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3/06/01(목)
소따-빤나(Sotāpanna)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의 위험함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갈망하는 한, 여전히 그것들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소따-빤나 성자는 그 감각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는 결코하지 않는다.
소따-빤나 성자가 그런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에서 벗어나려면, ‘까-마 앗사-다’의 위험함을 숙고해야 한다. 그것이 ‘아수바 바-와나-(asubha bhāvanā)’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aguna-kama-kamaraga-k
2023/06/02(금)
이해해야 할 중요한 점은 비록 ‘선행’을 하는 것이 필수적임에 불구하고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자는 반드시 다른 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며, 두 가지 이유(세 가지 유형의 로까와 31영역으로 된 광대 세계관을 알지 못하고, 끝없는 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로 인해 (대부분) 고통(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재탄생 과정(윤회)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앙굴리말라 이야기 - 붓다 담마에 대한 많은 통찰
https://puredhamma.kr/account-of-angulimala-many-i
2023/06/03(토)
흔히, 아라한은 행하지만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아라한은 아비상카라의 행(업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땅하와 아윗자에 의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산가띠가 없고 산쩨따나가 없으므로 산가띠 또는 산쩨따나에 의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원인(헤뚜)(로바/도사/모하/알로바/아도사/아모하)이 있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반열반에 들 때까지 원인없는 과보 마음과 끼리야 마음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과보마음도 범부 중생 또는 유학성자의 과보마음과는 다른 차원의 마음이다(즉, 과보마음을 이루는 마음요소인 산냐의 질이 서로 다르다.)
2023/06/04(일)
세상이 형성되는 원인(헤뚜)은 로바/도사/모하 및 세간적 알로바/아도사/아모하로서, 요약하여 말하면 아윗자와 땅하-다.
세상은 삶과 죽음이 연기법에 따라 계속되는 상태(현상)로 윤회하는 것이다.
세상에 삶과 죽음이 없는 어떤 실체(영혼/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상견/자아견이고, 세상이 형성되는 원인이 남아 있는 데도 죽으면 끝나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없다(공하다, 또는 어떤 실체도 없다)고 하는 견해가 단견/무아견이다.
상견/자아견과 단견/무아견은 원인이 남아 연기법에 따라 바뀌면서 윤회가 계속되는 마노마야까야(간답바)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대표적인 잘못된 견해다.
2023/06/05(월)
범부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세상의 본질적 특성(삼특상)을 참으로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다.
즉, 세상 속의 행복을 구하는가? 세상에서 벗어난 상태의 행복을 구하는가?에 있다.
범부 중생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대개 세상에서 벗어나는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멀리하고자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범부 중생들에게 왜곡될 수 밖에 없으며, 범부 중생들은 이러한 왜곡된 불교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세간 선정의 행복을 구하는 것은 세상 속의 행복을 구하는 것에 있다.
2023/06/06(화)
세간 선정의 행복에 중독되면 세상에서 벗어난 상태의 행복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선정을 닦기 전에 세상의 본질(삼특상)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것이 우선이다(즉, 수다원에 우선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본질(삼특상)에 대해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수다원에 이르지 못하고) 선정을 닦게 되면, 세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윤회를 더욱 길게하기만 할 뿐이며, 출세간의 행복 관점에서 보면 허송세월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다원에 이른 후에는 세간 선정을 닦든 출세간 선정을 닦든 어떤 수행을 하든, 아꾸살라를 버리고 꾸살라는 취하는 아나빠나의 본래 의미에 따른 모든 수행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2023/06/07(수)
<쓸데 없는 말, 하지 말아야 할 어리석은 말>
붓다께서는 아꾸살라행을 하지 말고 꾸살라행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악행도 하지 말고 선행도 하지 말라’, 또는 ‘악행에도 들러붙지 말고 선행에도 들러붙지 말라’고 하는 것은 범부 중생은 물론이고 유학 성자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말이며, 무학성자는 그런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런 말은 모든 중생들에게 전혀 쓸데 없는 말이며, 모든 유정체에게 쓸데 없는 말이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이런 말이 다사 아꾸살라행에 속하는 삼빱빨라-빠-, 즉 ‘쓸데없는 말’이며, 그런 말 자체가 아꾸살라행에 속한다는 것을 모르는 범부 중생이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추가 설명글 1)
범부 중생들은 우선 악행에 들러붙지 말고 선행에 들러붙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런 노력을 하는 중에 세상의 본질을 깨달으면 자연적으로 성자가 되면서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상태가 되면서 그 선행이 뿐냐 깜마가 아닌 꾸살라 깜마가 되는 선행이 되면서 더 높은 성자의 상태로 다가가게 되며, 최종적으로 아라한과를 거쳐 반열반에 이르게 된다.
