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Dhamma 공부/PD 관련 포스트

2023년 2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빠띠고사 호잔 2023. 3. 1. 06:00

2023년 2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3/02/01(수)

 

<유학성자들의 사띠수행과 범부중생들의 사띠수행의 차이>

육체적 즐거운/평온한 느낌이든  정신적 즐거운/평온한 느낌이든 입력되는 대상(아-람마나)에 대해 인식되는 와찌 상카라 상태에서 그 아-람마나(상까따)에 숨겨진 괴로움을 알고, 즉 둑카 특성을 알고 들러붙지 않고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나도록 사띠하는 것, 이것이 유학성자들의 출세간 사띠수행(아리야 자-나도 포함)이다. 

둑카 특성을 알지 못하고 계속 들러붙지만 선처에 이어지는 와찌/까야 상카라를 일으키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나도록 사띠하는 것, 이것이 범부중생들의 세간 사띠수행(아나리야 자-나도 포함)이다.

 

추가설명:

유학성자든 범부중생이든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 한, 자동적으로 일어나며 인식되지 못하는 마노 상카라는 아-람마나  및 들러붙는 가띠(즉, 산가띠)에 따라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으므로,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항상 사띠수행이 필요하다.

유학성자들이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처에 태어나는 업씨앗이 헝성되는 와찌/까-야 상카라가 일어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부중생들이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처에 태어나는 업씨앗이 형성되는 와찌/까-야 상카라가 일어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3/02/02(목)

 

<‘띤낭 상가띠 팟소(tiṇṇaṁ saṅgati phasso)’라는 구절>

연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한(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여러 숫따(차착까 숫따, 로까 숫따 등)에 나오는 ‘띤낭 상가띠 팟소(tiṇṇaṁ saṅgati phasso)’라는 구절은 삼사화합촉(내입처/외입처/식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 유형의 산(san)과 접촉하는 것, 즉 삼팟사(samphassa, 오염된 접촉)를 의미한다.

여기서, 세가지 유형의 산(san)은 범부중생의 경우에는 로바/도사/모하를 의미하고, 유학성자의 경우에는 세간 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를 의미하는데, 범부중생이 세간 삼마사띠를 할 경우에는 세간 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로 바뀌어 여전히 삼팟사(samphassa)에 의한 아꾸살라 물라 연기(‘아윗자-’로 시작함)가 일어나는 상태이지만, 유학성자가 출세간 삼마사띠를 할 경우에는 출세간 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로 바뀌어 단지 팟사(phassa)일 뿐인 꾸살라 물라 연기(‘꾸살라 물라’로 시작함)가 일어나는 상태다.

 

2023/02/03(금)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 영역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성취하고자 하는 ‘미래 즐거움’에 대한 예상(기대)의 몰아침들로 ‘가리워져(덮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동물 세계에 있는 괴로움(고통)을 볼 수 있다. 소따빤나(Sotapanna)는 4가지 가장 낮은 영역(사악처) 모두에 재탄생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우선]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도달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출처: 소따빤나 ㅡ 붓다의 ‘광대 세계관’을 가진 자, https://puredhamma.kr/sotapanna-one-with-the-wider-w 

 

2023/02/04(토)

 

술을 끊으려면 먼저 올바른 견해, 즉 술이 건강에 해롭다는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술 중독자들은 음주와 관련된 ‘좋은 산냐(술이 좋다는 산냐)’를 제거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막히게 된다. 그는 음주의 나쁜 결과에 대해 틀림없이 끈질기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소따빤나(Sotapanna)는 감각적 즐거움이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비록 알지만, 감각적 즐거움과 관련된 ‘좋은 산냐(감각적 즐거움이 기분좋다는 산냐)’를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바로 아-나-빠-낫사띠(ānāpānassati)와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명상이 필요한(요구되는) 곳이다.

출처: 소따빤나 ㅡ 단지 성스런 길을 가기 시작함, https://puredhamma.kr/sotapanna-just-starting-on-the 

 

2023/02/05(일)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 파악해야 할 핵심 개념은 ‘바와(bhava)’라는 개념이다. ‘생명흐름(lifestream)’은 오로지 업 에너지에 기초하여 바와(bhava)에서 바와(bhava)로 전환한다. 고정된 상태로 유지되는 ‘개성(성격)’은 없다.

