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8/01(월)
<찟따와 루빠, 환상/허상과 실상의 차이>
찟따는 찰나생 찰나멸하면서 세상 모든 것을 인식하지만, 루빠는 찰나생 찰나멸이 아니라 변화하면서 변화무쌍한 세상의 물질계를 형성한다.
찟따에 의해 인식된 정신적 인상은 정신계에 보존되며, 추후 인식의 비교/판단의 기준이 되며, 가띠에 따라 업 형성의 바탕이 된다.
환상/허상은 잘못된 세간/출세간 견해에 의해 형성된 정신적 인상(각자의 오온/오취온)을 말하고, 실상은 올바른 세간/출세간 견해에 의해 형성된 정신적 인상(각자의 오온/오취온)을 말한다.
물질계의 루빠도 찰나생 찰나멸한다고 하며 환상/허상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세간/출세간 견해에 의해 형성된 정신적 인상인 환상/허상이다.
2022/08/02(화)
<나마루빠는 무엇인가?>
나마루빠는 찟따에 의해 생성된 업 에너지에 의해 부-따(숫닷-타까 레벨), 마하 부-따, 및 다뚜로 집적된 루빠 단계 이전의 단계, 즉 정신과 물질의 다리 역할을 하는 상태를 말하며, 순간연기(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에서는 마음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마음에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마루빠는 ‘윈냐-나 빳짜야 나-마루-빠’ 단계로 만들어진 숫닷-타까(suddhāṭṭhaka) 단계 아래에 있는 매우 미세한 루-빠(rūpa)이며, 담마-(dhammā, 정신계의 담마 루빠)에 속한다.
윈냐-나(viññāna)가 강해질수록 ‘윈냐-나 빳짜야- 나-마루-빠(viññāna paccayā nāmarūpa)’ 연기 단계는 나-마루-빠(nāmarūpa)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 나-마루-빠(nāmarūpa)는 윈냐-나(viññāna)가 중개 역할을 하면서, 마음이 생성하는 루-빠(rūpa)의 첫 단계다.
2022/08/03(수)
<세상을 이루는 개체 3가지 범주>
세상을 이루는 개체는 붓다 담마에서는 루빠의 기본요소에 따라 3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루빠 8요소(숫닷-타까)가 그 개체를 지배하는 개체로서,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무생물로서, 마음이 없는(찟따가 일어날 수 없는) 무정체다.
두 번째는 생명 9요소(생명 나와까)가 그 개체를 지배하는 개체로서,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식물이며, 마음이 없는(찟따가 일어날 수 없는) 생명체다.
세 번째는 왓투 10요소(왓투 다사까)가 그 개체를 지배하는 개체로서,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동물이며, 마음이 있는(찟따가 일어날 수 있는) 생명체로서, 유정체다.
주1:
생명 나와까는 ‘숫닷-타까’에 ‘지위띤드리야’가 결합되어 9가지의 요소로 된 루빠의 기본 생성단위고, 왓투 다사까는 ‘숫닷-타까’에 ‘지위띤드리야’와 ‘하다야 왓투’가 결합되어 10가지 요소로 된 루빠의 기본 생성단위다. 기본 생성단위는 ‘깔라빠’라고도 한다.
주2:
유정체 중에서 아산냐 영역의 유정체는 왓투 10요소가 있고 찟따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영역에 이르는 선정상태의 업 에너지에 의해 의해 찟따가 일어나지 못하게 차단된 상태다. 이것은 어떤 선정상태로 어떤 범천 영역에 태어날 때, 범부 중생이라도 그 선정의 업 에너지에 의해 불선한 찟따가 일어나지 못하게 억눌려져 있는 상태로 그 영역에 머무르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2022/08/04(목)
세상에서 불쌍하다고 하는 것은 무생물(마음이 없는 무정체)이나 식물(마음이 없는 생명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며, 마음이 있는 생명체인 유정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유정체는 모두 불쌍할까? 아니다.
