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7/01(금)
아라한이 아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행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아비상카-라’인 ‘마노 상카-라’를 기본으로 하므로, 와찌 상카-라와 까야 상카-라가 ‘아뿐나비 상카-라’가 아니라 ‘뿐냐비 상카-라’가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수행이지, 아라한이 아닌 자가 행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그냥 시간낭비에 불과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그 잘못된 수행의 정점은 아산냐 영역, 즉 무상유정천에 태어나 무정체처럼 그 긴 시간을 의미없이 그냥 있게 되는 것이다)
보충 설명: 유학 성자는 항상 아꾸살라 물라 연기만 작동되는 범부 중생과는 달리 마음이 열반을 향할 때가 있는데, 이때의 유학성자는 뿐냐비 상카라는 뿐냐 깜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의 근본 강도를 약하게 하는 꾸살라 깜마가 되는 꾸살라 물라 연기가 작동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2022/07/02(토)
열반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대상 외에, 보고싶은 것을 보려고 하고, 보고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듣고싶은 것을 들으려고 하고, 듣고싶지 않은 것을 듣지 않으려고 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 갈망/갈애이며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는 대상은 열반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감각 대상이 아니므로, 그 대상을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것은 모두 갈망/갈애이며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2022/07/03(일)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잘못된 견해)는 아낫따(anatta)라는 자연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아낫따(anatta)는 ‘나’ 또는 ‘자아(self)’와 관련된 그 잘못된 견해가 아니다. 아낫따(anatta)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anatta-and-sakkaya-ditthi-two
2022/07/04(월)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na)는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물질의 참된 본질, 즉 부-따(bhūta)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하며,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인자로 모든 유정체는 부-따(유령)와 같으며, 본질적으로 생명은 ‘보이지 않으며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초미세 몸(마노마야 까야)’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 지혜는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방식 중의 한 가지며, 우리 몸에 대한 ‘가나 산냐-(ghana saññā, 견실하다는 인식)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참조: https://puredhamma.kr/bhuta-and-yathabhuta-what-do-t (부-따와 야타부-따 ㅡ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
2022/07/05(화)
붓다 담마는 현명한 자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붓다 담마는 세상에서 가르치는 욕망충족을 통한 행복(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제거를 통한 행복(열반)을 구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보충 설명: 따라서, 어리석은 자들은 붓다 담마의 가르침에 따른 행은 스트레스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더욱 괴로운 가르침이 될 수가 있다. 이 욕망 때문에 욕망 제거를 위한 계를 지키기가 힘들어 계율을 변경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상가를 분열시키는 행위가 일어난 것은 불교 역사에서도 분명하다.
붓다 담마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함에 따라 스트레스가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은 잘못 배우고 잘못 실천하기 때문이며, 여전히 세상/세상것에서 행복(즐거움)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기 때문이며, 계율은 더욱 구속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2022/07/06(수)
<찟따 바와나(citta Bhavana, 심념처)가 적절하지 않은 사람들>
“빅쿠들이여, 찟따(citta)(첫 번째 단계)는 빠밧사라(pabhassara)이며, 재탄생 과정의 요인이 되지 않는다.
~
도입되는/들여오는 것은 ‘우빠낄레-사(upakilēsa)’, 즉 오염원(그것은 각자의 가띠, 아누사야, 아-사와에 있음)이고, 그것은 ‘우빠낄릿따(upakilitta)’, 즉 오염으로 이어진다.