다양한 유형의 현명하지 못한 생각, 말, 및 행동(다른 유형의 상카-라에 의해 규정됨)은 다른 유형의 바와(bhava)와 자-띠(jāti)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접한 생에서는 ‘가띠(gati)’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성격/습관에 유사성이 있다. 사실, 한 사람의 가띠(gati)는 다음 바와(bhava)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출처: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3/02/06(월)

 

무엇을 받아들이기 전에 어떤 유익함이나 즐거움을 보아야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이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억지로 포기하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그 노력을 유지할 수 없다. 포기는 아닛짜/둑카/아낫따를 깨닫는 것과 함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아-미사 수카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마음은 ‘아-미사 수카(āmisa sukha, 감각적 즐거움)보다 더 나은 선택(옵션)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길(팔정도)을 가기 시작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점차적으로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니라-미사 수카 ( https://puredhamma.quv.kr/30 )

 

2023/02/07(화)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도달하면, 인간 영역에 있는 괴로움(고통)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소따빤나(Sotapanna)는 여전히 데와(Deva) 영역 또는 브라흐마(Brahma) 영역의 삶이 좋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따빤나(Sotapanna) 단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더 높은 영역에 있는 괴로움(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요점은 그 더 높은 영역의 삶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사람들은 [결국] 더 낮은 영역에 태어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점이다.

출처: 소따빤나 ㅡ 붓다의 ‘광대 세계관’을 가진 자, https://puredhamma.kr/sotapanna-one-with-the-wider-w 

 

2023/02/08(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단계적 과정이다. 소따빤나(Sotapanna)조차도 ‘이 세상’에 들러붙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라한의 특성(마음성향)이 소따빤나에게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 욕망을 억누르는 노력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나’ 또는 ‘자아(self)’라는 타고난 감각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목표는 ‘부처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먼저 소따빤나(Sotapanna)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불자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가?’ 포스트를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호흡 명상’으로 아나빠나사띠/삿띠빳타나를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 오직 소따빤나(Sotapanna)만이 그것들을 제대로 기르는 법을 알고 있다.

출처: 소따빤나 ㅡ 단지 성스런 길을 가기 시작함, https://puredhamma.kr/sotapanna-just-starting-on-the 

 

댓글)

2023.02.08. 06:38

본문에서 오해될 부분이 있는데, 감각적 욕망을 억누르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요히 한 후에는 올바른 담마를 배우고 숙고하는데(즉, 바와나 빠하땁바가 아니라 닷사네나 빠하땁바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며, 자-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더 이상의 깊은 집중은 소따빤나에 이르기 위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올바른 담마를 접하는 것은 각자의 공덕에 따라 과보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지만, 그 올바른 담마를 접한 후 계속 배우고 숙고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선택에 의한 것(상카라 형성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자유의지/선택도 공덕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며 각 영역의 각 유정체에 따라 제한됩니다.

 

2023/02/09(목)

 

Ānāpānassati Sutta (MN 118)’ 에 “Nāhaṁ, bhikkahave,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 ānāpānassatiṁ vadāmi.”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위 영어 번역에서 “잊어버리는 자,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개발하고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빠알리 구절의 참된 의미는 “사띠(sati)를 어디에 확립해야 할지 모르는(뭇탓사띳사,  muṭṭhassatissa) 자와,  산(san, 오염원)을 어떻게 가려내는지/해결하는지 모르는(아삼빠자-낫사, asampajānassa) 자에게 나는 아-나-빠-낫사띠(ānāpānassati)를 가르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맞다.

출처: 소따빤나 ㅡ 단지 성스런 길을 가기 시작함, https://puredhamma.kr/sotapanna-just-starting-on-the 

 

2023/02/10(금)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서는 10가지 족쇄 중에 3가지만 끊어지고, 3가지 모두는 잘못된 견해에만 관한 것이다.