유정체는 삿따(31 영역의 모든 범부 중생)와 뿍갈라(8부류의 성자/아리야)로 나누어지는데, 세상에서 불쌍한 것은 삿따(범부 중생)일 뿐이다.
삿따는 제 아무리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여겨도 (믿든 믿지 않든) 윤회하며 언젠가는 사악처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할 운명에 있는 불쌍한 자고, 성자는 현재 선처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사악처에 떨어지는 경우가 없이 괴로움이 영원히 없는 반열반에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는 자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쌍한 자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왜 불쌍한지 모르거나 잘못되게 알고 있는 자가 범부 중생이며; 즉, 세상의 특성을 닛짜/수카/앗따로 보고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 때문에 사성제를 참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자가 범부 중생이며; 결국, 마음이 참으로는 열반을 향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세상의 행복을 구하고 있는 자가 범부 중생이다.)
2022/08/05(금)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있는가의 여부>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있는가의 여부는 단순히 무엇을 하고 싶어 하거나 육체적 괴로움을 느끼는 것으로는 알기가 어렵다.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잘 안되거나 무엇이 방해가 되거나 육체적 괴로움이 느껴질 때, 정신적 괴로움(성냄/분노 포함)이 생기는가 생기지 않는가에 따라 쉽게 알 수 있다.
정신적 괴로움이 느껴짐과 동시에 ‘아, 내가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있구나’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실천을 계속해야 하며, 이것이 가장 효과있고 확실한 수행이다
(왜 들러붙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이 수행이 가능하므로 사성제/연기/삼특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즉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며, 세상/세상것을 닛짜/수카/앗따로 보는 산냐에서는 참된 의미의 이 수행이 불가능함.)
PS)
도사(빠띠가 포함)가 일어나는 아나함 이전까지만 확실한 수행이지만, 아나함은 더 이상 욕계에 돌아오지 않고 색계에서 반열반에 이르게 되므로 우리 재가자는 이 수행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재가자로서 아라한에 이르면, 출가하지 않는다면 재가 생활이 맞지 않아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탁발이 불가능하고 자신이 먹을 것을 챙겨야 하는 한국의 불교상황(한국테라와다불교도 마찬가지임)에서는 아라한은 출가자로서 살기도 어렵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아라한이 되어 출가자가 되려면 스리랑카 등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경전에는 재가자가 아라한이 되어 7일 이내에 출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군가 음식을 주지 않을 때에 자신이 음식을 챙겨먹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상태로 7일까지는 살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2022/08/06(토)
<붓다 담마에서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의 기준>
세간에서는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은 여러가지 기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며 절대적인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은 없으며, 잘못된 것도 없고 올바른 것도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붓다 담마에서는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의 기준은 명확하며 절대적인 것이다.
붓다 담마에서 그 명확하고 절대적 기준은 각자의 괴로움/윤회세상을 유지시키고 증가시키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고 이 잘못된 견해에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각자의 괴로움/윤회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이며 이 올바른 견해에 따르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2022/08/07(일)
<잘못된/올바른 견해에 따른 다사 아꾸살라행/꾸살라행>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하는 것이 다사 아꾸살라 행이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하는 것이 다사 꾸살라 행이다. 그러므로 다사 아꾸살라 행이 잘못된 것이고, 다사 꾸살라 행이 올바른 것이다.
세간의 잘못된 견해는 10가지가 있고, 출세간의 잘못된 견해는 세상의 특성을 닛짜/수카/앗따라고 하는 것이고, 세간의 올바른 견해과 출세간의 올바른 견해는 그 반대(즉, 10가지 세간 정견, 및 세상의 특성을 아닛짜/둑카/아낫따라고 보는 출세간 정견)다.
이에 따라, 다사 꾸살라행도 세간 정견에 따른 다사 꾸살라행과 출세간 정견에 따른 다사 꾸살라행이 있으며, 세간 정견에 따른 다사 꾸살라행은 공덕행(뿐냐 깜마)이 되고, 출세간 정견에 따른 다사 꾸살라 행은 (유학)성자들의 꾸살라 깜마가 된다.
