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07/01(월)
붓다 담마에서 ‘세상/세상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하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 등‘으로 ‘대상의 구체적 특성을 알아차려라’는 말이 아니라(대상의 구체적 특성은 각 유정체에 따라 과보로 자동적으로 인식되므로 노력이 불필요), ‘세상 모든 것의 보편적 특성(틸락카나)을 보라(아라한이 아니면 노력이 필요)’는 것이다. 이는 세상 모든 것의 보편적 특성(틸락카나)를 보아서,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지 않고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틸락카나를 보지 못하면 성스런 팔정도 수행을 할 수 없다.
(틸락카나를 보기 위해서는 아닛짜/둑카/아낫따의 의미를 우선 성자들로부터 듣고 알아야 하며, 틸락카나를 무상/고/무아로 아는 것은 틸락카나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다.)
<보충 설명>
탐진치로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행하면 악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빠빠 깜마의 업행(아뿐냐-비상카-라)이 되는데, 이것은 수행이 아니다.
(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행하면 선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뿐냐- 깜마의 업행(뿐냐-비상카-라 또는 아-넨자-비상카-라)이 되는데, 이것은 세간 수행이다.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면(세상/세상것에 들러붙지 않음) 열반으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꾸살라 깜마(깜막카야-야 깜마, 즉 깜마 위빠-까를 무효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깜마)의 업행(꾸살라물라상카-라)이 되는데, 이것이 붓다 담마의 성스런 팔정도 수행이다.
2024/07/02(화)
붓다 담마는 둑카(위빠리나마 둑카, 둑카 둑카, 상카라 둑카)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이지, 단순히 둑카 웨다나에서 벗어나 수카 웨다나 또는 우뻭카 웨다나를 즐기거나 누리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웨다나는 둑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는 곧 세상의 띨락카나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바와의 형성이 그치고, 루빠의 형성이 그치고, 윈냐-나의 형성이 그쳐,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2024/07/03(수)
세상은 공한 것이 아니라 물질계의 공간(아까사 다뚜)에 헤아릴 수 없는 유정체와 무정체로 가득차 있고, 각 유정체의 정신계에 각자의 기억기록과 업씨앗으로 가득차 있다.
위 물질계와 정신계로 이루어진 세상에는 닙바-나가 공하고(없고), 닙바-나에는 세상이 공하다(없다).
2024/07/04(목)
(탐진치의 작용에 의한) 욕망 충족이 세상의 행복이고, (탐진치가 작용하지 않는) 욕망 소멸이 닙바-나의 지복이다.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둑카고,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둑카의 소멸이다.
알아야 하고 추구해야 하며 성취해야 하는 것은 욕망 충족이 아니라, 욕망 소멸, 즉 닙바-나다.
욕망이 충족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고, 욕망이 소멸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붓다 담마다.
2024/07/05(금)
(세상의) 어떤 것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할 때, (탐진치의 작용에 의한) 욕망이 일어남으로 인해 생기는 둑카를 알아차리고 그 욕망을 그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얼마나 빨리 그것(탐진치, 욕망 또는 둑카)을 알아차리고 얼마나 빨리 그것을 그치는가에 따라 수행 또는 지혜의 레벨이 다르며, 영구적으로 탐진치/욕망/둑카가 일어나지 않을 때 최상의 지혜에 의한 수행이 완성된 것, 아라한과에 이른 것이다.
(탐진치의 작용에 의한)에 의한 욕망과 그에 따른 둑카가 없이 (세상의) 어떤 것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할 때는 유학성자가 출세간 수행(즉, 성스런 팔정도 수행)을 할 때(꾸살라물라 연기의 작용)와 무학성자의 행(즉, 끼리야 행, 성스런 팔정도 수행의 완성행)일 때 뿐이다.