(i) 먼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있는데, 이것은 ‘닛짜(nicca) 세계관’이라는 잘못된 견해다. 그 족쇄가 끊어지면 다른 두 가지 족쇄가 동시에 끊어진다.

(ii) 위찌낏짜(vicikicca)는 붓다께서 이 세상의 참된 본질을 발견하셨다는 것과, 그 담마가 올바른 세계관이라는 것과, 부처님의 성스런 제자들(성자들)이 윤회의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iii) 실랍바따 빠라마-사(silabbata paramāsa)는 (더넓은/광대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련의 의례의식을 따르는 것만으로 괴로움의 소멸을 이룰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다.

출처: 소따빤나 ㅡ 단지 성스런 길을 가기 시작함, https://puredhamma.kr/sotapanna-just-starting-on-the 

 

2023/02/11(토)

 

아낫따(anatta)는 이 세상의 특성이지, 자아(self)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낫따(anatta)를 무아(no-self)로 번역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대신, 이 세상의 어떤 것이 ‘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여겨져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다.

출처: 아낫따는 세상의 특성이지, 자아에 관한 것이 아니다.

https://puredhamma.kr/anatta-is-a-characteristic-of 

 

2023/02/12(일)

 

대부분의 문헌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자아 환상’이나 ‘개성(인격)에 대한 믿음’, 즉 ‘자아’ 또는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묘사한다(‘삭까-야 딧티’를 구글 검색하여 볼 수 있음). 여기서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따빤나(Sōtapanna)는 잘못된 견해(diṭṭhi, 딧티)를 제거했지만, 잘못된 인식(saññā, 산냐-)은 제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아’(또는 ‘아-뜨마’라고도 하는 ‘영혼’)에 대한 이 인식(saññā, 산냐-)은 띠삐따까(Tipitaka)에 따르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에서 생으로 옮겨온 산냐-(saññā)다.

출처: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3/02/13(월)

 

(자아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삿따(satta)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 삿따(satta)는 그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31영역 중의 한 곳에 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은 실제적이고 (드물게 있는 행복과 함께) 고통/괴로움도 실제적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것은 긴 재탄생 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궁극적인 실재에서는, 재탄생 과정(saṃsāra)의 여정을 하는 ‘자아’나 ‘영혼’이나 ‘아-뜨만(ātman)’은 없다. 그것이 이해될 때, 그 삿따(satta)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출처: 아낫따와 삭까-야 딧티 ㅡ 서로 다른 두 개념, https://puredhamma.kr/anatta-and-sakkaya-ditthi-two 

 

2023/02/14(화)

 

‘자아(self)’ 또는 ‘나’라는 선천적 감각으로 깊이 내재된 관념은 마-나(māna) 쩨따시까(cetasika)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례한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된다는 것은 여전히 마-나(māna)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아나-가-미(Anāgāmi) 성자조차도 나쁜 대우를 받는다고 인식하면 다소 동요될 수 있다. 아스미 마-나(asmi māna)라고 하는 마-나(māna)의 구성 요소는 여전히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여전히 남아 있다. 마-나(māna)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가 아니라 아라한뜨(Arahant) 단계에서 제거된다.

출처: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3/02/15(수)

 

삿따(satta)(중생)가 잘못된 견해로 행하기 때문에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마음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 과정을 이해한다면, 마음 챙김을 하여, 그런 상카-라(saṅkhārā)가 계속 자라서 새로운 존재(바와, bhava)로 이어지는 것을 멈출 수 있다. 그것이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의 기본이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이해할 때,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그 두 극단의 어느 것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출처: 아낫따와 삭까-야 딧티 ㅡ 서로 다른 두 개념, https://puredhamma.kr/anatta-and-sakkaya-ditthi-two 

 

2023/02/16(목)

 

우리는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열반을 향한 일(수행)도 또한 상카-라(saṅkhāra)를 수반한다.

닙바-나(Nibbāna)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까-야 상카-라_kāya saṅkhāra’로) 신체 활동을 하고, (‘와찌 상카-라_vaci saṅkhāra’로) 담마 개념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마음이 적절한 상태(사마-디, samādhi)에 있을 때 특정한 담마 개념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떠오른다(마노 상카-라, mano saṅkhāra).그것이 바로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다. 