~
그러므로, 나는 틸락카나(Tilakkhana, 삼특상/삼특성)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찟따 바와나(citta Bhavana)를 권하지 않는다”
출처: https://puredhamma.kr/pabhassara-citta-radiant-mind
2022/07/07(목)
<수행의 알파와 오메가(올바른 삶의 목적과 실천 요지)>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모든 ‘위빠까 윈냐-나(6가지 과보식)’를 알아차리고 이에 대해 ‘뿐냐 깜마 또는 꾸살라 깜마가 되는 깜마 윈냐-나(행식)’로 행함으로써,
종국에는 아라한의 ‘위빠까 찟따’(‘위빠까 윈냐-나’가 아님)와 ‘끼리야 찟따’(‘깜마 윈냐-나’가 아님)만 일어나는 생이 되게 하여, 그 생의 마지막에 ‘빠리닙바-나(반열반)’에 자연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위빠까 윈냐-나, 깜마 윈냐-나, 위빠까 찟따, 끼리야 찟따, 뿐냐 깜마, 및 꾸살라 깜마의 의미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1916 및 https://cafe.naver.com/puredhamma/1653 참조)
2022/07/08(금)
왜 보게 되는가?(‘왜 듣게 되는가?’ 등의 물음에도 유사하게 답변 가능함)
보는 것에는 반드시 ‘짝쿠 윈냐-나(안식)’가 일어나야 하며, 이 짝쿠 윈냐-나는 자신이 보고 싶다고 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보로 일어나는 것이다. 보고 싶다고 하여 계속 보게 되는 것도 과보로 일어나는 짝쿠 윈냐-나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보고 싶다는 것은 ‘깜마 윈냐-나’가 일어나는 것일 뿐이며, 그 깜마 윈냐-나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PS)
짝쿠 윈냐-나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매칭되어야 하며,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이전 바와에서 과보로 생겨난 짝쿠 빠사다 루빠와 함께 하는 하다야 왓투가 있어야 하며, 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해당하는 간답바가 육체에 갇힌 우리의 경우는 육체적 뇌와 눈이 정상적(과보 또는 다른 조건)이어야 한다.
따라서,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과보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과보는 6가지 근본 원인(로-바, 도-사, 모-하, 아로-바, 아도-사, 아모-하)에 따라 일어나므로, 원인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붓다 담마에서 업과 과보를 설명할 때, 원인은 6가지 근본 원인만을 말하며, 나머지 원인은 모두 조건 항목으로 분류된다).
싫은 것을 보든 좋은 것을 보든 보게 되는 것은 과보로 보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아닛짜 특성의 한 측면이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나쁜 과보가 보이지 못하게 차단시킬 수가 있으며, 아무리 보기 싫어도 나쁜 과보가 계속 보이게 유지시킬 수가 있으며,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짝쿠 윈냐-나가 일어나는 단계에서 대상이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각자의 정신계의 판단 기준인 오온(다섯 무더기, 대상에 대한 정신적 인상)과 비교되어 순간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판단/인식되는 것이다.
2022/07/09(토)
화나거나 음탕한 생각을 일으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다른 이를 해치고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화나지만 행동하지 않거나 말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화난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음탕한 생각을 즐기는 자도 동일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여러가지 행동을 떠올려 생각하며 몇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그런 행위를 직접하는 것만큼 나쁘다! 더욱이 그런 생각이 강하게 되면, 쉽게 행동에 옮기게 될 수 있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145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meditation-techniques/#post-38145)
2022/07/10(일)
붓다께서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붓다 담마(불교)는 종교인가?’에서 인용).
아라한 성자들도 자신이 붓다의 가르침(붓다 담마)을 완전히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유학 성자(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들도 아라한에 가까워질수록 (물질적인 세상/세상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자신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 관심이 더욱 증대한다.
2022/07/12(화)
막가 팔라(도과) 또는 자-나(선정)에 이르는 것은 단 한 스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빠리깜마 단계에 도달하여 한동안 그 단계에 머물 수 있다. 고뜨라부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른 단계도 마찬가지다. 고뜨라부 단계에서 그 변화는 영구적이 된다. 그것은 계보의 변화다.
출처: Citta Vīthi – Processing of Sense Inputs 포스트
(역자주: 고뜨라부 단계에서도 한동안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막가 단계에서 팔라 단계는 바로 이어진다. 8부류의 성자분류는 도의 성자에 해당하는 고뜨라부 단계와, 과의 성자에 해당하는 막가-팔라 단계에 따른 분류다.)