2024/07/06(토)
수행은 행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말하면) ‘탐진치로 행’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탐진치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술적으로 말하면) 범부 중생은 우선, ‘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노력을 하고 ‘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세간(평범한) 팔정도라고 하며 세간 정견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그 다음 기술적으로 말하면) 범부 중생이 출세간 지혜가 생겨 유학성자가 되면,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노력을 하고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출세간(성스런) 팔정도라고 하며 세간 정견과 출세간 정견을 바탕으로 하며, 붓다 담마의 (참된) 수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024/07/07(일)
자유의지가 없으면 세상 형성도 없고 열반 성취도 없다.
자유의지는 마노마야 까야로 태어남의 원인과 조건에 따라, 그리고 그 마노마야 까야로 살아감의 원인과 조건에 따라 한정적으로 작용하는데, 아헤뚜까의 태어남에서는 자유의지가 거의 없어 업(좋은 업과 나쁜 업 모두)을 거의 짓지 못하고, (인간의) 드위헤뚜까/띠헤뚜까 태어남에서는 자유의지가 많아 좋은 업과 나쁜 업을 많이(그리고 강하게) 지으며 이에 따라 가띠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으며(수행에 육체의 뇌가 큰 도움) 띠헤뚜까 태어남에서는 자-나와 도과 성취도 가능하다.
원인(조건)과 결과의 법칙인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에 의해 세상이 형성되어 윤회가 계속되고, 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에 의해 열반이 성취되며, 빠띳짜 사뭅빠-다의 과정은 의도적 생각(자유의지)를 포함한다.
2024/07/08(월)
상카-라에는 마노-(찟따) 상카-라, 와찌- 상카-라, 까-야 상카-라가 있다.
경전을 읽을 때, 이 상카-라가 ‘업(업씨앗)을 형성하는 상카-라’인지, ‘업(업씨앗)을 형성하지 않는 상카-라’인지 잘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
‘업(업씨앗)을 형성하는 상카-라’는 ‘업(업씨앗)을 형성하지 않는 상카-라’와 구별하여 설명하기 위해 ‘아비상카-라’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즉, 마노-(찟따) 아비상카-라, 와찌- 아비상카-라, 까-야 아비상카-라가 있다.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sankhara-an-introduction
2024/07/09(화)
일반적으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초기의 마노-(찟따) 아비상카-라는 가띠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아비상카-라의 가장 약한 형태며 재생연결의 업(업씨앗)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재생연결의 업(업씨앗)은 수많은 찟따 위티에 의해 와찌- 아비상카-라 및 까-야 아비상카-라로 강해졌을 때 형성되는데, 동일한 대상에 대해 수많은 찟따 위티에 의한 마노-(찟따)/와찌/까-야 아비상카-라가 업(업씨앗)을 강화시킨다.
<참고 그림>
아래 찟따 위티의 연속/반복 그림을 참조하여 동일한 대상에 대한 업씨앗의 강도를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림에서는 업의 강도를 나타내기 위해 마노 깜마, 와찌 깜마, 및 까-야 깜마로 표시되어 있다.
댓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업씨앗이 강화되어 저장되는 것과 연속되는 각 찟따 위띠에서 그 업력이 강화되는 것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본문을 수정하였습니다. Ven. Lal님의 설명과 모순되지 않도록 그 강도의 업씨앗에 대해 어떤 찟따 위티에서 재생연결이 일어나는 자와나는 J2~J5 또는 J3~J5의 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24.7.18. 12:17
2024/07/10(수)
세상의 모든 현상은 무정체에게는 물질적 원인과 결과의 (법칙) 문제지만, 유정체에게는 정신적 업과 과보의 (법칙) 문제다.
유정체에게는 그것은 세상의 모든 그 현상을 인식하는 각자의 마음(과보식과 업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 유정체에게는 업식(자와나)이 일어나지 않아도 과보식 및 끼리야식과 관련되어 있다.