2022/08/08(월)
붓다께서 ‘빤짜 땅하칸다(panca tanhakhanda)’대신에 ‘빤짜 우빠다나칸다(panca upadanakhanda)’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어떤 신중한 까닭이 있는가?
~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땅하(tanha)가 아니라 우빠다나(upadana)기 때문이다.
땅하가 우빠다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바와(bhava)로 이어진다면, 아무도 닙바나(Nibbana)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18805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difference-between-tanha-and-upadana/#post-18805 )
2022/08/09(화)
열반은 바람이나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열반은 들러붙음 또는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세상/세상것에 대한 들러붙음 또는 집착이 없을 때 도달되는 상태다.
이것은 ‘열반은 라각카요, 도삭카요, 모학카요’라고 정의된 것에서 분명하다. 즉 열반은 세상/세상것에 대한 라각카요, 도삭카요, 모학카요가 완성될 때 도달되는 상태이지, 바람이나 기대, 들러붙음이나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2022/08/10(수)
‘열반도 갈망하지 말라’거나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과 열반을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동격의 대상으로 놓고 말하는 잘못되고 모순되며 (거북등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말의 유희/장난에 불과한 말이다. 바람이나 기대, 갈망(땅하-)이나 집착(우빠-다-나)은 세상/세상것을 대상으로 쓸 수 있는 말일뿐, 열반을 대상으로는 쓸 수 없는 말이다.
세상/세상것에 대한 바람없음, 기대없음, 갈망없음, 집착없음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2022/08/11(목)
아닛짜/둑카/아낫따라는 세상의 특성을 알지못하거나 잊어버리는 곳에서
세상/세상것에 대한 추억과 희망이 생기고 유지되고 증장되며 윤회가 계속된다.
세상의 특성을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곳에서는 사성제가 이해될 수 없으며 윤회(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자, 윤회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가 아닛짜/둑카/아낫따라는 세상의 특성을 알지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자며, 이는 곧 빠띳짜 사뭅빠다를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자며, 사성제를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자다.
2022/08/12(금)
사띠빳타나 숫따를 크게 잘못되게 이해하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아나빠나사띠를 호흡명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사띠빳타나 숫따는 범부 중생들에게 설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유 설명>
첫째는 https://puredhamma.kr/sutta-interpretations 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둘째는 그 숫따에서 사띠빳타나숫따에 따른 수행을 실천했을 때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에 확실히 이르는 깨달음의 기간을 보증하셨다는 것인데, 이는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이루어지지 않은 범부 중생에게는 불가능한 보증이며,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이루어진 최소한 수다원도의 성자에게 바와나 빠하땁바로 설하신 것이며, 부처님 재세시에 상가는 거의 성자로 이루어진 상가였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즉, 초기에는 수다원도 또는 수다원과에 달한 후 붓다께 상가에 입문요청한 것이 경에 수없이 등장하며, 이로서 아리야 상가가 형성된 것이며, 삼보에 속하는 상가로 재가자들의 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아리야가 없는 상가, 아리야가 출현할 수 없는 상가 또는 아리야에 의해 전승된 가르침이 없이 잘못 해석된 가르침만 있는 상가는 일반 종교와 같이 규율을 지키는 ‘율장 상가’라고는 할 수 있으나, 붓다 담마에 따른 상가, 즉 재가자들이 삼보의 하나로 귀의하는 대상인 ‘아리야 상가’라고는 할 수 없다.
(웨다나누빳사나 및 찟따누빳사나에 대한 토픽의 39358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vedananupassana-and-cittanupassana/#post-39358 )코멘트를 참조하면, 오늘날 어떻게 이 숫따를 이해하고 수행을 가르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2022/08/13(토)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바와’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이상 업 씨앗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과거의 업 씨앗이 과보로 나타날 때 더 이상 그 업 씨앗을 움켜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바와’가 형성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우빠다나’ 단계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
이 우빠다나 단계가 계속적으로는 일어나지 않게 행하는 것이 우리의 수행지점이이며, 가띠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는 지점이다.
