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Dhamma 공부/PD 관련 포스트

2023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빠띠고사 호잔 2023. 8. 31. 06:25

2023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3/08/01(화)

 

<법구경 183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아꾸살라 행은 전혀 의미가 없다(빠빠 깜마를 형성). 

꾸살라 행도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목적/의도(선처에 태어나고자 목적/의도을 포함)으로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이 자신의 갈망을 근본적으로 감소시키는 목적/의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뿐냐 깜마를 형성). 

그러므로, 세상에서 의미있는 행은 자신의 갈망을 근본적으로 감소시키는 목적/의도(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의도)의 꾸살라 행뿐인데, 이런 꾸살라 행은 성자들의 출세간 수행에서만 가능한 (마음을 청정히 하는) 행이다(꾸살라 깜마를 형성).

이것이  법구경 183, 즉 “삽바빠-빳사 우빠삼빠다-,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사찟따삐리요 다빠낭, 에땅 붓다-나 사-사낭”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2023/08/02(수)

 

사띠(sati)가 무엇인지 다시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사띠(sati)가 ‘집중’ 또는 ‘주의 기울임(주의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사띠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많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마음 프레임(마음 틀, 마음 가짐)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한] 사람은 31영역과 결국(장기적으로 볼 때) 많은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진 재탄생 과정과 함께 부처님의 큰 그림(big picture)에 대해 숙고하였다.

[그런 이해를 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삶을 즐기고 있을지라도, 윤회(saṃsāric, samsāric) 시간 척도에 비교하면, 그 기간은 무시할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11-magga-phala-and-ariya-jhana 

 

2023/08/03(목)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둑카를 이해한다는 것은 둑카(도마낫사) 웨다나만을 둑카라고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웨다나를 둑카라고 이해하는 것, 즉 둑카 둑카와 상카라 둑카와 위빠리나마 둑카로 이해하여 수카(소마낫사) 웨다나와 아둑카마수카(우뻭까) 웨다나도 상카라 둑카 또는 위빠리나마 둑카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느낌은 세상에 속하며 이 세상이 둑카라고 이해하는 것이며, 모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둑카의 소멸이며 닙바-나라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2023/08/04(금)

 

모하(moha)의 가장 깊은 레벨은 마-나(māna), 웃닷짜(uddhacca), 아윗자-(avijjā)에 있다. 그것들은 아라한 단계에서만 제거된다. 그것은 루빠 라-가(rupa rāga), 아루빠 라-가(arupa rāga), 마-나(māna), 웃닷짜(uddhacca), 아윗자-(avijjā)라는 마지막 다섯 가지 상요자나(Saṃyojana, 윤회 과정에 결박/족쇄) 중의 하나다.

출처: https://puredhamma.kr/nibbana-raga-dosa-mohakkhaya-1 

 

2023/08/05(토)

 

<소따빤나가 해탈(유여열반)에 이르는 방식>

열반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자(소따빤나)는 세상의 특성인 아닛짜/둑카/아낫따를 이해하여, 앗사-다(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아-디나와)을 인식하여 닛사라나로 나아가는 수행이 가능하게 된 자다. 

여기서, 소따빤나는 어떤 선정도 없이 감각 대상에 대해 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을 계속 인식하면서 수행(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하여 (빤냐 위뭇띠) 해탈(유여열반)에 이를 수도 있고, 

선정(자-나)을 통해 어떤 단계의 선정의 즐거움의 위험함을 인식하여  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을 계속 인식하면서 수행(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하여 (빤냐 위뭇띠) 해탈(유여열반)에 이를 수도 있고,

계속 더 높은 선정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각 단계의 선정의 즐거움의 위험함을 인식하여  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을 인식하면서 수행(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하여 (아꿉빠 쩨또위뭇띠) 해탈(유여열반)에 이를 수도 있다(‘세간 자-나 대 출세간 자-나’ 포스트 내용 정리 참조, https://cafe.naver.com/puredhamma/2389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3069104491 ).

 

2023/08/06(일)

 

범부 중생은 감각 대상에 대한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추구하여 그 위험함을 인식하지 못하여 악처를 향하거나, 선정을 통해 더 높은 선정의 즐거움을  추구하여 그 위험함을 인식하지 못하여 선처를 향하지만 결국 악처로 윤회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범부 중생은 감각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나 선정의 즐거움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특성인 아닛짜/둑카/아낫따를 이해하여 앗사-다(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아-디나와)을 인식하여 닛사라나(벗어남)로 나아가는 수행이 가능하도록, 올바른 담마를 듣고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다.

