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9/01(목)
닙바-나(열반)는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수다원 단계의 닙바-나(열반)는 사악처라는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사다함 단계의 닙바-나는 인간계 이하의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아나함 단계의 닙바-나는 욕계의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아라한 단계의 닙바-나는 31 존재계로 이루어진 모든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2022/09/02(금)
가장 큰 위험은 재탄생 과정에 있는 괴로움(고통)이다.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괴로움이 있다.
~
둑카 둑카와 상카-라 둑카와 위빠리나마 둑카라는 세 가지 유형의 둑카(괴로움)가 있다.
그 세 가지 중에서 상카-라 둑카가 가장 위험하다. 그것은 재탄생 과정이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라는) 상카-라 생성 (메카니즘)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카-라 둑카를 극복하면 다른 두 가지 둑카도 제거되고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993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post-on-introduction-what-is-suffering-2/#post-39932 )
2022/09/03(토)
육체, 특히 머리에 있는 6가지 인드리야를 감각적 즐거움을 줄이는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고 보고/듣고/맛보고/냄새맡고/감촉하고/생각하는 것을 통해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큼, 희귀하고 소중한 인간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을 가지는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6가지 인드리야를 감각적 즐거움을 줄이는 도구로서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도구로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므로, 소중한 인간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자, 즉 사성제/연기/삼특상을 모르거나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범부 중생이다.
2022/09/04(일)
모든 상카-라(saṅkhāra)와 관련된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런 상카-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런 쓸데없는 활동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상카-라(saṅkhāra)를 좋아하는 것은 소변과 대변을 끌어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모든 상카-라(saṅkhāra)와 관련된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다.
출처 : https://puredhamma.kr/the-incessant-distress-key-to
2022/09/05(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명상해야 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명상을 시작한다. 물론 호흡 명상을 한다면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붓다에 대한 모욕이다. 붓다의 명상은 미래의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세상에 (재탄생 과정을 통해) 남아 있는 것이 실속이 없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https://puredhamma.net/three-levels-of-practice/sotapanna-stage-of-nibbana/the-sotapanna-stage/ 의 #17
2022/09/06(화)
감각적 괴로움(고통)에 의한 느낌은 쉽게 압박(삐라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감각적 즐거움에 의한 느낌을 극복해야 할 압박으로 알기가 어려우므로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감각적 즐거움에 의한 압박을 사람들은 즐기는 것이며, 이것이 압박을 가지는 ‘아미사 수카’이며, 이 감각적 즐거움에 의한 압박을 벗어난 즐거움을 ‘니라미사 수카’라고 한다.
범부 중생들의 (아나리야) 선정의 즐거움은 이 ‘니라미사 수카’에 가깝지만, 범부 중생들은 아닛짜 특성을 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여 몸과 6감각을 만족스럽게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및 이로 이한 압박)이 내재하고 있고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없으므로, 아닛짜 특성을 참으로 이해한 성자들의 참된 ‘니라미사 수카’와는 차원이 다르다.
2022/09/07(수)
붓다 담마에서는 단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세상)를 말하며 연기가 그친 상태(열반)를 말한다.
~
붓다 담마는 존재에서 비존재로 가는 가르침이 아니라, 연기에서 열반으로 가는 가르침이다.
출처: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것 ㅡ 열반 및 유정체( https://cafe.naver.com/puredhamma/1026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141112856 )
2022/09/08(목)
성스런 팔정도 수행은 육문을 통한 감각 접촉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행이 아니라,
그 감각 접촉에 따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위빠-까 윈냐-나(과보식)’에 이어 쉽게 일어나는, 잘못된 ‘깜마 윈냐-나(업식)’가 인위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행을 말한다.
출처: 성스런 팔정도 수행과 그 과정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048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157421420 )
2022/09/09(금)
닙바-나는 원인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세상/세상것의 근본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닙바-나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는데, 이는 조건지어짐에 따라 형성되는 마노-마야까야가 형성되지 않는(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출처: ‘열반에도 들러붙지(또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 https://cafe.naver.com/puredhamma/123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265423837 )
2022/09/10(토)
세상(연기 현상)이 환상이 아니라, 세상/세상것이 자신을 영구적으로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환상이며 이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세상것에 들러붙는 것이다.
~
세상은 연기하는 실재 현상이고, 열반은 연기하지 않는 실재임을 바르게 아는 기본에서 불교(붓다 담마)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출처: 세상은 환상이고 허무한 것인가?( https://cafe.naver.com/puredhamma/1244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273781059 )
2022/09/11(일)
육체적 죽음이든 정신적 죽음이든, 범부 중생은 모든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사악처에 재생연결되는 가띠(gati)를 유지하는 채(수다원에 이르지 못한 채)로 죽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불선법의 두려움이 아니라 권장되어야 하는 선법의 두려움이다.
