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 재가생활

농약 살포를 도우는 것이 반드시 살생의 업을 짓는 것인가?

빠띠고사 호잔 2022. 7. 25. 09:23

농약 살포를 도우는 것이 반드시 살생의 업을 짓는 것인가?

어제, 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논에 농약을 치는 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작년에도 도와달라고 하기에 거절했다가 살충제가 아니고 살균제이므로 괜찮다며 막무가내이기에 도와주었다.

농사지은 무우, 감자, 고구마 등과 반찬을 수시로 주며 먹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에 살생문제 때문에 냉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다.

뿌리치면 오히려 담마의 전법/실천에 악영향이 있을 것 같다.

요즘은 번역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개정한 부분을 제외하고 1차로 번역이 끝나면 나들이도 하면서 접하는 사람들에게 담마를 전할 기회를 포착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며, 누님에게도 자주 가서 내생에 대해 한마디씩 해주려고 할 예정인데, 그 농약치는 것도 도와주지 않고 서운해하며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 같다.

이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도 농업과 관련된 살생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으며, 담마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하고 있으며, 다른 관점에서 전법을 위해 접근할 예정이다.

농약살포에 대해 누님댁에 도와줄 수 없다고 뿌리치면, 그 작업은 다른 사람에게 일당을 주면서 부탁해서라도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다.

한 사람이 농약통을 지고 농약을 치는 예전 방식이 아니라, 경운기에 큰 물통을 실어 경운기의 동력으로 펌프질을 하고 논두렁으로 호스를 깔아서 누군가 잡아주고 경운기의 시동/정지 조작도 도와주며 왔다 갔다 하며 뿌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논에 사는 해충(유정체)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농약 치는 것은 분명히 살생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살생업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누님과 자형은 쌀의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해충을 죽이려는 의도로 농약을 치려고 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것은 탐함의 마음으로 살생행의 의도가 분명히 개입되어 살생업의 요건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럼,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직접 살생하는 경우는 아니지만, 살생의 행을 도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때마침, 오늘 아침에 깜마와 관련하여 Lal님의 신규 포스트가 올라와 있다.

( Details of Kamma – Intention, Who Is Affected, Kamma Patha 참조)

여담으로, Lal님의 글은 내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에 관련된 주제에 관해 올라오는 경우가 많으며, 한 두번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에너지가 교감되어 담마 전법과 관련하여 자연법에 따라 그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하여, 하기 싫다고 하여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업과 과보의 자연법에 따라 매칭되어 이루어지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신규 포스트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완전한 살생업이 확립되려면, 다음 5가지 조건이 완전해야 한다.

(1) 대상이 살아 있다고 인지하고, (2) 그것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3) 죽이려는 계획을 하고, (4)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5) 그에 따라 대상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10가지 다사 아꾸살라행 중의 살생은 (a)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 (b) 누군가에게 죽이도록 시키는 것, (c) 다른 이가 죽이도록 도우는 것, (d) 다른 이가 죽이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포함되며, 이로서 40가지의 다사 아꾸살라 행이 되며, 여기에서는 대상을 죽이려는 의도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살생업의 5가지 조건에서 죽이려는 의도가 없으며, 살생업의 종류인 다른 이가 죽이도록 도우는 것에 해당하지만 여기에도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 상태로 도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살생업이 되지는 않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완전한 살생업(kamma patha)이 확립되지는 않는다.

어떤 행위로 인해 살생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모두 살생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사악처에 떨어지는 업씨앗이 아닌 업씨앗을 형성하는 살생업이 되는 것도 있다.

살생을 도우는 것과 관련하여, 참고로 경에서는 어릴 때 수다원에 이르렀으나 감각적 욕망으로 사냥꾼과 사랑에 빠져 사냥꾼의 아내가 되어 결국 살생을 도우는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수다원 성자)이 있다.

이 사람(수다원 성자)은 남편의 직업과 관련하여 도왔지만, 사냥 대상을 살생하려는 의도로 도우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범부 중생이든 성자든 살생의 의도가 없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이 살생의 결과를 야기하고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살생의 행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살생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수한 유정체(간답바가 내려앉은 미생물)가 있을 수 있으며, 깊이 생각하면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행을 하면 그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세상/세상것에 대한 갈망/갈애가 있음)에서는 업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업이 되지만, 열반을 향한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업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물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 어떤 빅쿠(신통력을 가진 빅쿠)에게 붓다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생물을 완전히 걸러내어 먹으려고 하지말고 열반에 이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살생의 문제는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자신의 죽음으로 더욱 나쁜 상태가 될수 있음), 열반에 도달해야 해결되는 문제이다.

열반에 도달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그리고 열반에 도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살생하며 업을 짓거나 업을 짓지 않으면서 둑카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열반에 도달되지 못하게 하는 나쁜 살생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살생업을 짓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는 살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선처에 태어나기 위한 행으로 불충분한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처에 태어나는 행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유정체를 죽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그 모든 유정체가 열반에 이르도록 이끌 수는 없다.

오늘도 문앞 방충망에는 수많은 날파리들이 죽어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들이 방충망으로 달려들지 않게 하려면 방안의 불도 켜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부딪쳐 죽게 하는 방충망도 설치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극단적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행동은 자타 모두 더욱 괴로움에 묶이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앞의 땅을 응시하면서 시골길을 걸어가면, 수많은 개미들이 보인다. 보이면 밟지 않고 걸어가려고 하고 있지만, 그래도 밟혀죽는 개미가 있을 것이다.

걷는 행위 때문에 이 개미를 죽이지 않으려면 아무 곳으로도 가지도 말아야 한다. 먹기 위해 행동하지도 말고 그냥 가만히 집에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와 살생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또한 참된 붓다 담마를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경을 이해할 때는 그 문맥을 잘 보아야 하며, 사성제의 고성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 말씀의 대의/메시지를 파악한 다음, 그에 적절하게 판단/이해해야 한다.

최근에 ‘오취온=둑카’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분이 있었다.

‘오취온에 의한 둑카’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동치시켜 이해하는 것은 제1성제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좋은 예이다.

낱말, 글자 그대로 해석/번역하는 자는 그 문맥에 따른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문제는 Lal님께서도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에 따라 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많이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연기의 이해에 필수적인데, 낱말 그대로 번역한 결과로 사람들이 도저히 세상과 열반을 이해할 수 없는 빠띳짜 사뭅빠-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