 

2023/08/07(월)

 

‘나(me)’에 대한 현명하지 못한 인식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에 들러붙고(라-가, rāga), 다른 것을 멀리하려고(도사, dosa) 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두 가지 유형에 모두 '정신적으로 묶여' 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가까이 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멀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땅하-(taṇhā)는 두 경우에 모두 관련되어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nibbana-raga-dosa-mohakkhaya-1 

 

2023/08/08(화)

 

제1성제에서 말하는 둑카(dukkha)는 위빠까로 일어나는 두카(dukha) 웨다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빠까로 일어나는 수카 웨다나-에 들러붙음으로 인해 생성되는 위빠리나마 둑카와, 위빠까로 일어나는 두카 웨다나-에 들러붙음으로 인해 생성되는 둑카 둑카와, 위빠까로 일어나는 우뻭까 웨다나-에 들러붙음으로 인해 생성되는 상카-라 둑카로서, 이 세 가지 둑카는 아-람마나(대상)에 들러붙지 않음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둑카(dukkha, dukha +khaya)며, 이 둑카(dukha)가 제1성제에서 말하는 둑카(dukkha)다. 

제1성제에서 나열된 7가지, 즉 태어남/늙음/병듬/죽음/‘싫어하는 것과 관련됨’/‘좋아하는 것에서 떨어짐’/‘좋아하고 갈망하고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함’은 모두 ‘오온에 들러붙음(오취온)’으로 인한 둑카라는 것을 마지막 구절(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로 명확하게 하고 있다.  

 

2023/08/09(수)

 

사견으로 세상을 긍정하는 마음은 희망(선처)을 말하지만 결국 절망적인 사악처에 가게 되는 마음이다.

세간 정견으로 세상을 긍정하는 마음은 희망(선처)를 말하며 출세간 정견을 거쳐 절망적인 사악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마음이다.

출세간 정견으로 있는 그대로(아닛짜/둑카/아낫따)의 실제 세상을 긍정하지만 멀리하는 마음은 절망적인 사악처에서 벗어났으며 열반의 지복에 이르게 되는 마음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세상(환상의 세상과 실제의 세상)과 해탈과 완전한 열반(빠리닙바나)’ 제목의 https://cafe.naver.com/puredhamma/177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683243457 참조)

 

2023/08/10(목)

 

붓다께서 설명하신 이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윗자-(avijjā)를 제거하지 못하는 한, 땅하-(taṇhā)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해를 향한 첫 번째 단계는 도덕적 삶을 살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담마(Dhamma), 즉 ‘왜 감각적 즐거움(까-마, kāma)은 반드시 미래의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와 다사 꾸살라(dasa kusala)를 이해하는 다음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nibbana-raga-dosa-mohakkhaya-1 

 

2023/08/11(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위안으로 삼고 되뇌는 말이다. 이 말이 삼특상에서 아닛짜를 무상(impermanence)으로 잘못 번역하여 불자들이 위안으로 삼고 있는 말과 유사하다.

즉, 무상을 되뇌면서 언젠가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또는 원래 세상은 희노애락하며 살아가게 될 수 밖에 없는 윤회하는 곳(무상한 곳)으로 체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견이나 세간 정견을 지닌 사람들이 위안으로 삼고 있는 말과 유사하며, 붓다 담마의 삼특상에서 의미하는 아닛짜와는 다르다.   

 

2023/08/12(토)

 

수카 웨다나를 수카 웨다나로 보고, 둑카 웨다나를 둑카 웨다나로 보고, 우뻭카  웨다나를 우뻭카 웨다나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또한, 수카 웨다나를 둑카로 보고, 둑카 웨다나를 화살로 보고, 아둑카-아수카 웨다나를 아닛짜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그럼, 웨다나를 어떻게 보며 행해야 하는지 혼란스럽지만, 첫번째는 대상을 인식할 때 처음에 일어나는 위빠-까 웨다나를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며, 두번째는 그 위빠-까 웨다나를 경험하는 즉시 각자의 가띠에 따라 일어나는 오염된 마음이 만든 ‘삼팟사- 자- 웨다나’를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S36:5 및 S36:6 참조)