출처: 꾸살라ㅡ물라 상카-라는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하다

https://puredhamma.kr/kusala-mula-sankhara-are-neede 

 

2023/02/17(금)

 

틸락카나(Tilakkhana) (아닛짜_anicca, 둑카_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해 가장 잘못 이해되는 측면은 둑카(dukkha)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괴로움’을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명상 프로그램은 수행기간 중에 육체적 불편함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둑카(dukkha) 본질(특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출처: 틸락카나에서 둑카는 특성이다ㅡ 둑카 웨다나-가 아니다

https://puredhamma.kr/dukkha-in-tilakkhana-is-a-char

 

2023/02/18(토)

 

힌두교에서 미래 생은 동일한 아-트만(ātman)(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영혼과 유사함)의 환생(reincarnation)이다. 환생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단지 이동하는 (영혼으로서) 동일한 본질을 내포한다.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는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그런 영혼 또는 아트만(ātman)이 없다. ‘환생(reincarnation)’ 대신에 재탄생(rebirth)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출처: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3/02/19(일)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 단계부터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라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일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아라한뜨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를 얻으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라한은 닙바-나(열반)을 얻은 후에도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한다.

출처: 꾸살라ㅡ물라 상카-라는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하다 

https://puredhamma.kr/kusala-mula-sankhara-are-neede 

 

2023/02/20(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와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 즉 모든 유형의 윈냐-나(viññāṇa)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아라한뜨-팔라 사마-디(Arahant-phala samādhi)에 들어 있는 아라한의 순수한 찟따(pure citta), 즉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에도 있다.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는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될 수 없다.

(‘자와나 찟따’에서) 업력을 생성하려면 의식적으로 오염된 생각을 생성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한다. (깜마 에너지가 있는 ‘자와나 찟따’에서)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는 오직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서만 일어난다.

출처: 아비상카-라는 깜마 윈냐-나로 이어진다, https://puredhamma.kr/abhisankhara-lead-to-kamma-vin 

 

2023/02/21(화)

 

<산가띠와 붓다 담마에 따른 참된 수행>

자신이나 타인(또는 다른 유정체)이 유신견에 따른 개체로 보이지 않고 연기법에 따른 상카라 또는 아비상카라에 의한 개체로 보이게 될 때, 붓다 담마에 따른 참된 수행이 시작된다.

이는 붓다 담마에 따라 (열반에 다가가는) 참된 수행은 수다원도의 성자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꾸살라 물라 연기가 작용 가능하며, 이 꾸살라 물라 연기의 작용에 따라 아누사야와 관련된 근본(저류) 산가띠가 감소되기 시작한다.

 

PS)

아사와와 관련된 한시적/일시적(발현) 산가띠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의 작용에 의해 나쁜 방향(로바/도사/모하) 또는 좋은 방향(세간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으로 강화/축적되기만 할 뿐이다. 

산(san)은 로바/도사/모하 또는 세간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로 윤회 여정을 길게 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산가띠는 윤회여정을 길게 하는 ‘들러붙는 가띠’ 또는 ‘오염된 가띠’를 의미한다.

범부 중생은 수행을 한다고 해도 (좋은 방향의) 산가띠를 강화/축적하기만 하여 윤회 여정을 길게 할 뿐이므로, 수행보다 올바른 붓다 담마를 듣고 배움에 따른 유신견의 제거가 우선이다.

 

2023/02/22(수)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에 있는 그 ‘기대’는 자와나 찟따(javana citta)의 마음에 의해 생성된 에너지다. 그것들은 담마-(dhammā)로, ‘거기 외부 세계[나-마 로까, 정신계]’에 머물고 있다. 그것들은 "마난짜 빳띠짜 담메- 짜 웁빳자-띠 마노- 윈냐-낭(manañca paṭicca dhammē ca uppajjāti manō viññāṇaṃ)"의 담마-(dhammā) 일부다.