2022/08/14(일)
우빠다나 단계는 우리의 가띠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땅하에 따라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우빠다나 단계에 이르지 않으려면,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마노 상카라’로 ‘우빠다나’ 단계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땅하-’단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땅하- 단계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삼팟사 자 웨다나’ 단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삼팟사 자 웨다나’ 단계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삼팟사 단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삼팟사 단계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산가띠가 없어져야 한다.
2022/08/15(월)
가띠를 변화시킨다는 노력(우빠다나 단계에서의 노력/수행)은 산가띠의 힘을 줄이고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띠를 변화시키는 노력이 올바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이며, 이것은 호흡 수행이 결코 아니며, 다사 꾸살라행을 받아들이고 다사 아꾸살라 행을 버리는 수행을 말한다.
우빠다나 단계에서 대상을 움켜잡는다는 것이 바와가 형성되어 태어난다는 것이며, 무지로 인해 계속해서 상카-라가 형성되어 아꾸살라물라 연기의 바퀴가 계속 구르게 되며 순간적 윤회 및 생사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2022/08/16(화)
사성제/틸락카나/연기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세상에 즐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윗자-로 시작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계속 작동하여 마음이 불편한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범부 중생의 자와나 마음상태),
사성제/틸락카나/연기를 어느 레벨 이상으로 이해하여 세상에 즐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꾸살라 물라로 시작하는 꾸살라 물라 연기가 작동하여 찟따 빠사다가 이루어져 마음이 평화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유학성자의 자와나 마음상태).
사성제/틸락카나/연기를 최상의 레벨로 완전히 이해한 아라한은 꾸살라 물라 연기도 작동하지 않으므로 꾸살라 깜마도 형성되지 않는(깜마 바와가 형성안됨) 그 끼리야의 (자와나) 마음 상태는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22/08/17(수)
호흡명상(호흡에 집중하는 수행)은 마음을 고요히(오염원/번뇌의 양과 질을 그대로 두고 가라앉힘)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을 정화(오염원/번뇌의 양과 질을 줄이거나 제거)할 수는 없다.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된(부도덕한) 것이고 무엇이 바른(도덕적인) 것인지 우선 알아야(이해해야) 하며, 왜 바른 행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이해해야) 한다(이것은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틸락카나를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올바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은 도덕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부도덕한 것을 버리는 수행이며, 이런 행위에 집중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며, 그래야 마음의 번뇌를 줄이고 제거하여 청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08/18(목)
닙바-나를 얻는 것은 사실 모든 가띠를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특히 처음에는 나쁜 가띠를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와찌 상카-라와 까-야 상카-라를 통제하여 우빠-다-나를 통제함으로써) 가띠를 제거할 때, 그 가띠와 관련된 땅하-가 결국 제거된다. 사람들은 아빠야가미 가띠, 즉 사악처에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나쁜 깜마를 행하는 가띠를 제거함으로써 사악처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는 길(방법)이다. 아닛짜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아빠야가미 가띠를 제거하기가 더 쉽게 된다.
출처: 포럼 포스트 18805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difference-between-tanha-and-upadana/#post-18805 )
2022/08/19(금)
사성제/삼특상/연기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계를 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하는 자(닛짜 산냐를 유지/강화하는 자)가 범부 중생이고,
사성제/삼특상/연기를 어느 레벨 이상으로 이해하여 계를 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행위와 함께 아닛짜 산냐를 더욱 개발하고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줄이고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가 (유학) 성자다.
2022/08/20(토)
붓다 담마를 가르치는 것에 관한 한, 학문적 자격(학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
~
부처님의 핵심 메시지는 재탄생 과정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참된 불교도의 목표는 재탄생 과정을 멈추고 닙바-나(열반)을 얻는 것이다.