 

PS)

즉, 두번째의 ‘삼팟사- 자- 웨다나’가 일어나는 즉시 그렇게 보고, 삼팟사- 자- 웨다나가 일어나지 않게 수행하면서, 첫번째의 웨다나만 일어나는 상태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은 각자의 그 일시적 발현 가띠가 그 대상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삼팟사- 자- 웨다나가 일어나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선 아닛짜/둑카/아낫따 및 앗사-다/아디-나와/닛사라나를 깨달아 저류가띠가 최소한 수다원도의 성자에 이르도록 법문을 듣고 숙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삼팟사- 자- 웨다나가 ‘앗사-다’며, 이 삼팟사 자- 웨다나의 위험함, 즉 앗사-다의 위험함을 참으로 깨달아 닛사라나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아닛짜/둑카/아낫따를 참으로 깨달아 마음을 닙바-나로 향하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유학 성자의 수행에 속한다.   

 

2023/08/13(일)

 

아닛짜(anicca) 특성, 즉 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세상의 행복)은 조만간 아빠-야(apāya, 악처)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둑카, dukkha). 그래서, 결국 아빠-야(apāya, 악처)에 태어났을 때, 무력하게(어쩔 수 없게) 된다(아낫따, anatta).

출처: 앙굴리말라 이야기 - 붓다 담마에 대한 많은 통찰

 https://puredhamma.kr/account-of-angulimala-many-i 

 

2023/08/14(월)

 

세간의 행복은 느낌과 인식을 통한 행복이므로 느낌과 인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행복이지만, 

출세간의 지복은 느낌과 인식을 통하지 않은 지복이므로 느낌과 인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지복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세상의 가르침은 세상은 (닛짜/수카/앗따 특성이기에) 추구할 가치가 있으므로 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가르치지만,

붓다 담마(불교)는 세상은 (아닛짜/둑카/아낫따 특성이기에) 추구할 가치가 없으므로 출세간의 지복을 추구하고 가르친다. 

 

2023/08/15(화)

 

가띠를 바꾸는(산가띠를 제거하는) 수행을 학문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아꾸살라를 하지 않고 꾸살라를 하며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한다는 것의 이유와 목표가 이해되고 견해가 확립되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인식하는 순간에 그것이 아꾸살라에 속하는지 꾸살라에 속하는지 올바르게 판단하여, 네 가지 올바른 노력으로  꾸살라 행을 일으키고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023/08/16(수)

 

실생활에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salāyatana paccayā phassō)로 시작하고,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phassa paccayā vēdanā, vēdanā paccayā taṇhā)’로 진행된다.

오직 그 단계에서, 주어진 어떤 ‘사람’이 아윗자-(avijjā)로 행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복잡하게 얽힌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시작한다.

출처: ‘빠띳자 사뭅빠-다’ ㅡ 자아는 ‘아윗자-’로 인해 존재한다 ( https://puredhamma.kr/paticca-samuppada-a-self-exist )

 

2023/08/17(목)

 

붓다 담마에는 제1원인이 없다(창조자 없음). 생명은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각 생명체(유정체)는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탄생-재탄생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우리 우주(붓다 담마의 ‘주요 세계 시스템’)를 포함하여, 우리 주위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출처: 담마와 과학 - 소개 https://puredhamma.kr/dhamma-and-science-introduc-

 

2023/08/18(금)

 

괴로움의 소멸(깨달음, 해탈, 열반)에 이르는 관건은 숨겨진 둑카(위빠리나마/상카-라 둑카)를 얼마나 장기적 관점에서 얼마나 깊이/많이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붓다 담마에 대한 지식 축적의 문제가 아니라  붓다 담마에 의한 지혜 발현의 문제다. 물론 지혜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붓다 담마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축적되어 지혜가 발현될 수 있도록 올바른 숙고/수행이 가능해야 한다.