즉,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는 범부 중생에게는 물론이고,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유학성자에게도 ‘악행도 하지 말고 선행도 하지 말라’, 또는 ‘악행에도 들러붙지 말고 선행에도 들러붙지 말라’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어리석은 말이다.
유학성자는 이런 어리석은 말을 듣더라도 현혹되지 않지만, 범부 중생들은 이런 어리석은 말에 현혹되어 유학성자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므로, 범부 중생들에게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추가 설명글 2)
붓다 담마 수행의 핵심은 아나빠나사띠/사띠빳타나 수행으로서, 이는 부처님 시대 당시에도 널리 가르쳐지고 있었던 호흡수행 또는 단순한 알아차림 수행이 아니라, 아꾸살라행을 버리고 꾸살라행을 취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악행을 하지말라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악행도 하지 말고 선행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붓다 담마의 핵심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으며, 이것이 다사 아꾸살라행에 속하는 잘못된 말인 것이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도덕행도 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붓다 담마를 일반 사회의 가르침보다 더 나쁜 가르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붓다 또는 붓다 담마를 모욕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심각한 잘못된 말을 아무 생각없이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아꾸살라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23/06/08(목)
우리가 배우는 (현대) 물질과학은 모두 육체적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거친 다뚜 레벨(분자, 원자, 소립자 레벨)의 루빠를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물질과학은 정신적 몸을 이루는 마하 부따 또는 부따 레벨(숫닷타까 레벨)의 루빠를 타당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천신의 미세한 다뚜 레벨을 포함하여 마하 부따 또는 부따 레벨(즉, 마노마야 까야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배우는 (현대) 물질과학에 의한 기술, 산업 또는 첨단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치가 없는 것이다.
(마노마야 까야의 루빠 세계는 붓다 담마의 아비담마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육체적 몸의 감각기관이나 (현대) 물질과학의 어떤 도구를 통해서도 천신의 미세한 다뚜 레벨의 몸, 색계 범천의 마하부따 레벨의 몸, 무색계 범천의 부따 레벨의 몸, 즉 숫닷타까 레벨의 몸을 인식할 수 없다.)
2023/06/09(금)
실천수행은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마음을 자유의지로 제어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성향(가띠)를 바꾸는 것, 즉 산가띠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나빠나사띠/사띠빳타나로 상카-라를 제어하는 것이며, 아비상카-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범부 중생은 우선 아뿐냐 아비상카-라가 일어나지 않고 뿐냐비상카-라가 일어나게 제어하여, 실천수행과 담마공부를 병행하면서 뿐냐 아비상카-라도 일어나지 않고 꾸살라물라상카-라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올바른 담마공부를 하지 않으면 모든 실천수행은 뿐냐 아비상카-라가 일어나는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
2023/06/10(토)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사는 삶이 범부 중생의 삶이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 사는 삶이 유학 성자의 삶이며,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사는 삶이 무학성자의 삶이다.
범부 중생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태어나지 않게 살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특성을 모르며 유신견이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신견이 제거되었다는 것은 무아견이 확립되었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취온의 견해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오취온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님).
2023/06/11(일)
태어난다는 것은 좋은 과보든 나쁜 과보든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고 받게 된다는 것이며, 이것이 둑카(괴로움)다.
과보는 받는다는 것이고 받게 된다는 것은 과보식(위빠-까 윈냐-나)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과보가 열매맺게 된다는 것은 과보식(위빠-까 윈냐-나)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업식(깜마 윈냐-나)이 일어나 반응하게 되어 새로운 업에너지(일시적 바와, 깜마 바와, 또는 웁빳띠 바와/뿌납바와)가 생기면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2023/06/12(월)
마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마음은 마노마야 까야(깜마자 까야와 찟따자 까야와 우뚜자 까야로 이루어짐)에서 일어나며, 자세히 말하면 깜마자 까야 중의 하다야 왓투와 빠사다 루빠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더욱 자세히 말할 때,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은 빠사다 루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빠사다 루빠의 도움으로 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난다.
