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10/01(화)
올바른 붓다 담마를 읽음/들음(자-나또, jānato) 또는 자-나를 얻는 것이 자동적으로 소따빤나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데와닷따는 부처님으로부터 많은 법문을 들었지만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도 얻을 수 없었다. 읽은 것을 ‘지혜로 보아야’(빳사또, passato) 한다. 그것은 자-나와 함께 또는 자-나가 없이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사성제를 이해하지 않고 단지 자-나에 도달하는 것은 쓸모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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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영구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까-마 로까(kāma loka)를 초월하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아리아 자-나(Ariya jhāna)’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정의하면, 아리야 자-나와 함께 하는 자는 아나-가미일 것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mma-samadhi-how-to-difine-it
2024/10/02(수)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는 사성제를 이해하는 성자(소따빤나 아누가-미 단계 이상의 성자)에게만 가능하다. 그에 비해, 다양한 유형의 사마-디(samādhi)와 자-나(jhāna)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자-나'는 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아리야 자-나(Ariya jhāna)’로 변환될 수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madhi-jhana-and-samma-samadh
2024/10/03(목)
자-나(jhāna)는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제거하지 못한 루빠-와짜라 브라흐마(색계 범천)의 정신 상태다. 그것들은 세간/평범한(아나리야) 사마-디 유형이다. 세간 자-나는 ‘그 자-나에 있는 중에’ 막가 팔라(magga phala)에 도달함으로써 아리야 자-나(Ariya jhāna)로 바뀔 수 있다. 여기서, ‘그 자-나에 있는 동안에’라는 것은 ‘그 자-나 사마-빳띠(jhāna samāpatti)에 있는 중에’를 의미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jhana-finer-details
2024/10/04(금)
띠삐따까(Tipiṭaka)에 따르면, 고따마 붓다께서 자신의 빠-라미따-(pāramitā)를 충족하는 중에 우리 세상에 나타나신 붓다는 512,000분이라고 한다.
과거 31 마하- 깝빠-(mahā kappā) 동안 6 분의 붓다가 출현하셨고, 이 마하- 깝빠-(mahā kappā)가 끝나기 전에 출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 멧떼이야 붓다(Metteyya Buddha, 미륵불)와 함께, 그 31 마하- 깝빠-(mahā kappā)에는 7 분의 부처님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대략 4 마하-깝빠-(mahā kappā)마다 한 분의 부처님이 출현한다고 가정하면, 우리 보살(고따마 부처님)이 빠-라미따-(pāramitā)를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2백만(2x10^6) 마하- 깝빠-(mahā kappā, 대겁)가 될 것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animisa-locana-bodhi-poojawa-a
2024/10/05(토)
도과에 이르는 삼마 사마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가 이루어져야 하고,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엘라마예 냐-나(Moral conduct Wisdom)와 사마디 바와나마예 냐-나(Correct application of the concentration Wisdom)가 생겨야 하며, 이 지혜가 생기기 위해서는 수따마예 냐-나(Learning the pristine Dhamma Wisdom)가 우선 생겨야 한다.
출처: https://youtu.be/yjW3HwjXb4Y?si=zkXu5D8PJKCfXXIO
2024/10/06(일)
인식(perception)은 그 무엇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빠르게 찰나생찰나멸하는 찟따가 대상(아-람마나)에 대해 분리(separation)와 결합(combination)의 복잡한 과정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찟따의 가장 빠른 찰나생찰나멸은 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분리와 결합에 필수적이다.
일원론(비이원론)에서는 모든 것은 하나이므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만, 대상에서 인식 주체가 분리되지 않고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인식 주체가 대상에 결합(통합)된 상태에서는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분리와 결합이 반복되면서 인식의 질과 양이 다르게 된다. 여기서 인식의 질은 분리 정도와 결합 정도에 따라서도 상이하게 된다.
2024/10/07(월)
컴퓨터의 온/오프 과정과 같은 생멸의 변화가 없다면 인식이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온/오프 과정은 무정체의 물질적 변화 과정일 뿐이지만, 쩨따시까로 이루어지는 찟따의 찰나생찰나멸(온/오프)이므로 유정체의 정신적 인식 과정이 된다. 컴퓨터에 의한 인식은 무정체(컴퓨터)의 물질적 변화 과정을 우리(유정체)가 정신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찟따가 인식하기 위한 최소한 기본요소(쩨따시까)는 7가지(팟사, 웨다나-, 산냐-, 쩨따나-, 에깍가따, 지-위띤드리야, 마나시까-라)다.