 

2023/08/19(토)

 

현재를 살라는 말은 붓다 담마에 의한 지혜가 발현되도록 현재를 살라는 것, 즉 현재 자신(마노마야 까야)의 상태에 따라 현재의 상카라를 잘 제어하며 살라는 것인데, 대개 범부 중생들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이 말을 현재의 둑카 둑카가 생기지 않도록 살라는 말로만 오해하여, 붓다 담마에 대한 올바른 숙고/수행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23/08/20(일)

 

현재의 괴로운 느낌과 관련된 둑카 둑카에서도 잘 벗어나는 행을 해야 하지만, 항상 즐거운/평온한 느낌에 숨겨진 위빠리나마/상카-라 둑카가 고려된 행이 되어야 한다. 즉 세상/세상것에 대한 갈애(들러붙음)가 있는 행(아꾸살라물라 연기에 따른 행)은 모두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꾸살라물라 연기에 따른 행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2023/08/21(월)

 

육체적 괴로운 느낌은 제5문을 통해 일어나는 과보식(위빠-까 윈냐-나)의 까-이까 웨-다나-고, 정신적 괴로운 느낌은 제6문을 통해 일어나는 업식(깜마 윈냐-나)의 쩨따시까 웨-다나-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악처 중생의 정신적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강도는 강하지만 자와나 찟따의 업력은 약한데, 이는 어린아이가 어떤 갈망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울면서 죽을 것같이 괴로움을 표출하지만 그 업력은 약한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사악처의 중생들이 느끼는 괴로운 느낌의 강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업식에 의한 업씨앗의 힘은 약하므로 새로운 악업은 과거 악업의 과보를 받는 것에 비해 거의 무시해도 될 것이다. 

이는 범부 천신과 범부 범천이 짓는 새로운 선업은 과거  선업의 과보를 누리는 것에 비해 거의 무시해도 좋은 것과 유사한데, 선정에 도달하면  그 선정에 이르기 위해 힘쓰는 선업의 노력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악처 중생의 마노마야 까야는 그 수명 동안 악업의 과보 받도록 세팅되고, 천신/범천의 마노마야 까야는 그 수명 동안 선업의 과보를 받도록 세팅된다고 말할 수 있다.)

 

2023/08/22(화)

 

수행자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대상(아-람마나)도 아니고 그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내부의 과보마음(위빠-까 윈냐-나)도 아니다.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항상 외부 대상을 문제 삼으며, 수행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내부의 과보 마음에만 주의 집중하며 알아차리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향으로 진정한 아나빠나사띠 또는 사띠빳타나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수행은 모든 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puredhamma/1229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262649900

 

2023/08/23(수)

 

<사성제를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

아닛짜/둑카/아낫따에 대한 이해와 함께 앗사-다/아디-나와/닛사라나로 실천함이 없이, 사성제를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비록 그 용어를 모르더라도 아꾸살라물라 연기를 통한 윤회의 위험함을 통감하고 꾸살라물라 연기를 통해 마음이 열반을 향하여 수행함에 따라 해탈(열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유학성자가 사성제를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삼특상(틸락카나)과 연기(빠띳짜 사뭅빠-다)를 함께 이해하고 마음이 열반을 향하여 실천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한두줄 메모장의 글은 어제 한두줄 메모장 글의 출처인, ‘수행자가 문제 삼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과 뗏목, https://cafe.naver.com/puredhamma/1229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262649900 을 요약하여, 붓다 담마의 핵심인 ‘사성제와 삼특상과 연기’의 관계를 말한 것임)

 

2023/08/24(목)

 

우리 모두는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필요한 일, 의식주 해결)이 있다.

세상(또는 존재)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것(일)이 둑카이지만, 해야할 일(필요한 일)을 선택하여 행해야 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괴로움이 적은 쪽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둑카의 소멸로 이어지는가 또는 둑카의 소멸에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cafe.naver.com/puredhamma/1439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458971416 

 

2023/08/25(금)

 

세상의 행복은 느낌에 따른 행복이지만, 열반의 지복은 느낌에 따른 것이 아니라 느낌이 없는 지복이다.

느낌에 따른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 들러붙는 것이고, 과보로 일어나는 느낌을 느끼지만 그 느낌에 들러붙어 앗사-다(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고(즉, 삼팟사 자 웨다나를 일으키지 않고) 느낌이 없는 열반의 지복을 추구하는 것이 성스런 길(성스런 팔정도)이다.

 

2023/08/26(토)

 

마음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을 생성(창조)한다.

The mind does not affect matter that is already in existence. But the mind CREATES matter. 