의식(마노 또는 마노 윈냐나)은 빠사다 루빠의 도움이 없이 하다야 왓투에서 직접 일어난다.
참고)
현재 전통 테라와다불교의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은 빠사다 루빠를 토대로 하여 일어나고, 의식만 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나며, 물질적 토대없이 일어나는 찟따도 있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는 마노마야 까야의 메커니즘 또는 작용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청정도론 제14장에서는 짝쿠 빠사다 루빠는 눈의 휜자위에 싸여있는 검은 동자의 중간에 있고, 소따 빠사다 루빠는 귀 구멍 속에 부드럽고 갈색이 털에 둘여싸여 있는 반지 모양을 한 곳에 있으며, 가나 빠사다 루빠는 코 구멍에서 염소 발굽 모양을 한 곳에 있고, 지와 빠사다 루빠는 전체 혀의 중간에 연꽃잎의 끝 모양을 한 곳에 있으며, 까야 빠사다 루빠는 몸의 모든 것에 두루 퍼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노마야 까야(또는 간답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의 신경계와 마노마야 까야의 빠사다 루빠를 분리하여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경전(특히 아비담마의 루빠 부분)을 잘못 주석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23/06/13(화)
‘세상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라고 흔히 말한다.
이 말은 당연한 말이며, ‘열반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의 반대 의미로 쓰인다면 이것도 쓸데없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여(향하여) 정진하는 것이고, 유여열반에 들면 깨달음을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고 무여열반에 들면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참고)
잘 알다시피, 세상 속에서 아꾸살라행을 하지 않고 꾸살라행을 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하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때,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수행하게 되면 드러난 번뇌를 제거하여 선처에 태어날 수는 있지만 잠재된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에 이를 수는 없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는 말은 열반을 구하지 말고 윤회를 계속하라는 말로 쉽게 오해될 수 있는 말이다.
아꾸살라물라 연기는 마음이 세상을 향하는 연기며, 꾸살라물라 연기는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연기다.
범부 중생은 아꾸살라물라 연기밖에 일어날 수 없으므로 우선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있는 상태(최소한 수다원도의 유학성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붓다 가르침에 따라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서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깨달음을 구하라’로 말해야 한다.
붓다 담마에서 깨달음은 최소한 수다원도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2023/06/14(수)
<아닛짜/둑카/아낫따와 고군분투와 노력>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아닛짜_anicca). 그래서, 고군분투한 후에 단지 괴로움으로 끝나게 된다(둑카_dukkha). 그래서 모든 이 고군분투들은 실속이 없고 난감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아낫따_anatta).
아닛짜 특성을 모르거나 잊고 마음이 세상/세상것을 향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윗자-(또는 모하)를 기반으로 한 땅하-와 우빠-다-나에 의한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작용하는 것이고, 결국 둑카/아낫따로 이어진다.
아닛짜 특성을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어느 레벨 이상으로 이해하여 마음이 열반을 향하여 노력(여기에, 고군분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음)하는 것이 빤냐를 기반으로 한 찟따 빠사-다 및 아디목카에 의한 꾸살라물라 연기가 작용하는 것이고, 결국 수카/앗따로 이어진다.
참고)
붓다 담마를 전법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 외의 다른 유정체에게는 올바른 붓다 담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만 만들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조건에 따라 붓다 담마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최종 결정하여 행하는 것은 각자의 오온 세계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문제며, 각자의 문제며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부처님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그 때에 인식되는 모든 사람들만이라도 그 현생 또는 내생에 붓다 담마를 이해하여 열반에 이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에게도 아닛짜 특성의 진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전법 과정 또는 붓다 담마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아닛짜 특성은 작용하는 것이며, 자신이 만족하는 대로 전법 또는 공부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순간, 땅하-와 우빠다-나가 작용하여 마음이 세상/세상것을 향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이 되면서 세상의 또다른 문제(둑카/아낫따 특성의 문제)가 된다.