2024/10/08(화)
산냐-가 없으면 세상을 인식할 수 없으며, 이 상태는 모든 유정체의 바왕가 상태나 아라한의 상수멸 또는 빠리닙바-나 상태다.
세상을 가장 순수하게 인식하는 상태에서는 세상의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며, 이 상태가 아라한의 팔라 사마-빳띠 상태다.
왜곡된 산냐-로만 세상을 인식하는 상태는 아라한의 끼리야 마음 상태나 유학성자의 출세간 수행(꾸살라물라 연기) 상태며, 이것을 붓다 담마에서는 일반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곡된 산냐-와 오염된 산냐-로 세상을 인식하는 상태는 모든 범부중생과 출세간 수행을 하지 않는 유학성자의 상태며, 이것을 붓다 담마에서는 일반적으로 오염된 마음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2024/10/09(수)
욕계(선처)와 색계의 마노마야 까야(육체 없는 간답바 포함)는 천안통(멀리 보는 신통력)과 천이통(멀리 듣는 신통력)과 신족통(멀리 가는 신통력)은 마노마야 까야의 레벨에 따라 모두 가능하지만,
숙명통(전생을 보는 신통력)과 타심통(다른 유정체의 마음을 아는 신통력)과 누진통(막가팔라에 의해 번뇌를 제거하는 신통력)은 마음의 청정도와 지혜의 개발과 신통력 개발에 따른 레벨로 개별적으로만 가능하다.
타심통에 대해서는 마음의 청정도가 높은 유정체는 마음의 청정도가 낮은 유정체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만, 마음의 청정도가 낮은 유정체는 마음의 청정도가 높은 유정체의 마음을 알 수 없다.
2024/10/10(목)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의한 행은 설령 그것이 붓다 담마를 가르치는 행이라고 해도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마음이 아니며,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음에 의한 산(san)이 작용하는 뿐냐행일 뿐이다. 이는 붓다께서 (무학성자 또는 출세간 수행 중인 유학성자는) 닙바-나에 이르는 가르침인 붓다 담마에도 들러붙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닙바-나에 이르는 가르침인 붓다 담마와 이것을 이해하는 빤냐-도 세상에 속하는 것이며,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이용할 도구(뗏목)이지 닙바-나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PS)
범부 중생이나 출세간 수행 중에 있지 않은 유학성자는 닙바-나에 이르는 가르침인 붓다 담마에 들러붙어 가르치거나 배우는 행을 하지만, 이것은 뿐냐행이며, 닙바-나에 다가갈 수 있는 뿐냐행이다. 뿐냐행에는 닙바-나에 다가갈 수 있는 뿐냐행이 있고, 닙바-나에 다가갈 수 없는 뿐냐행이 있는데, 참된 붓다 담마가 아닌 가르침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행은 닙바-나에 다가갈 수 있는 뿐냐행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참된 붓다 담마를 스스로 발견하는(깨닫는) 삼마삼붓다나 빠쩨까붓다가 되기 위한 보살의 뿐냐행을 하는 경우에는 다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붓다 담마는 수다원을 거쳐 아라한 붓다가 되기 위한 가르침으로서, 수다원을 거치지 않는 삼마삼붓다께서 스스로 발견하여 가르치신 담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024/10/11(금)
망갈라 숫따에서 ‘발-라-난’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의도(라가, 도사, 모하)를 의미하고,
‘빤디따-난’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의도(아라가, 아도사, 아모하)를 의미한다.
출처: https://youtu.be/Y3Rs3rFARdI 의 재생시각 3:30 경
(PS: 물론, 어리석은 의도의 사람 또는 지혜로운 의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의도의 사람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아라한도 타인의 레벨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우선 자신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24/10/12(토)
(외부 세계에서 유리한 감각적 입력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욕망은 부담이다. 항상 채워짐을 구하는 공허함이다. 그러한 충족이 이루어지면 더 이상 부담이나 공허함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그렇다. 그것은 작은 구멍이 있는 양동이와 비슷한데, 한꺼번에 비워 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필연적으로 비워 진다. 그러면 충족을 위한 끝없는 탐색이 다시 시작된다.
(A desire (aimed at seeking favorable sensory inputs in the outside world) is a burden. It is a void that always seeks to be filled.