출처: 방 안의 코끼리 ㅡ 띠삐따까에 대한 직역 (https://puredhamma.kr/elephant-in-the-room-direct-tr )
2022/08/21(일)
마노마야 까야(manomaya kaya)는 물질적 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에너지 몸’ 또는 ‘자기(magnetic) 몸’에 더 가깝다. 그것은 자와나 찟따에서 생성된 깜마 에너지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너무 작아서 물리적으로 측정/표현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물리/화학적으로] 창조될 수 없다. 그 때문에 인공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31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consciousness-mind-v-brain-citta-vithi/#post-37312 )
2022/08/22(월)
범부 중생들이 붓다 담마에 따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사악처에 떨어지는 빠빠 깜마를 행하는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선처로 이어지는 뿐냐 깜마를 행하는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유학 성자들이 붓다 담마에 따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선처로 이어지는 뿐냐 깜마를 행하는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열반으로 이어지는 꾸살라 깜마를 행하는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붓다 담마에 따른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수행이 불가능하며, 특히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 즉 범부 중생들은 사띠빳타나 숫따에서 깨달음(아나함 및 아라한)을 보증하는 사띠빳타나 수행을 할 수 없다. 즉, 범부 중생들은 바와나 빠하땁빠가 우선이 아니라 올바른 붓다 담마를 듣고 이해하는 닷사네나 빠하땁빠가 우선이다.)
2022/08/23(화)
범부 중생들이 세상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한다는 것(즉, 과보 연기만 일어난다는 것이며 이것도 쉽지 않다)은 업적 윤회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 그 업적 상황의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수행이 아니며,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수행하지 않고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귀중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학 성자(아라한)들이 세상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한다는 것(과보 연기만 일어남)은 해야할 일을 해 마친 상태로 반열반에 들 때까지 범부 중생과 유학 성자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는 것이며 수행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2022/08/24(수)
오크 나무의 조그만 씨앗은 간답바와 같다. 그것에는 거대한 오크 나무에 대한 청사진이 들어 있다. 오크 나무에 있는 거의 모든 물질은 토양으로부터 온다. 그와 같이 마노마야 까야(간답바)에는 우리가 가지는 큰 육체에 대한 청사진이 있지만, 그 모든 살과 피는 우리가 먹는 음식으로부터 온 것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31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consciousness-mind-v-brain-citta-vithi/#post-37312 )
2022/08/25(목)
흔히 사람들은 ‘(도덕적인 것을) 알기는 쉽지만 (도덕적으로) 행하기는 어렵다’고 하며,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으나 80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안다’는 것의 레벨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또는 무시하고) 하는 말이다. 즉, 3살 먹은 어린아이나 80살 먹은 노인이나 ‘안다’는 것의 레벨이 동일하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단순한 아모하에서 빤냐로 진행되면서, ‘안다’는 것의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도덕적으로) 행하기가 쉬워지고, 최상의 레벨에 이르면 도덕적으로 행하려는 노력이 없이도 자연적으로 도덕적으로 행하게 되며, 이 상태가 아라한의 상태이며, 이 상태를 뿐냐 깜마나 꾸살라 깜마도 되지 않는 끼리야 행이라고 하며, 그 생의 마지막에 반열반에 드는 상태라고 한다.]
2022/08/26(금)
<소따빤나와 소따빤나 아누가-미의 차이>
소따빤나는 아닛짜 특성과 아낫따 특성을 완전히 이해한다. 다음 단계는 둑카와 아수바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Vipallāsa (Diṭṭhi, Saññā, Citta) Affect Saṅkhāra.” 참조)
소따빤나 아누가-미는 아닛짜와 아낫따에 대한 딧티 위빨라-사는 가지지 않을 수 있으나, 산냐- 위빨라-사와 찟따 위빨라-사는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소따빤나 아누가-미는] 아닛짜 산냐를 육성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https://puredhamma.net/key-dhamma-concepts/anicca-dukkha-anatta-2/how-to-cultivate-the-anicca-sanna/ 의 #1
<영어 원문>
- A Sotapanna fully comprehends the anicca nature and the anatta nature. The next step is to fully comprehend dukkha and asubha nature. See, “Vipallāsa (Diṭṭhi, Saññā, Citta) Affect Saṅkhāra.”