(참조 포스트: 틸락카나 ㅡ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 https://cafe.naver.com/puredhamma/2507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3115325032 )
2023/06/15(목)
<웨다나와 관련된 경험 및 노력>
육체적으로 괴롭다는 것은 까이까 웨다나의 일종인 둑카 웨다나를 과보로 경험한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괴롭다는 것은 쩨따시까 웨다나의 일종으로서 삼팟사ㅡ자-ㅡ웨다나에 속하는 도마낫사 웨다나를 나쁜 업행을 하면서 경험한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즐겁거나 평온하다는 것은 삼팟사ㅡ자-ㅡ웨다나에 속하는 소마낫사/우뻭카 웨다나를 좋은 업행 또는 나쁜 업행을 하면서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해야 하는 것은 삼팟사ㅡ자-ㅡ웨다나로서, 우선 나쁜 업행과 함께 하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를 경험하지 말고 좋은 업행과 함께 하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를 경험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다음에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니라미사 웨다나(선정과 관련된 웨다나) 또는 니라미사따라 웨다나(유학성자의 꾸살라물라 연기에 의한 웨다나)를 경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고)
범부 중생이 선정과 관련된 니라미사 웨다나에 중독되면 유학성자에 이를 가능성이 없으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유학성자에 이른 후에는 선정에 중독되는 위험에서 벗어난 상태이고 선정에 중독된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이, 모든 수행은 열반을 향하여 수행하는 것이 되므로 아꾸살라를 멀리하고 꾸살라를 가까이 하는 어떤 수행도 문제가 없다.
범부 중생들이 선정에 중독되는 위험이라는 것은 사악처에 떨어질 위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유학성자가 문제가 없다는 것은 사악처에 떨어질 위험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학 성자는 세상의 띨락카나를 어느 레벨 이상으로 깨달은 자이므로, 천상계나 범천계에서도 열반을 향하는 수행이 가능하지만, 범부 중생은 천상계나 범천계에서는 그 즐거움에 취하여(중독) 열반을 향하는 수행이 대개 불가능하며, 붓다 담마에서는 열반으로 향하는 수행을 방해하는 자(마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즐거운 곳을 나두고 왜 열반에 들려고 수행하는지에 모르겠다며 방해하는 것이다.
붓다의 세계관과 그 세상의 특성을 어떤 레벨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 즐거운 상태에서는 더 이상 붓다의 세계관과 그 세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는 중독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계에서도 선정에 중독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2023/06/16(금)
불교(붓다 담마)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도 결국 괴로움을 자초하는 단멸과 허무로 이어지며, 그렇게 부정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들러붙지 않아야 괴로움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보고 열반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알고 세상(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다.
출처: 세상은 환상이고 허무한 것인가?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24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273781059 )
2023/06/17(토)
세 가지 유형의 고통(괴로움) 중에서, 우리는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만 신경을 쓰고 근심 걱정한다.
다른 두 유형의 고통(‘둑카 둑카’와 ‘상카-라 둑카’)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두 종류의 둑카는 우리들의 ‘지각된 행복’에 의해 가려진다(숨겨진다). 특히, 적당한 수준의 부를 누릴 수 있는 가정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우리가 굶주리기 전에 충분히 먹지 못하면, 고통이 된다. 게다가, 우리는 먹기 위해 사냥하러 가서 동물을 죽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식당에 가서 맛있고 흡족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유형의 고통(괴로움)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고통(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처: 아닛짜 ㅡ 끊임없는 압박(‘삘-라나’) https://puredhamma.kr/the-incessant-distress-key-to
세상 모든 것이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는 것은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해태 혼침에 의한 불선한 마음이며, 수행에 장애가 되는 마음이므로 그런 마음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거나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의 일종이다.
세상의 아닛짜/둑카/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세상이 의미가 없어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한 상태로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2023/06/18(일)
재탄생 과정(윤회)를 믿지 않고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다. 정의에 따르면, 닙바-나(Nibbāna)는 재탄생 과정(윤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닙바-나(Nibbāna)를 ‘일상의 생활 스트레스’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것과 혼동한다.
