칙이 작용한다.
붓다 담마에서는 생성된 물질의 일반적 원인/결과의 법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궁극적 생성 원인과 함께 업/과보의 법칙을 다룬다.
2024/04/21(일)
악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것은 밋차 딧티(사견)에 따른 밋차 사띠를 하는 결의/노력을 하는 것이고,
선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것은 로끼야 삼마 딧티(세간 정견)에 따른 로끼야 삼마 사띠로 결의/노력을 하는 것이며,
닙바-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것은 로꿋따라 삼마 딧티(출세간 정견)에 따른 로꿋따라 삼마 사띠로 결의/노력을 하는 것이다.
2024/04/22(월)
이 세상에 있는 즐거운 것들은 까-마(kāma)가 아니다. 그런 것들에 들러붙고 그것들에 대한 의식적인 생각들(상깝빠, saṅkappa)을 생성하는 것이 까-마(kāma)다. 달리 말하면, 까-마(kāma)는 까-마 로-까(kāma loka, 욕계)의 감각적 즐거움, 즉 다섯가지 감각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들러붙음을 의미한다. 까-마(kāma)라는 낱말은 땅하-(taṇhā) 및 잇차-(icchā)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0
2024/04/23(화)
로끼야 삼마- 사띠(세간 정념)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선처에 태어나기 위해 다사 아꾸살라를 하지 않고 다사 꾸살라를 하도록 사띠하는 것이며(세간 팔정도의 사띠), 이를 위해서는 세간 정견(로끼야 삼마- 딧티)이 확립되어야 한다.
로꿋따라 삼마- 사띠(출세간 정념)는 세상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 다사 아꾸살라를 하지 않고 다사 꾸살라를 하도록 사띠하는 것이며(출세간 팔정도의 사띠), 이를 위해서는 세간 정견(로끼야 삼마- 딧티)에 더하여 출세간 정견(로꿋따라 삼마- 딧티)이 확립되어야 한다.
2024/04/24(수)
붓다 담마의 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않더라도 상견 또는 단견과 함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선처에 태어나기 위해 다사 아꾸살라를 하지 않고 다사 꾸살라를 하도록 사띠할 수 있다(세간 팔정도의 사띠가 아니라 팔사도의 사띠임).
그러나, 이 때에는 상견 또는 단견으로는 유혹이 강하면 다사 아꾸살라를 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게(성직자들 또는 마음수련 수행자들의 경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선처에 태어날 수는 있을 것이나, 결코 출세간 정견이 확립될 수 없으므로 열반에 이를 수는 없다.
2024/04/25(목)
아라한이 되면 왜 재가생활이 불가능하며 출가할 수 밖에 없을까?
재가자들이 관심있고 즐거워하는 세상것에 관심이 없으므로 재가자들에게 불편함과 해로운 결과를 야기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출가자들의 모임에서 살아가며 재가자들에게도 담마를 들을 기회가 있게 하는 것만이 몸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라한들에게는 거추장스런 몸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육체적 괴로움이며, 하루라도 빨리 반열반에 이르는 것만이 더 없는 지복이며, 세상에서 지복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참으로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2024/04/26(금)
혹자는 과보를 받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아라한이 되면 세상에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범부 중생에게 세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오해되게 할 수 있다. 세상 자체가 둑카며, 세상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둑카며,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둑카다.
우리와 같은 몸이 없는 천신/범천은 아라한의 깨달음(해탈)에 이르는 순간에 무여열반(반열반) 상태가 되어 세상에는 더 이상 없으므로, 세상에서 경험되는 유여열반과 세상에서 경험될 수 없는 무여열반(반열반)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아라한이 되면 세상에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띨락카나의 세상에서 영구적 열반적정 상태가 가능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 열반적정 상태라고 볼 수 있는 상수멸(멸진정) 상태의 아라한도 세상에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라한이 세상에 있어도 문제가 없다면, 왜 상수멸(멸진정)에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2024/04/27(토)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와 땅하-고,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위바와 땅하-다.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은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기를 바란다(유물론자의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적 견해인 사견에 의함)는 것이다.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고 죽으면 태어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이 생멸 상태이며 연기에 의한 윤회다.
유학성자는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죽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열반을 바란다.
열반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죽지 않는 것, 즉 불생불멸 상태며 연기하지 않으며 윤회하지 않는 상태다.
2024/04/28(일)
아라한은 열반(불생불멸 상태의 유여열반)에 이른 상태이므로, 열반(불생불멸) 상태를 바랄 이유가 없으며, 마노마야까야가 육체에서 분리되는 순간에 자연적으로 무여열반(반열반)에 이르므로 모든 유정체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해 마친 상태다. 즉, 아라한은 범부중생이나 유학성자처럼 정신적(마노마야 까야)으로 생멸(로까 사무다야) 상태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불생불멸(로까 니로다야)의 열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라한이 육체가 살아 있으므로 세상에 살고 있다(즉, 유여열반)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참조: https://cafe.naver.com/puredhamma/3076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3397768867
2024/04/29(월)
느낌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 들러붙는 것이고, 탐/진/치로 이를 추구할 때 악처로 가는 깜마 행이 되고, 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이를 추구할 때 선처로 가는 깜마 행이 된다.
느낌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열반으로 가는 꾸살라 깜마 행이 되며 이것이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것이다.
2024/04/30(화)
거친 물질 감각(세가지)을 통한 느낌까지 추구하는 곳이 욕계고, 미세한 물질 감각(두가지)을 통한 느낌까지만 추구하는 곳이 색계고, 마노 감각을 통한 느낌만 추구하는 곳이 무색계다.
이 모든 느낌을 추구하지 않을 때 유학성자에게는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에 의한 꾸살라 깜마의 행이 되고, 아라한에게는 깜마가 형성되지 않는 끼리야 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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