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한다는 것과 소통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공감과 소통을 많이 이야기하며 유익한 것이라고 한다.
일면 타당한 점이 있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해롭기까지 한 경우도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지를 알기 위해서는 공감한다는 것과 소통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인간관계에서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의 그 당시의 감정이 자신의 그 당시의 감정(마음성향, 마음가짐)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며, 각자의 견해를 기초로 일어나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견해가 다르면 공감이 일어날 수가 없다.
여기서 감정은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선심소와 불선심소에 따른 감정을 지칭하는 것이다.
선심소와 불선심소와 관련없는 단순한 느낌, 즉 과보식(위빠-까 윈냐-나)으로 일어나는 느낌은 사람들과의 소통(관계)에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다루고자(말하고자) 하는 공감이 아니다.
붓다 담마에서는 견해를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루고 있으며, 그릇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어떤 견해도 좋다는 것은 붓다 담마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라한에게 견해가 없다는 것은 그릇된 견해(사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정견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견(올바른 견해)에도 세간 정견과 출세간 정견이 있으며, 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않으면 출세간 정견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선심소 또는 불선심소가 일어나는 것은 연기 사이클에서 ‘모-하’ 또는 ‘아윗자-’를 기본으로 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며, 이 ‘모-하’ 또는 ‘아윗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릇된 견해(사견) 또는 세간 정견이 바탕에서 작용하여 활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 또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에서 선심과 불선심을 구별하는 것은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팔사도는 그릇된 견해(사견)를 기본으로 하여 행해지는 것이고, 세간 팔정도는 세간 정견을 기본으로 하여 행해지는 것이며, 출세간 팔정도는 출세간 팔정도를 기본으로 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물론, 세간 정견이 확립되었다고 하여 세간 팔정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며, 출세간 정견이 확립되었다고 하여 출세간 팔정도가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세간 정견과 출세간 정견은 팔정도(세간 팔정도와 출세간 팔정도)가 완성되기 위한 기본이며, 팔정도는 아라한에서 완성되며, 팔정도가 완성되어야 해탈(유여열반)에 이르게 된다.
붓다 담마에 따르는 세상의 일반 사람들은 세간 정견을 기준으로 세간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한다.
사견에는 공감할 수 없으며 출세간 정견 및 그에 따른 행위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과 사견(그릇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공감과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붓다 담마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생활에서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간단한 예가 오계의 첫번째인 살생과 관련된 행위/직업과 관련된 견해의 문제다.
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견을 지닌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 사견을 지닌 사람들의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에 공감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진정으로는 소통될 수 없다.
사견을 지닌 사람들은 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공감한다고 생각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다.
한편, 출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은 세간 정견을 지닌 사람들의 상태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의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진정으로는 소통될 수 없다.
예로서, 초전법륜경이 처음 설해졌을 때 부처님과 소통이 이루어진 사람은 꼰단냐 존자뿐이었다(물론, 함께 있었던 천신과 범천들이 사성제를 이해하고 부처님과 소통된 것은 제외).
세간 정견만 지닌 사람들은 출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출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공감한다고 생각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는 세간 정견만 지닌 사람들은 출세간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열반을 추구하고 열반을 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것은 한마디로 사성제를 이해하지(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범부 중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성제를 이해하지(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결국 열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신견이 뿌리뽑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유신견이 뿌리하고 있는 한, 마음은 진실로 열반을 향할 수 없다.
유신견이 뿌리뽑혔다는 것은 최소한 수다원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며, 고뜨라부 상태를 넘어서 마음 성향에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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