붓다 담마에서는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물질적 원인과 결과의 (법칙)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둑카와 관련된 정신적 업과 과보의 (법칙) 문제를 다룬다.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지혜는 둑카와 관련된 정신적 업과 과보의 문제 및 그 소멸에 관한 것, 즉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2024/07/11(목)
붓다 담마에 따라 문답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없다(무아, no-self, non-self)’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나는 윤회(연기)하는 자로서, 현재에는 조밀한 육체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 (웁빳띠) 바와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윤회(연기)하지 않는 ‘웁빳띠 바와’는 없으며, 더 이상 ‘웁빳띠 바와’가 형성되지 않을 때 더 이상 윤회(연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나’라고 하는 자와 관련없는 닙바-나다.
나는 윤회(연기)하는 중에만 그 시점에서 어떤 유형(인간, 동물, 천신 등 기본 31가지 유형이나 더 세분화된 유형)의 ‘웁빳띠 바와’라고 특징지워 말할 수 있다.
댓글)
(1)
불자들이 흔히 말하는 잘못된 말을 지적한 것입니다. 글 중의 '웁빳띠 바와'에 대해서는 퓨어담마 교재의 p17 하단에 간단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2024.7.11. 07:32
(2)
'웁빳띠 바와'는 현재 이 윤회 세상에 있는 유정체의 수만큼 현재 무한히 많이 있습니다. 즉, 현재까지 아라한이나 붓다가 된 '웁빳띠 바와'도 무한히 많았으며, 현재 '웁빳띠 바와'로 남아 있는 유정체도 무한히 많이 있습니다. 미래에 '웁빳띠 바와'로 남아 있는 유정체도 무한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무한대 문제'에 대해서는 https://puredhamma.kr/the-infinity-problem-in-buddhi 을 참조하세요.
2024.7.11. 08:13
2024/07/12(금)
쩨따나-(cetanā)는 쩨따시까(cetasika)의 세트를 통한 ‘의도’를 나타낸다. 상카-라(saṅkhāra)는 그 의도와 함께 행위(action)로 이어진다. 깜마(kamma)는 그 의도로 행해진 행(deed)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ma-sankhara-cetana-sancetan
2024/07/13(토)
마음 자리(하다야 왓투)는 뇌를 통해 모든 감각 입력을 받는다. 뇌는 외부 루빠와 마음 사이의 중개자다. 뇌는 마음보다 [처리 속도가] 훨씬 느리다. 뇌는 하나의 ‘데이터 패킷’을 처리하는데 적어도 백분의 1초가 걸리는데, 마음 자리(하다야 왓투)는 그것을 수십억분의 1초 내에 처리한다. 따라서, 마음은 뇌보다 대략 수백만배 더 빠르다.
그러므로, 마음은 ‘뇌로부터 더 많은 데이터’가 분석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비활성화될 수 있다. ‘데이터 패킷’을 처리하는 사이에, 마음은 바왕가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처리되는 감각 입력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기회/시간을 제공한다. 다른 이들(보통 사람, 즉 뿌툿자나)은 단지 ‘흐름을 따라 가며’, 완전한 기능을 하는 뇌를 가진 ‘인간이 되는 것’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contamination-of-h-m-detailed
2024/07/14(일)
‘까-마/루빠/아루빠 다뚜’와 ‘까-마/루빠/아루빠 바와’의 차이를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다뚜는 단지 유정체가 태어나는/태어난 세계(로까)를 의미하지만, 바와는 그 유정체가 빠띳짜 사뭅빠-다에 있는 바와 단계로 형성되는/형성된 바와를 의미한다.
바와에는 일생중에 형성되는 깜마 바와가 있고, 재생연결시에 형성되는 웁빳띠 바와가 있다. 웁빳띠 바와는 각 유정체의 서로 다른 질의 ‘마노마야 까야’라고 보면 되며,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그 상태가 ‘웁빳띠 바왕가’ 상태다(‘아산냐- 삿따’, 즉 무상유정체는 ‘웁빳띠 바왕가’ 상태가 아닌 ‘마노마야 까야’임).
아라한은 인간의 까-마 다뚜로 살아가면서, 자-나를 통해 루빠/아루빠 다뚜를 경험할 수 있지만 까-마/루빠/아루빠 바와는 형성되지 않는다. 아꾸살라물라 및 꾸살라물라 연기가 그친 상태기 때문이다.