When that fulfillment does occur, it might not feel like a burden or void any longer, but in reality it still is. It’s similar to a bucket with a small hole – it won’t empty all at once, but with enough time, it inevitably will. Then, the endless search for fulfillment starts all over once more.)
출처: https://unconditionalhappiness.org/the-happiness-paradox/
2024/10/13(일)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성자는 까-막찬다(kāmacchanda)를 영구적으로 제거했고, 최악 수준의 로-바(lōbha)가 없다. 따라서 감각적 즐거움을 얻으려고 ‘아빠-야가미(apāyagami, 악처로 향하는) 행’을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성자는 모든 3가지 유형의 라-가(rāga), 즉 까-마 라-가(kāma rāga), 루빠 라-가(rupa rāga), 및 아루빠 라-가(arupa rāga)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까다가미(Sakadagami, 일래자) 성자도 더 감소되었지만 까-마 라-가(kāma rāga)를 가지고 있다. 까-마 로까(kāma loka, 욕계)에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0
2024/10/14(월)
아나-가미(Anāgami, 불환자) 성자는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제거했다. 따라서 인간계와 천상계를 포함하여 11개 영역의 욕계에는 어떤 곳에도 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며, 루-빠 로까(rūpa loka, 색계)의 숫다와사(suddavasa) 영역에 재탄생하여 그곳에서 닙바나(Nibbāna)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나-가미(Anāgami, 불환자) 성자는 까-마(kāma)가 여전히 있으므로 감각 즐거움에 들러붙지는 않지만 즐거움을 누리기는 할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점이지만, 사실은 아나-가미(Anāgami) 성자에게는 여전히 ‘사견이 없는 4가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며, 그것이 까-마(kāma)다. 그 4가지 아꾸살라 찟따(akusala citta)는 아라한에 이르러서야 일어나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0
2024/10/15(화)
까-마 라-가(kāma rāga)는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에서 감각 즐거움을 추구하는 라-가(rāga, 갈망)다. 까-마 라-가(kāma rāga)는 왓투 까-마(vatthu kāma)와 낄레사 까-마(kilesa 또는 klesha kāma)라는 2가지 수준이 있다. 왓투 까-마(vatthu kāma)는 감각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이고, 낄레사 까-마(kilesa kāma)는 감각 즐거움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 대상을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는 갈망이다.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성자는 왓투 까-마(vatthu kāma)를 잃었지만, 낄레사 까-마(kilesa kāma)는 남아 있다. 즉, 여전히 감각 즐거움을 갈망하지만 그 감각 즐거움의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은 없다. 예를 들면,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성자는 여전히 안락한 아름다운 집에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은 없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1
2024/10/16(수)
변하지 않는 ‘나(me)’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단계 전에 명상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아낫따(anatta)를 무아(no-self)로 잘못 해석한다. 소-따빤나가 ‘나(me)’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me)’에 대한 인식(산냐-)은 여전히 지니고 있다. ‘나(me)’라는 느낌은 아나-가-미(Anāgāmi, 불환자) 단계 후에 도달되는 아라한 단계에서만 제거된다. 마나(māna, 자존감)와 웃닷짜(uddacca, 우위감)가 있는 한, ‘나’라는 느낌은 여전히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61
2024/10/17(목)
까-마(kāma)의 동의어는, 삐야(piya), 뻬마(pema), 라띠(rati)(‘rathi’로 발음), 및 땅하(taṇhā)다. 잇차-(icchā)도 땅하-(taṇhā)와 동일한 의미다. 영어에서는, desire(욕망, 바람), attachment(들러붙음), craving(갈망), liking(좋아함) 등과 같은 낱말을 사용하여 동일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18(금)
유쾌한(즐거운) 경험이 있다. 그것들은 까-마(kāma)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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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을 더 많이 하려는(쌓으려는) 욕망(바람)이 까-마(kāma)다. 그 욕망(바람)은 끝이 없다. 유혹이 충분히 높으면,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 때 우리는 곤경/궁지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관건은 그런 유혹을 어떻게 멈추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유혹을 의지력으로는 멈출 수 없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19(토)
까-막찬다(kāmacchanda)는 가장 높은 레벨의 들러붙음이다. 이 레벨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혐오스러운(용납될 수 없는) 행위(살인, 성폭행 등)를 한다.