출처: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how-the-mind-does-wonders/#post-45935 

 

(역자 주: 더 명확히 설명하면, 마음은 이미 존재하는 기본 숫닷타까(아윗자와 땅하에 의한 8가지 요소의 기본 생성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 숫닷타까를 활성화시켜(변형시켜) 새로운 마음생/음식생/온도생 깔라빠를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4 ㅡ 깜마 에너지와 루빠의 생성(또는 활성화),  https://cafe.naver.com/puredhamma/2205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968092309 를 참조.) 

 

2023/08/27(일)

 

<알아야 할 것을 안 것과 해야할 것을 해 마친 것>

유정체가 알아야 할 것을 안 것은 둑카(세상)와 둑카의 소멸(열반)에 대한 근본을 더 이상 의심없이 알고 열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된 상태(수다원)고,

유정체가 해야할 것을 해 마친 것은 알아야 할 것을 안 것에 따라 열반(더 이상 세상에 대한 갈망/갈애가 없는 유여열반)에 도달한 상태(아라한)다.

세상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깊게 안다고 해도, 위의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자가 범부 중생이며, 아닛짜 특성의 세상에 들러붙음에 따라 감춰진 둑카 특성으로 인해 언젠가는 사악처의 괴로움도 당해야 하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아낫따 상태도 겪어야 하는 유정체다.

 

2023/08/28(월)

 

보통 사람이 도시 생활을 즐기든, 시골 생활을 즐기든, 인공 경관(또는 문화)를 즐기든, 자연 경관(또는 문화)를 즐기든, 여행을 즐기든, 성지 순례로 세간 종교를 즐기든, 수행처에서 세간 선정을 즐기든, 세상/세상것/세상생활을 즐긴다는 것은 앗사-다(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위험함/결점을 모른다는 것이고, 세상을 닛짜/수카/앗따로 보고 즐기는 것이며, 괴로움의 소멸을 향한 길이 아니다. 

괴로움의 소멸을 향한 길은 세상을 아닛짜/둑카/아낫따로 보고, 세상을 로바(또는 라가)로 즐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사(또는 빠띠가)로 혐오하지 않으며 모하(또는 아윗자)로 무관심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  즉, 성스런 팔정도에 따라 생활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범부 중생들에게는 즐김, 즉 사는 재미가 없으므로 불가능한 생활이며, 사악처로 향하는 행은 결코 하지 않는 (낮은 단계의) 성자도 결의를 다지며 항상 노력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생활이다.

 

2023/08/29(화)

 

흔히 존재하고자(살고자) 하는 갈애는 ‘바와 땅하-’고, 존재하지 않고자(죽고자) 하는 갈애는 ‘위바와 땅하-’로 알고 있지만, 위바와 땅하-는 ‘그릇된 유물론(단멸론)에 따라 존재하지 않고자(죽고자) 하는 갈애’다.

따라서, ‘위바와 땅하-’는 ‘열반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상견과 단견을 포함하여 사견이 사라지는 수다원 단계에서 제거되는 땅하-다. 

따라서, 세가지 땅하-에서, ‘위바와 땅하-’가 수다원 단계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고, ‘까-마 땅하-’가 아나함 단계에서 두번째로 제거되고, ‘바와 땅하-’가 아라한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제거된다. 

(‘위바와 땅하-’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2336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3054245380 참조)

 

2023/08/30(수)

 

유신견에 따라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환상이지, 과거 원인으로 인해 그리고 지배적 조건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그 경험과 모든 육체적 고통은 현실(실제)이며 환상이 아니다. 그 ‘조건적인 원인과 결과’ 또는 ‘인과관계의 원리’를 빠띳짜 사뭅빠-다(연기)라고 한다.

(연기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현상, 즉 세상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중요하며, 그 아윗자에 따라 환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고통/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처: 불교의 세계관 - 소개, https://puredhamma.kr/buddhist-worldview-introduc 을 인용하여 편집 

 

2023/08/31(목)

 

마음이 (정신적으로) 괴롭거나 불편하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탐함으로 성냄(도사 또는 빠띠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문제가 있다고 감지(식별)하기는 쉽고 수행하기도 쉽다. 

그런데,  마음이 (정신적으로) 즐겁거나 편하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탐함이나 어리석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얼마나 잘 빨리 문제가 있다고 감지(식별)하여 제어하는가가 수행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