참조 포스트: https://puredhamma.kr/upaya-and-upadana-two-stages-o
2024/07/15(월)
붓다 담마(구체적으로, 사성제, 빠띳짜 사뭅빠-다, 띨락카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조건의 충족은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범부 중생으로서, 뿐냐- 깜마를 형성하는 뿐냐 아비상카-라를 통해 이루어지고, 둘째, 유학 성자로서, 꾸살라 깜마를 형성하는 꾸살라물라 상카-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유학 성자로서 뿐냐 깜마를 형성하는 뿐냐 아비상카-라도 필요하다. 뿐냐- 깜마는 주로 세간 정견을 바탕으로 한 다사 꾸살라행을 통해 형성되며, 꾸살라 깜마는 세간 정견에 더하여 출세간 정견을 바탕으로 한 다사 꾸살라행을 통해 형성된다.
2024/07/16(화)
붓다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 또는 타인이 붓다 담마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정도의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또는 어떤 도과를 성취할 정도의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명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항상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우선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현재 어떤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또는 어떤 도과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다사 아꾸살라행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다사 아꾸살라행을 하지 않고 다사 꾸살라행을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것이 법구경 183의 첫부분(삽바빠-빳사 아까라낭, 꾸살라사 우빠삼빠다-)이고, 붓다의 마지막 유언은 그 노력을 ‘압빠마데나 삼빠뎃타’로 강조하고 있다.
2024/07/17(수)
브라흐마 영역에 있는 한, 강한 감각 입력이 있어도 그의 까-마 라-가 아누사야(kāma rāga anusaya)는 촉발될(또는 ‘깨어날’) 수 없다. 한 살된 아기를 생각해 보면, 그 아기는 까-마 라-가 아누사야를 제거하지 않았지만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개념이 없다. 즉 까-마 라-가가 일어날 수 없다. 브라흐마는 그 아기와 같은데, 그는 음식, 냄새, 또는 성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붓다께서는 아기에게는 ‘삭까-야 딧티’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Mahāmālukya Sutta (MN 64)’에서 유사한 예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아나리야 브라흐마에게 까-마 라-가 아누사야가 그대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촉발될 수 없다. 즉 까-마 라-가는 아나리야 브라흐마에게도 일어날 수 없다.
출처: https://puredhamma.kr/anuseti-how-anusaya-grows-with
2024/07/18(목)
까-마kāma(아빗자-abhijjā) 상깝빠(saṅkappa), 브야-빠-다(byāpāda, vyāpāda) 상깝빠(saṅkappa), 위힝사- 상깝빠(vihiṃsā saṅkappa)가 모두 나쁜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다. 그것들은 탐함, 미워함, 미혹함과 관련되어 있으며, 악처에 태어나게 하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아뿐냐비 와찌- 상카-라다.
그것들의 반대는 넥깜마(nekkhamma), 아브야-빠-다(abyāpāda), 아위힝사-(avihiṃsā) 상깝빠(saṅkappa)로서, 삼마- 상깝빠(Sammā Saṅkappa)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들이 세간적일 때 선처에 태어나게 하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뿐냐비 와찌- 상카-라 또는 아-넨자비 와찌- 상카-라고, 출세간적일 때 열반에 다가가게 하는 꾸살라물라 와찌- 상카-라다.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quv.kr/124 및 https://puredhamma.kr/vaci-sankhara-sankappa-and-v
2024/07/19(금)
현재 나와 있는 ‘불교’의 다양한 모든 버전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참으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2천 5백여년 동안, 사람들은 붓다 담마(Buddha Dhamma)를 자신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성형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그렇게 많은 버전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붓다 담마의 독특함, 진짜 메시지가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당장 바로 그것(붓다 담마)을 파악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이 독특한 메시지를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buddhism-without-rebirth-and-n
2024/07/20(토)
생명은 찟따 위티(citta vithi)를 통해서가 아니라 업 에너지(kammic energy)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깜마자 까-야(kammaja kāya)는 항상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29
2024/07/21(일)
<느낌과 수행>
느끼면서, 세상의 느낌을 추구하는 수행이 세간(아나리야) 수행이다.