출처: 모-하/아윗자-와 위빠-까 윈냐-나/깜마 윈냐-나, https://puredhamma.kr/moha-avijja-and-vipaka-vinnana 

 

2023/02/23(목)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의 개시/육성은 ‘위딱까/위짜-라(vitakka/vicāra)’로 시작한다. 그런 위딱까/위짜-라(vitakka/vicāra)는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다. 그런 생각이 또한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moha)를 수반한다면, 그것들은 와찌 아비상카-라(vaci abhisaṅkhāra)가 된다.

그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가 더 단호해지면, 우리는 그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체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출처: 윈냐-나와 상카-라에 대한 핵심 개념들의 요약

https://puredhamma.kr/summary-of-key-concepts-about 

 

2023/02/24(금)

 

붓다 담마를 배운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올바른 자연법칙(또는 본질)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 자연 법칙을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이 자연 법칙에 따라 행하거나 말거나, 이 세상은 결국 아닛짜/둑카/아낫따 본질을 드러내며 정신과 물질의 자연법칙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다.

붓다 담마를 배우는 목적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올바른 자연법칙을 배우고 그에 따라 실천하여 아닛짜/둑카/아낫따 본질을 지닌 (윤회)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지, 이 (윤회) 세상에 머무르며 한시적으로 행복해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2023/02/25(토)

 

(윤회)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각자의 생명 흐름(찟따 위티)에 따른 생기는 마노마야 까야가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즉, 각자의 개별 세상이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 외부 세상이 완전히 파괴하거나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외부 세상의 유정체와 무정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 유정체가 남아 있는 한, 그 정신과 물질의 자연법칙에 따라 성주괴공하며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흘러가게 되어 있으며, 없어질 수는 없다. 즉, 각자의 개별 세상은 각자가 (세상과) 상호 배타적인 열반에 도달함에 따라 없어질 수 있으나(붓다께서 열반, 즉 세상의 끝은  각자의 한 길 몸에서 각자에게만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임), 외부 세상은 없어질 수 없다.

 

2023/02/26(일)

 

단지 ‘좋은 행위(선행)’, 즉 뿐냐 깜마(puñña kamma)를 하는 것만으로 과거의 ‘나쁜 행위’[에 의한 과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를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대신, (‘뿐냐-비상카-라’로 ‘뿐냐 깜마’를 행하는 동안) 31영역으로 된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에 극심한 고통/괴로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길이다.

출처: 상카-리  ㅡ 단일 낱말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https://puredhamma.kr/sankhara-should-not-be-transla 

 

2023/02/27(월)

 

띠삐따까(Tipitaka)의 어떤 곳에서는, 띨락카나에 대한 이해 없이 행해진 뿐냐 깜마를 ‘까-마-와짜라 꾸살라 깜마(kāmāvacara kusala kamma)’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까-마 로까(kāma loka) 중의 더 높은 영역(인간과 천신 영역)에 ‘더 나은 재탄생 또는 좋은 위빠-까(vipāka)’를 기대하면서 행해진 ‘좋은 깜마(good kamma)’를 의미한다.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를 이해한 사람이 동일한 ‘좋은 행위(깜마)’를 하면, 그것들은 순수한 꾸살라 깜마(pure kusala kamma)가 된다. 그런 꾸살라 깜마-(kusala kammā)는 세속적 이득에 대한 기대가 없이, 오직 닙바-나(Nibbāna)를 얻어 괴로움/고통으로 가득 찬 재탄생 과정을 멈추고자 하는 기대로서만  행해진다.

출처: 깜마와 상카-라, 쩨따나-와 산쩨따나-

https://puredhamma.kr/kamma-sankhara-cetana-sancetan 

 

2023/02/28(화)

 

쩨따나- 쩨따시까(cetanā cetasika)는 ‘로바(lobha), 도사(dosa), 아로바(alobha), 아도사(adosa)와 같은 다른 관련된 쩨따시까(cetasika)를 찟따(citta)에 통합한다. ‘의도’는 포함된 쩨따시까(cetasika)의 유형에서 유래한다.

출처: 깜마와 상카-라, 쩨따나-와 산쩨따나-

https://puredhamma.kr/kamma-sankhara-cetana-sance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