범부 중생들은 이런 선법의 두려움에 따른 올바른 노력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부 중생들은 ‘불선법의 두려움(성냄 또는 후회 부류)’ 또는 ‘불선법의 두려움 없음(불선행을 하는데 두려움이 없음, 즉 아놋땁빠)’에 따른 잘못된 노력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 https://cafe.naver.com/puredhamma/705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1875456505 )
2022/09/12(월)
꾸살라 찟따와 꾸살라 깜마를 아꾸살라물라 연기와 꾸살라물라 연기와 관련하여 잘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꾸살라 찟따는 아로바와 아도사 등 19가지 보편 선심소를 가지는 찟따를 의미하며,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의 범부 중생들의 꾸살라 찟따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를 통해 뿐냐 깜마를 짓지만 꾸살라 물라 연기를 통한 꾸살라 깜마는 짓지 못하고,
사성제를 어느정도 깨달은 상태의 유학성자들의 꾸살라 찟따는 꾸살라 물라 연기를 통한 꾸살라 깜마를 지을 수 있으며,
사성제를 완전히 깨달은 무학성자들의 꾸살라 찟따는 꾸살라 깜마도 짓지 않으므로 동일한 선심소를 포함하지만 끼리야 찟따라고 한다.
2022/09/13(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에 관한 것이다. 즉, 장기적으로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닙바-나(Nibbāna)의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는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가 어느 정도 상당히 길러졌을 때 달성된다.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를 이 수준으로 개발하면 자신의 마음이 자동으로 ‘아빠-야가-미 찟따(apāyagāmi citta, 사악처로 향하는 찟따)를 차단한다.
출처:소-따빤나가 제거한 유일한 아꾸살라는 무엇인가? (https://puredhamma.kr/what-is-the-only-akusala-r )
2022/09/14(수)
보통 사람들은 평범한(세간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쉽고, 더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그 평범한(세간적인) 설명이 주기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이유다.
출처: 붓다후드 논란들 ㅡ 소개 (https://puredhamma.kr/buddhahood-controversies-intro )
2022/09/15(목)
빅쿠(출가 불자)는 붓다 교법(붓다 담마)를 겉으로 드러내고 상징하며, 이에 따라 재가 불자는 빅쿠를 상가의 상징으로 예경한다.
그러므로, 빅쿠가 붓다 담마의 핵심을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며, 상가 분열의 죄(아난따리야 빠빠 깜마에 해당)를 짓지 않더라도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해로운 업행(타인에게는 업행의 조건만 형성시킴)을 하는 것이며, 붓다 담마의 핵심을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는 재가자에 비해 엄청난 해로운 업행을 하는 것이다.
(붓다 담마와 관련하여, 무엇이 붓다를 비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1039을 참조하고, 상가 분열의 죄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1930 참조.)
댓글)
현재 모든 마하야나 출가불자(빅쿠라고도 할 수 없음)나 대부분의 테라와다 출가불자(교법에 따른 빅쿠라고는 할 수 있음)는 퓨어담마의 입장에서 볼 때 붓다 담마의 핵심을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들이 부처님을 비방하고 있다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2022.9.15. 06:53
2022/09/16(금)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상까따 다-뚜(세상)’도 실재하는 것이고, 아상까따 다-뚜(열반)도 실재하는 궁극적 실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범부 중생들은 세상에 집착하여 세상만 실재하는 것이라고 잘못되게 이해하고 있으니, 열반이 두렵고(즉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열반에 이르기 어려운 것이며, 윤회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이다.
출처: https://cafe.naver.com/puredhamma/761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1966626187
2022/09/17(토)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부처님의 여러가지 능력에 대해 자신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 그들은 재탄생 과정의 타당성, 또는 붓다께서 여러 천신 영역과 범천 영역(그런 영역의 존재들까지)을 방문하고 벽을 통과하고 ‘해와 달을 만지는’ 등의 능력을 지닌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심을 표명한다.
~
붓다께서는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가르치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붓다 담마는 철학이 아니다. 그런 의견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붓다 담마의 깊은 개념을 이해하는 면에서) 참된 불교도(불자)도 아니다. 그들은 붓다 담마의 근간(바탕)인 재탄생(윤회)을 믿지 않는 ‘세속 불교도’다. 더욱이, 그들은 과학(특히 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며, 많은 ‘신비 현상’이 현대 물리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출처: 붓다후드 논란들 ㅡ 소개 (https://puredhamma.kr/buddhahood-controversies-intro )
2022/09/18(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외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우리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는 이것을 딧티(ditthi)라고 한다.