2022/07/13(수)
모든 행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하여 행하는 것이다.
즉, 그 행에 어떤 조건이 필요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탐/진/치의 마음 또는 불탐/부진/불치의 마음에 의한 판단/선택으로 행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떤 변명도 그 변명 자체도 또다른 자신의 탐/진/치의 마음의 발로일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최소한 또다른 자신의 탐/진/치의 마음은 아니다.
(탐/진/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악처로 향하는 행이고, 세간 지혜의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것은 선처로 향하는 행이고, 출세간 지혜의 불탐/부진/불치로 행하는 것은 열반을 향하는 행이다.)
2022/07/14(목)
세상것에 들러붙는 것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세상것에 들러붙음(땅하-)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이해는 빤냐(지혜)가 증가하면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세상것에 들러붙는 경향은 소따빤나 아누가미 단계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6253
2022/07/16(토)
과거 기억을 상기(회상)하는 것과 담마-(dhammā)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과거 기억(업 에너지가 없는 나마곳따)을 상기(회상)하는 것은 그 기억을 상기하는 데 노력이 필요한 반면에, 담마-(dhammā)는 깜마 위빠-까(kamma vipaka)로서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담마-(dhammā)는 업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친구에 대한 기억은 (나마곳따를 통해) 단지 저절로 마음에 떠오를 수는 없다. 그것은 깜마 위빠-까로서 마음에 떠오르는 담마-(dhammā)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 촉발에 대한 반응(대응)으로 사람들은 다른 관련된 기억들을 상기(회상)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5908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post-on-akusala-citta-and-akusala-vipaka-citta/#post-35908 )
2022/07/17(일)
모든 유정체는 에까자 까야(깜마자 까야)로 태어나는데, 그것은 하다야 왓투다.
아산냐의 유정체도 에까자 까야를 가지지만, 그것은 그 육체에 의해 완전히 차폐되며, 그 몸은 외부 세상과 전혀 상호작용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무색계 브라흐마와 유사하지만, 무색계 브라흐마의 하다야 왓투는 외부 세상과 [완전히는] 차폐되지 않으며 담마-(dhammā)와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생각을 생성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4845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hadaya-vatthu-in-asanna-realm/#post-34845 )
2022/07/18(월)
식물과 유정체 사이의 차이는 식물은 지위띤드리야(생명기능)만 있고 하다야 왓투(마음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물의 생명은 업 에너지에 의해서 유지되지만, 찟따를 생성할 수 없다.
그러나, 아산냐 영역의 유정체조차도 바왕가가 그 전 기간동안 활성 상태[역자 주: 찟따가 일어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바왕가 상태는 찟따가 일어나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산냐 유정체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4845 의 p.s.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hadaya-vatthu-in-asanna-realm/#post-34845 )
[역자 주: 하다야 왓투가 결합되지 않는 식물세포 차원이나 동물세포 차원(정자, 난자, 하다야 왓투가 결합되지 않는 상태의 수정란 등)은 모두 숫닷-타까에 지위띤드리야가 결합된 9요소 상태이며, 이 지위띤드리야가 결합된 9요소 상태는 모두 최초에는 유정체의 자와나 찟따에서 생성된 것이며, 독자적으로 세포분열(생성이 아니라 변화)이 가능한 상태다. 따라서, 붓다 담마에서 식물은 유정체도 아니고 완전한 무정체도 아닌 중간 상태이며, 붓다 담마에서는 유정체가 아닌 별도의 생명체로 분류될 수 있다.
생명체와 무정체의 분류기준은 지위띤드리야, 즉 생명 9요소(생명 나와까)가 있는가 없는가며, 유정체와 무정체(또는 식물 생명체)의 분류기준은 하다야 왓투, 즉 왓투 10요소(왓투 다사까)가 있는가 없는가다.]
2022/07/19(화)
아산냐 유정체는 ‘하다야 왓투’를 가지고 있지만, 업 에너지가 ‘마난짜 빠띳짜 웁빳자띠 마노 윈냐낭’ 과정에 의한 마노 윈냐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은 실제로 비활성화된다. 즉 찟따가 일어날 수 없다.