까-마(kāma)가 까-막찬다(kāmacchanda) 레벨로 올라갈 때, 그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인한 나쁜 결과를 알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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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야-빠-다(vyāpāda)는 까-막찬다(kāmacchanda)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탐욕(욕정)을 나타내는 대신에 증오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 분노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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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밋다(thina-middha)는 무기력하고 꽉 막힌 마음을 나타낸다. 그런 마음은 어려운 개념은 고사하고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예는 하루 종일 영화, TV, 스포츠 등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꽉 막혔다.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나타남은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다. 여기서, 사람들은 부나 권력을 인식하고 ‘고양되어’(웃닷짜, uddhacca) 낮은/천한 행위를 하기(꾹꿋짜, kukkucca) 시작한다. 예를 들어, 힘있는 정치인이나 부유한 사람은 뇌물, 성폭행 등과 같은 ‘천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마음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에 영향을 받기 쉬운데, 그것은 붓다 담마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참된 믿음이 없는] 마음에서는 붓다 담마의 개념이 올바른지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업(깜마)과 재탄생의 법칙에 대한 의심이 있다.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이 위찌낏차(vicikicchā)다. 그런 의심은 사성제를 이해할 때에만 사라진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20(일)
성스런 진리를 이해하는 핵심 측면은 까-마(kāma)(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갈애)가 미래 괴로움의 근본 원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고통)의 근본 원인을 묘사하는 구절인,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āṃ)”, 또는 “얌 삐 잇창 나 라바띠 땀 삐 둑캉(yam pi icchaṃ na labhati tam pi dukkhaṃ)”에 내포되어 있다.(‘첫 숫따에 있는 불교의 에센스’ 포스트를 참조).
‘얌 삐 잇창(yam pi icchaṃ)’은 ‘좋아하거나 갈망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 라바띠(na labhati)’는 ‘얻지 못함’을 의미한다. ‘땀 삐 둑캉(tam pi dukkhaṃ)'은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간단히 “갈망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까-마(kāma)는 잇차-(icchā)로 인해 일어난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21(월)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에는 두 가지 레벨이 있다. 까-마(kāma)가 괴로움의 근본 원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더 깊은 레벨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다.
먼저, 업(깜마)과 재탄생의 법칙을 믿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1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를 제거해야 한다. 더 깊은 레벨의 잘못된 견해는 소따빤나가 되어 세상 것에 대한 들러붙음은 미래의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즉 사성제를 이해할 때 제거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22(화)
그 더 깊은 레벨의 잘못된 견해는 소따빤나(Sotapanna)가 될 때 사라지기(엷어지기) 시작한다. 그 시점에서, 모든 5가지 니-와라나(nīvaraṇa)가 영구적으로 제거된다.
보통 사람(뿌툿자노, puthujjano)은 정확히 정반대로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 살아 간다. 그것이 그 뿌리 깊은 마음가짐(마음성향)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맛있는 미끼만 생각하고 그 맛있는 미끼를 무는 것에 숨겨진 위험을 보지 못하는 물고기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nca-nivarana-sensual-pleasur
2024/10/23(수)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 또는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는 무해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그것들에 대해 알 수 없다. 관심있는 대상에 대해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를 생성하는 데 몇 시간을 보내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
또한, 자신의 의지력에 의해 억압된 그 모든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와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는 마노- 상카-라(manō saṅkhāra, 단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로 시작되었고, 그 다음 보통 의식적인 고의성 있는 생각, 즉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생성함으로써 그 상태를 계속하여, 실제 말과 심지어 신체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말과 신체 행동에 해당하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는 피했지만,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 즉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로 인한 것들은 여전히 나쁜 깜마(kamma)로 간주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kama-it-is-not-just-s
2024/10/24(목)
소따빤나(Sotapanna)는 세속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결점/단점을 숙고해야 하고(즉, 아닛짜, 둑카, 아낫따라는 본질을 숙고하는 것인, 아닛짜-누빳사나-, 둑카-누빳사나-, 아낫따-누빳사나-를 함), 닙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야(교제해야) 한다.
그(소따빤나)가 세속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결점/단점을 [계속] 숙고함에 따라,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는 사라지고 어느 날 그는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도달한다. 그 후에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진다.