출처: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https://puredhamma.kr/sanna-what-it-really-means )
2022/09/19(월)
니야따 밋차- 딧티(niyata micchā diṭṭhi, 견고하게 확립된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띨락카나(Tilakkhana, 삼법인),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솔직히 말해(진짜)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척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저는 재탄생을 믿습니다” 또는 “저는 이 세상에는 이 인간계와 동물계를 제외한 다른 영역이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견고하게 확립된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법정에 가서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설득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의 마음이 ‘이 세상의 실상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버전의 담마(Dhamma)를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출처:소-따빤나가 제거한 유일한 아꾸살라는 무엇인가? (https://puredhamma.kr/what-is-the-only-akusala-r )
2022/09/20(화)
유혹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챙겨 자신의 감각 기능을 보호’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각적 매력의 ‘아닛짜 특성(결심없는/위험한 본질)을 이해할 때 더 쉬워진다.
포럼 포스트: 40043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goenkas-vipassana/#post-40043 )
2022/09/21(수)
<자와나 찟따와 끼리야 찟따>
아비담마(길라잡이)에서, 찟따는 (아사와로 드러나는지 여부 및 아누사야의 유무에 따라) 꾸살라 찟따, 아꾸살라 찟따, 위빠까 찟따, 및 끼리야 찟따로 나누어진다.
범부 중생 및 유학성자의 자와나 찟따(찟따의 작용에 따른 분류 명칭임)는 꾸살라 찟따(아사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누사야가 있는 찟따) 또는 아꾸살라 찟따(아사와로 드러난 찟따)로서, 업씨앗이 생기는 업행의 찟따다.
무학성자(아라한)의 자와나 찟따는 끼리야 찟따(아누사야가 없음)로서, 업행이 아니므로 업씨앗이 생기지 않는 단지 행일 뿐인 찟따다.
신통력을 행하는 자와나 찟따는 별도의 집중력을 기르는 사마타 수행을 한 범부 중생이나 성자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
참고 사항:
범부 중생과 유학성자의 모든 찟따는 위빠까 찟따를 포함하여 모두 순간적으로 9단계로 오염된 윈냐-나고, 무학성자의 모든 찟따는 찟따가 일어나는 하다야 왓투에 아누사야가 제거되었으므로 위빠까 찟따를 포함하여 모두 순간적으로 3단계(마나상)까지만 오염된 찟따다.
한편, 자와나 찟따는 범부 중생과 유학성자의 업행의 찟따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여, 아라한의 자와나 찟따는 끼리야 찟따라고 하여 아라한에게는 자와나 찟따가 없다고 설명될 수 있다.
아라한에게는 찟따 위티에서 업행을 결정짓는 의도의 옷타빠나 찟따가 없으므로(또는 아니므로), 자와나 찟따가 없이 과보연기의 끼리야 찟따가 계속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이런 설명은 와하라까 테로님과 같이 빠띠삼비다- 냐-나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 부처님의 설명에 어긋나지 않게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Lal님은 와하라까 테로님의 법문 및 삼장에 따라 퓨어담마를 전하고 계심).
아라한에게 자와나 찟따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중요한 것은 아라한에게는 찟따 위티에서 업씨앗이 생기는 업행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하라까 테로님의 설명으로 우리가 알게 된 찟따의 순간오염의 관점에서, 아라한의 마음을 지칭하는 말로 찟따라고 하면 어느정도 타당하지만(엄밀하게는 ‘찟따(1단계)’가 아니고 ‘마나상(3단계)’임), ‘윈냐-나’라고 하면 타당하지 않다.
2022/09/22(목)
자신이 사까다가미 단계에 도달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물질적인 것, 예를 들어, 집, 자동차, 그림, 등을 소유하려는 바람이 없을 때 자신이 알 것이다.
그러나, 사까다가미는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경향을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 사까다가미는 그런 감각적 즐거움의 아닛짜 특성을 계속 숙고할 필요가 있다.
출처: 37318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sakadagami-stage/#post-37318 )
(참고: '소따빤나 단계 후의 위빠사나 명상'에 대한 포럼 논의는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vipassana-meditation/ 를 참조)
2022/09/24(토)
괴로움(고통)/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만이 담마에 따라 할 수 있으며, 인간 이상의 유정체만이 괴로움(고통)/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미있는 행을 할 수 있으며, 인간 이상의 유정체 중에서도 인간만이 의미있는 행을 잘 할 수 있으며, 인간 중에서도 공덕이 많은 자만이 의미있는 행을 잘 할 수 있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조건 및 결과의 자연법에 따라 그렇게 되도록 조건지어진다.