에까자 까야는 쭈띠 빠띠산디(죽음-재생연결) 순간에 일어나는 첫 번째 까야(깜마자 까야)를 말한다. 아산냐 유정체에서는 찟따는 일어날 수 없으므로, 에까자 까야(깜마자 까야)만이 일어나는 유일한 까야다(즉, 아산냐 유정체에서는 찟따짜 까야는 일어나지 않으며, 그래서, 우뚜자 까야도 일어나지 않는다)
출처: 포럼 포스트 3614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hadaya-vatthu-in-asanna-realm/#post-36142 )
[역자 주: 한편, https://puredhamma.kr/contact-between-ayatana-leads- 에 언급된 바와 같이, 식물 생명체에서도 웨다나(느낌)와 산냐(인식)가 일어나지만, 그 느낌과 인식은 하다야 왓투(즉, 왓투 다사까)가 결합되어 일어나는 찟따에 포함된 웨다나(느낌)와 산냐(인식)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식물 생명체의 느낌과 인식은 지위띤드리야, 즉 즉 생명 9요소(생명 나와까)의 업 에너지의 작용 차원에서의 느낌과 인식일 뿐이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음(찟따)의 느낌과 인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무정체, 식물 생명체, 아산냐 유정체, 정상 유정체의 차이는 붓다 담마에서는 업과 관련하여 여러 면에서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으며, 이 구분이 명확하게 되면 살생/살인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구분되며 사람들의 임신/낙태와 관련된 의료계의 논란도 끝나게 될 것이다(임신/낙태 등에 대해서는 https://puredhamma.kr/buddhist-explanations-of-c 참조) ].
2022/07/20(수)
비록 표준 연기 사이클(12연기)이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이유없이 아윗자로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 입력(아람마나)에 들러붙을 경우에만 아윗자로 시작한다. 먼저, 우리는 땅하로 들러붙는다. 그 다음,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 단계가 있고, 아윗자로 행하기 시작한다. ‘우빠다나’는 ‘그 대상을 가까이 유지하여’, 더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064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difference-between-tanha-and-upadana-in-regard-to-ps-cycle/#post-37064 )
2022/07/21(목)
꾸살라 아비상카-라(Kusala abhisaṅkhāra)는 없다.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는 닙바-나로 이어지는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mula Paticca Samuppada)의 일부다. 뿐냐 아비상카-라(Punna abhisaṅkhāra)는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ticca Samuppada)의 일부다. 모든 유형의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ticca Samuppada)에서만 작용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97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is-this-definition-of-world-correct/#post-37972 )
2022/07/22(금)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꾸살라 깜마’를 행하는 경우에만 작용한다.
그것은 소따빤나 아누가미 단계 아래의 사람에게는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뿐냐 깜마만 지을 수 있다. 뿐냐 깜마는 사성제/띨락카나/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해진 좋은 도덕적인 행위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470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kamma-vinnana/#post-37470 )
2022/07/23(토)
<사람으로서 의미있는 삶>
사람으로서 삶은 사성제/띨락카나/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최소한 수다원도의 이해)로 그에 따라 열반을 향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 또는 그것을 향한 목적의 행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 외에 어떤 삶의 상태 또는 목적의 행위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살 수 있지만, 결국은 사악처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의미가 없는 삶이다.
보충 설명)
그러므로, 윤회를 믿지 못하고 사악처나 천상계 또는 범천계도 믿지 못하고 사악처 중의 지옥의 그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붓다께서 거짓말을 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므로 결코 의미있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이런 생각과 의미없는 삶에서 온갖 종교와 왜곡된 불교가 나타나게 된다.