출처: 다사 상요-자나 - 재탄생 과정의 족쇄 https://puredhamma.kr/three-levels-of-practice
2023/06/19(월)
세상 모든 것이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는 것은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해태 혼침에 의한 불선한 마음이며, 수행에 장애가 되는 마음이므로 그런 마음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거나 성냄을 뿌리로 하는 불선한 마음의 일종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아닛짜/둑카/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세상이 의미가 없다는 인식으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한 상태로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PS)
그렇다고 해서 세상 것을 좋아하고 무엇이라도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170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640029773 을 참조하여 행할 필요가 있다.
2023/06/20(화)
불이사상(비이원론, 일원론), 즉 ‘둘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힌두사상이 불교에 유입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된 대표적 사례다.
힌두교의 윤회관(세계관)과 불교의 윤회관(세계관)은 서로 다르며, 힌두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다르다.
즉, 힌두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불교에서는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마노마야 까야의 개념도 모르지만, 불교의 마노마야 까야 개념에 따라 이해해보면, 각자의 마노마야 까야가 통합된 마노마야 까야에 합쳐지는 것이 힌두교의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서 분리의 개념과 합침의 개념에 따라 나온 것이 불이사상이다.
(한편, 불교의 마노마야 까야 개념은 현재 대부분의 테라와다불교 및 대승불교에서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다.)
2023/06/21(수)
과보식(위빠-까 윈냐-나)이 형성되는 연기는 과보 연기(아브야까따 연기)고, 업식(깜마 윈냐-나)이 형성되는 연기는 업 연기(아꾸살라/꾸살라 물라 연기)다.
업 연기에서 아꾸살라물라 연기는 (산)가띠를 강화시키는 연기고, 꾸살라물라 연기는 (산)가띠를 감소시키는 연기로서 유학성자에게만 일어나는 연기며, 무학성자(아라한)에게는 과보 연기만 일어나고 업 연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즉, 과보 연기는 아라한(무학성자)을 포함함 모든 유정체들에게 일어나는 연기고, 아꾸살라물라 연기는 범부 중생과 유학성자(수다원~아나함)에게 일어나는 연기며, 꾸살라물라 연기는 유학성자에게만 일어나는 연기다.
2023/06/22(목)
‘매력적인 감각 대상’이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 마음이 만든 즐거움)’를 가져올 수 있지만, 대상 자체에는 까-마(kāma)가 없다. 아라한(Arahant) 성자는 그런 어떤 대상에도 유혹되지 않는다.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 또는 감각적 즐거움은 5가지 육체적 감각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특히 까-마(kāma)는 ‘만들어낸 즐거움(made up pleasure)’이라고 가르치셨다.
가장 낮은 11가지 영역을 모두 합하여 ‘까-마 로-까(kāma lōka)’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만들어낸 즐거움’은 그 영역의 모든 5가지 육체적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kama-it-is-not-just-s
2023/06/23(금)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그것에 들러붙는 것, 멋진 사진을 보는 것과 그것에 들러붙는 것, 좋은 음악을 듣는 것과 그것에 들러붙는 것 등의 차이점에 주목하자.
그것들에 들러붙지 않고 맛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아나-가-미(Anāgāmi) 단계 전에는 완전하게는 도달할 수 없다. 그것에 도달하려면, 더 많은 공부와 숙고(사띠빳타-나 바-와나-, Satipaṭṭhāna bhāvanā)가 필요하다.
출처: 앗사-다, 아-디-나와, 닛사라나 - 소개 https://puredhamma.kr/assada-adinava-nissarana-i
2023/06/24(토)
<범부중생과 유학성자의 실천수행 사이의 차이>
범부중생의 실천수행은 아뿐냐 아비상카-라가 아닌 뿐냐 아비상카-라에 의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게 하는 실천수행(마음이 세상을 향하는 수행, 즉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수행)이고,
유학성자의 실천수행은 뿐냐 아비상카-라가 꾸살라물라 상카-라로 바뀌어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게 하는 실천수행(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수행, 즉 열반의 지복을 구하는 수행)이며, 이 실천수행은 범부중생이 할 수 있는 실천수행이 아니다.
범부중생이 할 수 없는 실천수행을 잘못되게 하는 행, 또는 아라한을 잘못 흉내내는 행이 막행막식의 행, 즉 밋차- 위뭇띠(잘못된 해탈)로 가는 행이다.
