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 재가생활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과 붓다 담마

빠띠고사 호잔 2022. 5. 12. 05:55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과 붓다 담마

 

한 나라에서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따라 국민의 죄와 벌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에 대해 생각해 보며, 특히 사법부(법원)와 행정부(검찰)의 행위의 용서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위법(모든 법과 규율)을 만드는 입법부의 행위도 동일한 관점에서 적용될 수 있으며, 입법부는 인위적인 죄와 벌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인위법에 따른 죄와 벌과, 자연법에 따른 죄(불선행)와 벌(불선행에 따른 과보)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인위법을 만들어 그에 따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자연법의 지배를 받으며, 자연법은 만들 수 없고 발견할 수만 있으며(붓다만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발견하는 것이 가능) 그에 따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만 있다.

인위법에 따라 살면 세상의 행복 및 불행(즉, 윤회)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고, 자연법에 따라 살면 열반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다.

윤회를 추구하며 사는 자가 범부 중생이고, 열반을 추구하며 사는 자(참으로 열반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자)가 성자다.

 

우리는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논거의 말로 인용하기도 한다.

한편, 이 말을 자기 죄의 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며, 특히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완전히 도덕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해, 붓다 담마에서는 다른 견해다.

붓다 담마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사 아꾸살라(열가지 불선행)을 한다는 것, 또는 다사 아꾸살라를 하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리고, 아라한은 다사 아꾸살라를 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하다고 하며, 완전한 인간이며,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을 끝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은 붓다 담마와는 다른 견해다.

 

붓다 담마에서, 우리 모두는 노력에 따라, 물론 공덕에 따라(원인 결과의 법칙에 따름) 아라한에 이를 수 있으므로, 자기 죄 또는 불선행의 변명 또는 노력하지 않음의 변명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에 따른 결과를 받는 것이며,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붓다 담마에서 누가 누구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용서해 준다고 해서 자연법칙에 따른 결과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붓다 담마에서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이 선행을 한다는 의미로만 사용되며, 즉 분노/증오 등의 나쁜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이 다사 아꾸살라의 행(10가지 불선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용서 대상이 그 행으로 인해 받을 과보를 없애준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과보는 어느 누구도, 부처님도 없애줄 수 없는 것이며, 세상의 형성과 유지와 소멸의 법칙(연기법)에 따라 실현될 뿐이다.

 

세상의 선과 악, 죄와 벌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 판단자와 집행자의 행위이며,

이 행위에 따른 과보는 그 판단자와 집행자가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판단자와 집행자의 행위는 판단/집행 대상자의 과보와는 관련이 없다.

모든 행위는 자신의 생명 흐름에서 자연법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며, 다른 어떤 누구가 과보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주는 것이 그대가 받는 것이라는 의미다.

( https://blog.daum.net/hojanyun/6043135?category=491756 - ‘그대가 주는 것이 그대가 받는 것이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