결국, 사람으로서 의미 있는 삶이란 붓다께서 자신은 그것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간단히 요약하신 ‘고통(괴로움)과 고통(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따라 고통(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향한 행위로 사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사성제/띨락카나/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열반을 향한 행위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 요약은 ‘고통(괴로움)’은 세상을 의미하고, ‘고통(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을 의미하므로, 붓다께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을 포함하며, 궁극 요소로 표현하면 찟따/쩨따시까/루빠와 닙바-나며, 좀더 체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사성제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띨락카나와 빠띳짜 사뭅빠-다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그것을 포함하는 사성제로 귀결된다.
2022/07/24(일)
수행한다는 것은
위빠-까 윈냐-나의 일어남에 대해 산가띠(sangati)에 따라 들러붙어 반응/대응(로바로 반응/대응, 도사로 반응/대응, 모하로 반응/대응)하지 않고,
붓다 담마를 숙고하면서 들러붙지 않으면서 반응/대응(알로바/아도사/아모하로 반응/대응)하는 행을 하는 실천행을 하면서 산가띠(sangati)를 개선하며 종국에는 산가띠(sangati)를 완전히 제거하는 노력(‘압빠마데나 삼빠데타’, 즉 ‘부지런히 노력하여 ‘산_san’을 밝혀 식별하라’는 부처님 유언의 올바른 의미임)을 하며 큰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PS)
붓다 담마를 단지 알고 생각하기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나쁘지는 않지만, ‘산가띠_sangati’가 개선될 수 없는 상태),
붓다 담마를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대상을 바라 보기만 하는 것은 더욱 큰 의미가 없으며(나쁘지는 않지만, ‘산가띠_sangati’ 개선의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잘못된 위빠사나 수행은 여기에 속함),
붓다 담마를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불선행으로 반응/대응하는 것은 더더욱 큰 의미가 없다(‘산가띠_sangati’를 유지/강화하는 나쁜 상태).
2022/07/25(월)
세상 또는 세상에 머무르기 위한 세상의 가르침은 피난처가 아니다.
오직 열반 또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세상의 가르침만이 피난처다.
즉, 사성제/띨락카나/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또는 올바르게 가르치는 곳만이 세상에서 중간 피난처(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뗏목)가 되고, 그에 따른 실천 수행으로 도달되는 열반이 영구적 피난처가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오도 또는 거짓말(예, 거짓말로 시작하는 후기 경전)하면서 세상에 머무르며 즐기기 위한 뗏목이 너무나 많다.
2022/07/26(화)
왜 세상에서 투쟁하는가?
유신견과 함께 세상에 대한 닛짜 산냐(세상/세상것에서 영구적 행복이 가능하다는 산냐)가 지배하므로 세상 것을 소유하고 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유신견이 제거되고 세상에 대한 아닛짜 산냐(세상/세상것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므로 영구적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산냐)가 어느 정도 마음에 스며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 살기 위해 세상 것을 구하더라도 투쟁하며 구하지는 않는다.
2022/07/27(수)
띠헤뚜까로 태어난 사람(경을 한 줄도 외울 수 없는 사람도 아라한에 이른 경우가 있으므로, 우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 여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음)이 선입(사)견이 배제된 시각으로 충분히 숙고했을 때도, 모순되어 의심이 계속 유지되는 해석은 올바른 붓다 담마라고 할 수 없다.
올바른 붓다 담마가 인간계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다음 부처님의 출현 때까지 인간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보충 설명)
붓다 담마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닙바-나)을 향해 나아가는(수행하는) 길에서 그 올바른 붓다 담마에 더 이상의 의심이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붓다 담마에 대한 지식의 양에 따라 일어나는 깨달음이 아니라, 지식의 질, 즉 지혜에 따라 일어나는 깨달음이다.
이 지혜는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꾸살라 물라 연기(빠띳짜 사뭅빠다)에서 작용하는 지혜이며, 마음이 세상/세상것에 들러붙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빠띳짜 사뭅빠다)에서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 지혜다.