2023/06/25(일)
많은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 명상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전에도 명상을 시작한다. 물론, 호흡 명상을 하고 있다면, 배울 것이 없다. 그것(호흡명상의 불교 명상이라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모욕이다. 부처님의 명상은 미래의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멈추게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재탄생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의 결실없음/위험함을 깨달아야 한다.
~
‘호흡 명상’이 사띠빳타-나 바-와나-(Satipaṭṭhāna Bhāvanā)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아-나-빠-낫사띠 또는 사띠빳타-나 바-와나를 제대로 육성하기 위해서는(즉, 최적의 결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소따빤나가 되어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the-sotapanna-stage
2023/06/26(월)
니로-다는 ‘일어나지 않게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ㅡ 지금 있는 실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고통 덩어리’가 [일어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10가지 요인(자-띠, 바와, 우빠-다-나, 땅하-, 웨다나-, 팟사, 살라-야따나, 나-마루-빠, 윈냐-나, 및 상카-라) 각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니로-다(nirōdha)는 ‘일어나지 않게 멈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아윗자-(avijjā)를 제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윗자-(avijjā)를 제거한다는 것은 빤냐-(paññā)를 기르는 것과 같다.
아윗자-(avijjā)를 제거하는 것(그리고 ‘빤냐-’를 기르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팔정도를 따름으로써 행해진다.
출처: 빠띨로-마 빠띳짜 사뭅빠-다 - 닙바-나로 가는 열쇠 https://puredhamma.kr/anuloman-patiloma-paticca-s
2023/06/27(화)
놀라겠지만, ‘감각적 즐거움(까-마 앗사-다, kāma assāda)의 대부분은 마음이 만든다. 감각 접촉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오고 간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몇 시간 동안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이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는 상카-라(saṅkhāra)를 통해 우리가 마음 속에서 생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초 동안만 보더라도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매력적인 제품이 상점에 진열된 것을 그냥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그것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살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을 갖고 이것에 대해 숙고해 보자. 초기에 몇 초의 감각 접촉은 그것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생각하고 ‘추가적인 즐거움’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kama-it-is-not-just-s
2023/06/28(수)
거친 감각부터 미세한 감각으로 나열하면, 촉각(접촉감), 미각(맛), 후각(냄새), 시각(빛/포톤), 청각(소리/포논)이다.
그러므로, 거친 감각인 접촉감, 맛, 및 냄새를 즐기는 것부터 줄일 필요가 있다. 이 노력과 거친 몸의 위험함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다음 바와는 천신 마노-마야 까야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보고 듣는 것을 즐기는 것은 담마와 관련된 것을 보고 듣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2023/06/29(목)
모든 종교는 알로-바(alōbha), 아도-사(adōsa), 및 아모-하(amōha)로 행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물론, 붓다께서도 그렇게 조언해 주셨다.
그러나, 재탄생 과정에서 미래의 고통/괴로움을 멈추려면, 재탄생 과정에 머무르는 것의 위험을 알아야(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성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띨락카나(Tilakkhana)라는 세 가지 다른 이해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이해와 함께, 알로-바(alōbha), 아도-사(adōsa), 및 아모-하(amōha)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제 그 사람은 좋은 재탄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재탄생 과정에서 벗어나려고 좋은 행위(선행)을 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 사람의 목표는 닙바-나(열반)를 얻는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행한 선행은 뿐냐 깜마-(Puñña kammā)다. 그 사람은 뿐냐 깜마-로 좋은 곳에 재탄생한다. 사성제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런 행위는 자동적으로 꾸살라 깜마-(kusala kammā)가 되고 닙바-나(열반)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kusala-mula-paticca-samuppada
2023/06/30(금)
“나 떼 까-마- 야-니 찌뜨라-니 로께, 상깝빠라-고 뿌리삿사 까-모..(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번역: "세상에 있는 예쁜 것은 ‘까-마(kāma)’가 아니다. 사람은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만들어(라-가 상깝빠나-, rāga sankappanā) 자기 자신의 까-마(kāma)를 생성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kama-it-is-not-just-s
'Pure Dhamma 공부 > PD 관련 포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3) | 2023.08.31 |
---|---|
2023년 7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3.07.31 |
2023년 5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3.05.31 |
2023년 4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3.05.01 |
2023년 3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