출처: https://puredhamma.kr/iccha-tanha-kama-root-causes-o
2024/10/25(금)
단지 새로운 존재를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를 움켜잡는(우빠-다-나, upādāna) 두 번째 단계가 자동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바와(bhava)가 뿌납바와(punabbhava, ‘puna’ + ‘bhava’, 여기서 ‘puna’는 ‘반복/갱신됨’을 의미함)가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마음은 그 저장된 에너지(바와, bhava)를 움켜잡아서(우빠-다-나, upādāna) 다음 존재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bhava-and-punabbhava-kammic-en
2024/10/26(토)
<세상과 열반의 특성과 위빳사나 수행>
세상(로까)에는 영혼이라는 앗따도 없고, 무혼이라는 아낫따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개체를 나타내는 앗따 개념이 있고, 그 개체의 난감하고 실속없고 결실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아낫따 개념이 있다.
붓다 담마에서는 세상(로까) 또는 세상의 개체를 이루는 실재의 특성을 아닛짜/둑카/아낫따라고 하고, 열반(닙바-나)이라는 실재의 특성을 닛짜/수카/앗따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로까)에서 닛짜/수카/앗따 상태를 구하는 것이 윤회를 계속하는 잘못된 길(팔사도)이고, 열반(닙바-나)에서 닛짜/수카/앗따 상태를 구하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길(팔정도)이다.
세상에 대한 닛짜/수카/앗따 특성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아닛짜/둑카/아낫따 특성을 받아들이는 요니소 마나시카라의 아나빠나 사띠 수행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2024/10/27(일)
일생 중에 작동하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 즉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Idappaccayātā Paṭicca Samuppāda)에서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upādāna paccayā bhava)’ 단계는 두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 (1) 그것은 그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업 에너지(즉, 바와_bhava)를 생성한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그 바와(bhava)에 이를 수 있고 그 바와(bhava)에 일시적으로 ‘태어날’ 수 있다. (2) 또한, 생성된 업 에너지의 일부는 윈냐-나(viññāṇa)계에 깜마 비-자(kamma bīja, 업 씨앗)로서 보존/유지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bhava-and-punabbhava-kammic-en
2024/10/28(월)
현 바와(current bhava)의 업 에너지(즉, 바와 에너지)가 고갈되는 때에 특별한 유형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 즉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Uppatti Paṭicca Samuppāda)가 작동한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 즉 ‘갱신된 존재(renewed existence)’가 움켜잡아지는(우빠-다-나, upādāna) 때다.
이 특별한 경우에,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upādāna paccayā bhava)’ 단계는 ‘우빠-다-나 빳짜야- 뿌납바와(upādāna paccayā punabbhava)’가 된다.
그러므로, 쭈띠-빠띠산디(cuti-patisandhi, 죽음-재생연결) 순간(현 존재의 끝)에 작동하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에서, 그 단계는 ‘우빠-다-나 빳짜야- 뿌납바와(upādāna paccayā punabbhava)’로 해석되어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bhava-and-punabbhava-kammic-en
2024/10/29(화)
루-빡칸다(rūpakkhandha)를 ‘형태 무더기(form aggregate)’로 번역하면, 그것은 ‘고체 모음(집합물)’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루-빠(rūpa)와 루-빡칸다(rūpakkhandha)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루빠(rupa)가 있으며, 각자 경험한 루빠(rupa)들만이 각자의 루빡칸다(rupakkhandha)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루-빡칸다(rūpakkhandha)는 또다른 사람의 루-빡칸다(rūpakkhandha)와는 다르다.
출처: https://puredhamma.kr/difference-rupa-rupakkhandha
2024/10/30(수)
4대 요소로 이루어진 루-빠(rūpa)가 반드시 나무와 같은 고형 물체(그것들은 ‘완나 루-빠_vaṇṇa rūpa’임)는 아니다. (빛과 소리와 같은) 에너지 유형도 루-빠(rūpa) 범주에 포함된다. 5가지 육체적 감각으로 입력되는 모든 감각 입력은 루-빠(rūpa)다.
붓다께서는 루빠(rupa)를 감각 경험(윈냐-나_viññāna)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경험하는 담마-(dhammā)도 루빠(rupa)의 한 유형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difference-rupa-rupakkhandha
2024/10/31(목)
루-빡칸다(Rūpakkhandha)는 자신이 경험한/경험할 것으로 예상되는/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유형의 루빠(rupa)를 포함한다.
우리는 고속으로 진행되는 ‘보는 사건’ 시리즈(시각 인식과정)을 통해 대상을 본다. 그 개별적인 ‘스냅샷(snapshots)’들은 우리 마음에 등록되지 않는다. 수많은 스냅샷의 전체적인 결과만이 등록되고 루-빠 칸다(rūpa khandha)에 추가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difference-rupa-rupakkhan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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