느끼되, 세상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는 수행이 출세간(아리야) 수행이다.
출세간(아리야) 수행으로 (과보로 생기는 느낌만 느끼면서) 세상의 느낌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될 때, 수행이 완성되어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아라한이 된다.
2024/07/22(월)
마음이 만든 웨다나-(삼팟사 자- 웨다나-, mind-made vedanā)는 ‘오염된 아꾸살라 마음이 만든 웨다나-’, 즉 자와나 찟따에 의해 형성되는 ‘나와 깜마’를 짓는 마음에 의한 웨다나-를 지칭하며, ‘과보 마음’이나 ‘끼리야 마음’이나 ‘유학성자의 출세간 수행시에 꾸살라물라 연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웨다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염된) 마음이 만든 느낌’은 ‘(오염된) 마음의 느낌’과 동일한 말이다.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tanha-result-of-sanna-giving-r
2024/07/23(화)
붓다 담마에서, 네 가지 유형의 음식은 까발린까-(kabalinkā), 팟사(phassa), 마노- 산쩨따나-(manō sañcetanā), 및 윈냐-나(viññāṇa) 아-하-라다.
여기서, 까발린까- 아-하-라는 ‘집착된 물질 음식(집착된 오-자)’를 뜻하고, 마노- 산쩨따나- 아-하-라는 오염된 쩨따나-를 뜻하며, 팟사 아-하-라는 ‘삼팟사’를 뜻하고, 윈냐-나 아-하-라는 ‘깜마 윈냐-나’를 뜻한다.
닙바-나는 이 모든 네 가지 음식이 그친 상태를 말하며, 아라한은 이 모든 네 가지 음식이 그친 상태다.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ahara-food-for-the-mental-body
2024/07/24(수)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 대상이 아니라 외부 대상에 대한 갈애로 인해 탐진치에 따라 일어나는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즉, 자신이 외부 대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근본 원인은 세상의 특성(아닛짜/둑카/아낫따)에 대한 대한 무지며, 이 무지로 인해 세상의 특성을 닛짜/수카/앗따로 보고 외부 대상에 들러붙기 때문에 외부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세상의 특성이 닛짜/수카/앗따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어야 하는데,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오염된 마음(무지와 갈애의 마음)에 의한 것이므로, 세상의 특성을 바르게 알고 보고(자-나또 빳사또) 들러붙지 않는 완전한 청정한 마음이 되면 두려움이 영구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데, 이것이 닙바-나다.
2024/07/25(목)
세상은 둑카이므로,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거나 욕망 충족의 행복(세상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세상의 느낌(즐거운/평온한 느낌)을 추구한다는 것은 둑카를 추구한다는 것이며, 둑카의 진리(고성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즐거운 느낌도 둑카고, 세상의 괴로운 느낌도 둑카고, 세상의 즐겁지도괴롭지도 않은(중간) 느낌도 둑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세상의 즐거운 느낌을 둑카로 보고, 세상의 괴로운 느낌을 창으로 보고, 세상의 즐겁지도괴롭지도 않은(중간) 느낌을 아닛짜로 보라고 하셨는데(SN36.5),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4/07/26(금)
(i) 뿌툿자나는 외부 대상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고유한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들러붙는다. 따라서, 그들은 높은 기대를 가지고 그런 것을 더 많이 얻기를 바라는데, 그 기대가 윈냐-나(viññāna)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그런 기대는 외부 대상이 그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기루를 쫓아가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다.