출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575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560444332 )
2022/09/25(일)
장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그 노력(상카-라 둑카)이 별 의미(가치)가 없다.
별 의미(가치)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목적으로 장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그 노력(상카-라 둑카)이 별 의미(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감각적 즐거움을 구하는 것을 줄이고/소멸시키는 목적으로 사람으로 장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그 노력(상카-라 둑카)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 노력(상카-라 둑카)이 힘들더라도 매우 큰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사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출처: 장수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의 가치(의미)와 행복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825 https://blog.naver.com/hojanyun/222717966315 )
2022/09/26(월)
아-람마나(ārammaṇa)에 들러붙을 때, 우리는 현재 순간에 미래 재탄생의 동력을 주는 깜마 에너지를 생성한다. 우리는 탐함, 화냄, 및 무지함을 통해 들러붙는다. 무지는 그 순간에 생성하는 행동/말/생각의 결과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ER1-03-07_다섯 무더기 ㅡ 각 유정체의 경험 https://puredhamma.kr/5-aggregates-experiences-of-ea
2022/09/27(화)
[붓다 담마에서는] 기본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아인쉬타인이 붓다 담마를 배우기 시작했다하더라도, 기본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깊은 것은 어떤 시점에서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출처: 포럼 포스트 40547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post-on-namagotta-bhava-kamma-bija-and-mano-loka-mind-plane/#post-40547 )
2022/09/28(수)
아누사야(잠재성향)는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가? 그것은 쭈띠-빠띠산디(죽음-재생연결) 순간에 새로운 존재를 움켜잡을 때 하다야 왓투에서 다음의 새로운 하다야 왓투로 이전된다.
출처: https://puredhamma.net/three-levels-of-practice/seeking-nibbana/asava-anusaya-gati/ 의 #16
(참고: “깜마 바와(kamma bhava) 또는 나-마 로까(nāma loka, 정신계) 또는 비물질 세계에 있다”는 것에서 포럼 논의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the-role-of-memory-in-pancadvara-and-manodvara-citta-vithi/#post-40330 중에 개정되었음. 그러나 그 이전은 윈냐-나 다뚜, 즉 정신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으며, 루빠에 속하는 깜마자 까야인 하다야 왓투 만의 물질적으로 이전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 이에 대해서는 https://puredhamma.net/key-dhamma-concepts/gati-bhava-jati/anusaya-gati-bhava-connection-to-manomaya-kaya-gandhabba/ 의 #6 참조. 한국어 사이트에는 아직 위 개정들이 반영되지 않았음.)
2022/09/29(목)
하다야 왓투는 정신계에 저장된 업 씨앗(숫닷-타까 아래의 에너지 레벨)이 숫닷-타까 레벨의 루빠로 가시화되어 다른 유정체(마노마야 까야)가 인식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하며, 이를 통해 시작을 알 수 없는(시작이 없는) 한 생명흐름의 윤회가 계속된다.
이 하다야 왓투에는 각 생명흐름에 저류하는 아누사야가 정신계를 통해 이전되면서 윤회가 계속되며, 이 하다야 왓투에서 수행을 통해 아누사야(번뇌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면, 기 형성된 마노마야 까야의 업 에너지가 소진될 시에 더 이상 새로운 하다야 왓투가 형성되지 않아 마노마야 까야가 형성되지 않으며, 이것을 빠리닙바-나(반열반/무여열반)라고 한다.
2022/09/30(금)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 또는 ‘윤회의 시작이 없다’는 것은 시간적 시작이 없다는 것이며, 이 시간은 생멸 변화하는 궁극 (실재)요소가 점유하는 공간의 사물/사건의 전후 관계를 기술하기 위한 개념이므로 원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멸 변화하는 궁극 실재요소는 찟따, 쩨따시까, 루빠로서 세상을 이루는 요소이고, 닙바나는 세상과는 상호배타적이며 생멸 변화가 없는 요소다.
실재적으로 윤회의 시작은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의 시작 요소와 같이 ‘아윗자-’다. 아윗자가 있으면, 항상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시작이 없다. 아윗자가 없으면 윤회 자체가 없다(즉, 중생에게는 윤회가 있지만,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가 없다.).
'Pure Dhamma 공부 > PD 관련 포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1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3) | 2022.11.30 |
---|---|
2022년 10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1) | 2022.10.31 |
2022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2.08.31 |
사띠빳타나 숫따를 크게 잘못되게 이해하는 두 가지 (0) | 2022.08.12 |
2022년 7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0) | 2022.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