이 지혜에 따라 유정체를 분류하면, 이 지혜가 완성된 ‘무학성자_아라한’은 두 가지 연기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 상태(끼리야 상태)고, 이 지혜가 완성되지 못한 유학성자는 두 가지 연기가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상태고, 이 지혜가 없는 범부 중생은 꾸살라 물라 연기는 일어날 수 없고 아꾸살라 물라 연기만 일어날 수 있는 상태다.
2022/07/28(목)
쩨따나 쩨따시까(cetanā cetasika)는 작용하는 많은 쩨따시까의 누적효과를 조합한다. 의도는 각자의 가띠에 기반하여 쩨따나 쩨따시까가 통합한 쩨따시카의 유형으로부터 유래한다.
~
아꾸살라/아뿐냐 깜마를 지을 때, 그 의도는 다사 아꾸살라 중의 하나(또는 그 이상)를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쩨따나 쩨따시까는 의도가 아니다. 의도는 아-람마나(대상)에 반응하여 찟따가 마련될 때 쩨따나 쩨따시까가 각자의 가띠/아누사야를 어떻게 통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출처: Details of Kamma – Intention, Who Is Affected, Kamma Patha 의 #3 및 #4
2022/07/29(금)
삼빱빨라-빠-(sampappalāpā)(보통 ‘잡담/쓸데없는 말’로 번역’됨)는 ‘사소한/가벼운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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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빱빨라-빠-(sampappalāpā)는 산(san, 로바/도사/모하가 있는 행)과 빨라-빠-(palāpā, 진리아님/아담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빱빨라-빠-’는 가장 흔히는 웃기고(재미있고) 천박한(저속한) 주제로 수다를 떨거나, 진리(즉, 담마)를 논쟁하는 곳에서 수다를 떠는 것(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진지한 논의(토론)에서 조차도, 재탄생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간답바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담마’를 ‘아담마’로 만들기 때문에 ‘삼빱빨라-빠-’로 간주될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을 아빠야(악처/사악처)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아꾸살라의 가장 나쁜 유형인 밋차 딧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 말, 생각이 잘못된 견해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943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about-sampappalapa/#post-38943 )
2022/07/30(토)
쭈띠-빠띠산디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태어남은 오빠빠-띠까 요니(opapātika yoni, 화생)다.
4가지 방식의 태어남은 주로 인간과 동물에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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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경우에는, 간답바가 자궁에 들어가 육체로 태어나며, 그것이 ‘잘라-부자- 요니(jalābujā yoni, 태생)’다
동물의 경우에는, 3가지 방식이 모두 적용된다. 어떤 동물(원숭이, 사슴, 등)은 인간과 같이 태어난다(잘라-부자- 요니). 닭, 새 등은 알로 태어난다(안다자- 요니, aṇḍajā yoni, 난생). 마지막 방식인 삼세다자- 요니(saṁsedajā yoni, 습생)은 큰 동물에는 드물고 대부분 작은 생물에 적용되며, 여기서 간답바에 필요한 화학적 기반은 썩은 고기나 잎 등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3가지 방식의 태어남에는 씨앗(마노마야 까야/간답바)이 먼저 깜마 에너지에 의해 생성되어야 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976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post-on-antarabhava-discussion-in-kathavatthu-not-relevant-to-gandhabba/#post-38976 )
2022/07/31(일)
우리가 바라보거나 육체를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식으로 우리는 간답바 까야(마노마야 까야)를 바라볼 수는 없다.
간답바 까야는 육체와 함께 확장할 수 있는 에너지 장에 가깝다.
간답바가 죽은 육체에서 나와 다른 자궁을 기다려야 할 때, 그것은 여러가지 향기를 흡수하여 밀도가 높아질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볼 수도 있는(또는 어떤 사진으로 포착되는) ‘미세한 안개 형상’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유령과 같은 개념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그 ‘유령 형상’은 이전 인간 몸의 형상을 닮는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라게 되며, 그것이 무섭게 보이는 이유다. 보통 사람도 머리카락과 손톱을 깍지 않고 몇년이 지나면 무섭게 보일 것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20886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discourse-4-sakkaya-ditthi-person/#post-2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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