(ii) 그러나, (각 유정체에 내장된) ‘왜곡된 산냐-’는 그런 외부 것들이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산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에 필수적이다. Perception(인식)은 산냐-(saññā)에 대한 가장 가까운 영어 낱말이다. ‘왜곡된 산냐’는 그 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는데, 그것은 우리 정신에 구축되고 또한 우리 육체에 구축되어, 육체 기능이 서로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이 ‘왜곡된 산냐-’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출처: https://puredhamma.kr/arammana-initiates-critical-pr
2024/07/27(토)
아헤뚜까로 마노-마야 까-야가 형성된 유정체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아헤뚜까 탄생의 유정체는 빠빠/아꾸살라/ 뿐냐/꾸살라 깜마를 짓는 아꾸살라물라/꾸살라물라 연기가 거의 형성되지 않거나 형성되더라도 약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아꾸살라물라/꾸살라물라) 연기사이클 내에 포함되어 있다.
(참고: https://cafe.naver.com/puredhamma/3193 본문 및 댓글)
2024/07/28(일)
<세간 지혜와 출세간 지혜 사이의 관계>
붓다 담마에서, 세간 지혜를 지닌다는 것은 주로 업과 과보를 얼마나 올바르고 확고하게 그리고 자주 많이 숙고하는가를 말하고, 출세간 지혜를 지닌다는 것은 세간 지혜의 바탕에서 주로 띨락카나를 얼마나 올바르고 확고하게 그리고 자주 많이 숙고하는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세간 지혜의 기반이 없는 출세간 지혜는 삼마- 냐-나 및 삼마- 위뭇띠가 아니라 (막행막식으로 이어지는) 밋차- 냐-나 및 밋차- 위뭇띠에 이르게 된다.
2024/07/29(월)
<위바와 땅하-의 두 가지 의미>
유물론적인 의미의 위바와 땅하-는 수다원 단계에서 제거되지만, 바와 땅하-에 반대되는 의미의 위바와 땅하-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된다.
유물론적인 의미의 위바와 땅하는 단견(웃쩨다 딧티)과 관련된 땅하-고,
바와 땅하-에 반대되는 의미의 위바와 땅하-는 업 에너지의 소멸에 의해서만 없어지는 ‘형성된 바와(깜마 바와 및 웁빳띠 바와)’를 없애고자 하는 땅하-다.
PS)
아라한은 깜마 바와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지만 (반열반에 들지 않는 한) 깜마 바와에 따른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고, 웁빳띠 바와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지만 (반열반에 들지 않는 한) 반열반까지 존재하는 웁빳띠 바와의 작용으로 깜마 바와에 따른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라한이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생을 마감(반열반)하고자 자살하는 것은 위바와 땅하-의 의도가 아니지만, 범부 중생이나 유학성자가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생을 마감(윤회 계속)하고자 자살하는 것은 위바와 땅하-의 의도다.
2024/07/30(화)
바와(bhava)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붓다 담마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붓다(바와 웃다)라는 말부터 바와와 관련되어 있고, 연기에는 바와 단계가 있고, 업 씨앗은 깜마 바와와 관련된 것이고, 마노-마야 까-야(간답바)는 웁빳띠 바와와 관련된 것이며, 이 웁빳띠 바와의 상태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바왕가 상태로서 바와와 관련되어 있다.
세상(로까)은 바와가 형성된 상태 또는 유정체가 바와를 계속 형성하는 상태로서 윤회하는 상태고, 열반(닙바-나)은 바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 또는 유정체가 바와를 형성하지 않는 상태로서 윤회하지 않는 상태다.
2024/07/31(수)
세상에 의례의식이 없을 수는 없다.
의례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의례의식과 관련된 견해 및 집착이 문제다.
아라한에 이르지 못하고 현재 세상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모하-(세간적으로 볼 때 악처에 태어나는 어리석음) 또는 아윗자-(출세간적으로 볼 때 선처에 태어나는 어리석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닙바-나에 이르는데 유익한(윤회 고통을 감소시키는) 의례의식 및 이에 대한 마음가짐이 있는데, 이것은 불탐/부진/불치의 꾸살라 마음에 의한 것이다.
닙바-나에 이르는데 해로운(윤회 고통을 증가시키는) 의례의식 및 이에 대한 마음가짐이 있는데, 이것은 탐/진/치의 아꾸살라마 마음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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