- A Sotapanna Anugāmi may not have diṭṭhi vipallāsa about anicca and anatta, but may have saññā and citta vipallāsa. Thus, it is important to spend time cultivating anicca saññā.
<정리 차트>
출처: https://puredhamma.net/living-dhamma/what-is-sanna-perception/vipallasa-ditthi-sanna-citta/
2022/08/27(토)
수행이란 아꾸살라를 버리고 꾸살라를 받아들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삼마 딧티에서 삼마 사마디에 이르는 과정으로 순차적일 뿐만 아니라 피드백되면서 전체적 팔정도의 레벨이 높아짐에 따라 마음이 청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붓다 담마에 따른 수행이다.
수행을 팔정도의 요소에 따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마 딧티(세간 정견에서 출세간 정견으로 진행)가 함께 하는 삼마 사띠와 삼마 와야마를 통해, 삼마 상까빠와 삼마 와짜와 삼마 까만타와 삼마 아지와를 하여, 삼마 사마디의 질과 양이 증장되면서, (출세간 정견에 따른) 최적(최상)의 상태에서 삼마 냐-나와 삼마 위뭇띠로 아라한에 이르게 됨으로써 수행이 끝나게 되며, 해야할 일을 해 마치게 되는 것이다.
2022/08/28(일)
아꾸살라를 버리고 꾸살라를 받아들여 행하는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범부 중생들은 꾸살라 깜마를 행할 수 없으므로(즉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없으므로), 매순간 빠빠 깜마를 행하는지 뿐냐 깜마를 행하는지 판단하여 빠빠 깜마의 행을 버리고 뿐냐 깜마의 행을 받아들여 행한다는 것(즉, 뿐냐 깜마를 짓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나고/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유학 성자들은 매순간 뿐냐 깜마를 행하는지 꾸살라 깜마를 행하는지 판단하여 뿐냐 깜마가 변화된 꾸살라 깜마를 받아들여 마음이 열반을 향하도록 행한다는 것(즉,꾸살라 깜마를 짓는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고/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 담마에 따른 아나빠나사띠 수행이고 사띠빳타나 수행이다.
2022/08/29(월)
들숨날숨 수행은 들숨 날숨에 집중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며, 결코 붓다 담마에 따라 지혜를 개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다.
붓다께서 호흡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셨다는 것은 아나빠나의 의미를 평범한 의미로 해석한 잘못된 가르침이다(호흡 수행은 붓다 출현 이전에도 아나리야 선정과 신통력의 개발 수단으로 널리 가르쳐지고 있었다).
아꾸살라를 버리고 꾸살라를 받아들여 행하는 ‘참된 아나빠나 수행’을 통해서만 아라한 또는 붓다에 이르게 된다(공덕/바라밀의 차이에 따라 아라한, 빠쩨까붓다, 삼마삼붓다로 나누어지지만, 번뇌가 모두 소멸된 점에서는 동일하다.)
2022/08/30(화)
범부 중생들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욕망이 성취되었고 그것이 유지된다고 하는 것이다.
투쟁하는 빠빠깜마로 그 행복 성취/유지(욕망 성취/유지)를 달성하면 사악처에 떨어지는 업씨앗을 만드는 것이고, 투쟁하지 않는 뿐냐깜마로 달성하면 선처로 가는 업씨앗을 만드는 것이다.
이 욕망 성취에 의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 수행은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수행이 아니다.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수행은 욕망을 줄이고 제거함에 따른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이며, 이 노력을 위한 기본은 정견(세간 정견 및 출세간 정견)을 확립하는 것이며, 이 정견이 모두 완전히 확립된 자가 수다원(소따빤나)이다.
2022/08/31(수)
사람들은 소따빤나, 아나가미, 아라한 등에 대해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많은 ‘마음이 만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외에는 대부분의 혜택이 이 삶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하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가 불교도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697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nde-jesus-and-hell/#post-38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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