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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마음 자리, 그리고 정신계에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해

빠띠고사 호잔 2022. 5. 9. 07:38

마음과 마음 자리, 그리고 정신계에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해

 

일상 용어로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이라는 말은 붓다 담마에서 매우 다양하고 여러가지 의미가 있으며, 다양한 용어(찟따, 마노, 윈냐-나 등)로 표현되고, 그 다양한 용어도 그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붓다 담마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윈냐-나를 포함하는 ‘일반적 찟따’라는 의미로 말하고자 한다.

 

마음의 순간 오염을 고려하면, 사실은 아라한에게 일어나는 마음을 ‘윈냐-나’로 표현하거나 윈냐-나를 포함하는 찟따라고 하면  잘못된 표현이 된다.

더구나. 아라한의 일상 마음(끼리야 찟따)도 완전히 순수한 찟따(경전에서 말하는 ‘빛나는 마음_빠밧사라 찟따’)라고는 할 수 없다.

(빠밧사라 찟따와 순간 오염 등에 대해서는  ‘빠밧사라 찟따, 빛나는 마음, 및 바왕가’ 포스트를 참조)

 

간답바(마노마야 까-야)의 하다야 왓투는 ‘마음 자리’라고 한다.

이것은 마음이 항상 머무는(있는) 자리라는 말이 아니고, 감각 입력(기억/생각을 포함)에 따라 순간적 마음(위빠-까 윈냐-나 및 깜마 윈냐-나)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리라는 말이며, 그에 따라 각 유정체의 개별적인 정신계에 흔적을 남기는 자리라는 말이다.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831 에 있는 ‘인간을 기준으로 유정체를 설명한 그림’을 참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음)

 

정신계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나마곳따(기억기록)로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며, 아라한이 아닌 모든 유정체는 그에 더하여 업 에너지(업 씨앗)가 생성되어 ‘과보를 받거나 열매맺게 하는 업 에너지(업 씨앗)’와 함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즉, 아라한이 아닌 모든 유정체는 업 에너지(업 씨앗)인 ‘깜마 윈냐-나’까지 정신계(일명, ‘윈냐-나 다뚜’)에 흔적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그 깨달음 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나마곳따(기억 기록)까지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깨달음 이후부터 반열반에 들 때까지 업 에너지(업 씨앗)와 함께는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정신계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각자의 독특한 오온(모두 ‘정신적 인상’임)으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며, 아라한이 아닌 모든 유정체는 오취온에 의한 업 에너지(업 씨앗)로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오온 및 오취온에 대해서는 주요 담마 개념 섹션에서  ‘다섯 무더기(오온) - 소개’로 이어지는 포스트를 참조) 

 

오취온에 의한 업 에너지(업 씨앗)의 전체적 경향성은 윤회를 계속되게 하는 습관 또는 가띠로 나타난다.

아라한이 가띠가 없다는 것은 윤회를 계속되게 하는 ‘이 오취온에 의한 업 에너지의 전체적 경향성’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도 ‘오온에 의한 전체적 경향성’은 나타날 수 있으며, 이것은 경에서 아라한이 되어도 전생 행위의 습관적 행위가 나타나는 이야기와 같으며, 아라한이 아닌 유정체의 ‘오취온에 의한 업 에너지의 전체적 경향성’과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 구별은 자신과 부처님외에는 아무도 모르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어떤 유정체의 마음의 순수한 정도를 정확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담마를 모르고 수행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오온에 의한 경향성’과 ‘오취온에 의한 경향성’은 산(san, 탐진치)이 작용하는 가띠(gati), 즉 산가띠(sangati)인가, 산(san)이 작용하지 않는 단순한 가띠(gati)인가로 나누어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산가띠(sangati)는 일반적으로 현재 ‘삼사화합촉’으로 잘못 알고 있는 ‘띤낭 상가띠 팟소(tiṇṇaṁ saṅgati phasso)’라는 구절에 나오는 그 상가띠를 의미한다.

아라한에게 ‘가띠가 없다’는 말은 이 ‘산가띠(상가띠)가 없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