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 선원 밴드의 업로드 글 두번째입니다.)
<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냄-2>
(앞글에 이어서)
한편, pure dhamma의 내용은 스리랑카 장로스님(와하라까 테로, Waharaka Abhyaratanalankara Thero)의 법문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pure dhamma의 내용을 저의 이해에 따라 신뢰하고 인정하므로 입적하신 와하라까 테로 스님을 당연히 ‘아리야 상가’에 속하며 아라한의 성자였다고 봅니다.
pure dhamma의 “Parinibbāna of Waharaka Thēro”의 항목에 ‘antara Parinibbāna state’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간답바(gandhabba)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는 열반입니다.
또한, 저는 현재 이를 웹사이트를 통해 적극적으로 전하시는 재가자인 Lal A. Pinnaduwage 자신의 고백을 믿고 신뢰하며, 이 분도 ‘아리야 상가’에 속하는 수다원 이상의 성자라고 저는 봅니다.
Waharaka Thero 스님의 법문 또는 웹사이트의 pure dhamma 내용을 접한 후, 다른 필요 조건이 갖추어진 많은 분들도 ‘아리야 상가’에 속하는 수다원 이상의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신뢰 확신 없이 저가 pure dhamma의 내용을 한국 불자들에게 전파하며 권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저의 이 전파 행위에 대한 책임 과보는 당연히 저가 지고 받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전파 행위에 대한 각자의 반응 행위 또는 대응 행위는 저의 책임과 과보 영역이 아닙니다.
업과 과보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는 정견(세간적 정견)이 확립된 분은 각자의 반응 행위 또는 대응 행위까지 저의 책임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업과 과보에 대한 세간적 정견이 확립되지 않은 분은 거의 항상 편함(유쾌하거나 즐거운 느낌을 포함)이나 불편함(불쾌하거나 괴로운 느낌을 포함)의 근본 원인을 대상에 두고 있습니다.
견청정을 확립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현재에는 경전(니까야와 아비담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담마(가르침)를 듣는 것입니다.
현재 대승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테라와다불교에서 조차 청정도론의 잘못된 주석을 법문의 준거로 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저가 현재 법회에 참석할 수 없으며, 법회의 법문에 대해 ‘사두’를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가 테라와다불교의 상가는 삼장, 즉 니까야와 위나냐와 아비담마에 대한 해석 또는 주석만 문제였으므로 상가라고 하지만 ‘진정한 상가’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대승불교의 승가는 해석 또는 주석은 물론이고 경전(삼장외 수많은 경전)까지 새롭게 만든 불교이며 어떤 대승불교의 종파는 율장의 출가의 가장 기본적인 계(배우자 없는 독신)도 바꾼 불교이므로, 대승불교의 승가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상가로 볼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니까야와 아비담마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주석하고 연기와 수행에서 말하는 명색(NamaRupa)을 잘못 이해하고 주석하였기 때문에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붓다 가르침이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의 모든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 시점부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왜곡된 해석의 주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청정도론을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대한 이해에서 부동의 준거로 삼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ure Dhamma의 설명으로,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따른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청정도론에서 나마-루빠를 설명하는 오류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계에는 보통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간(육체에 갇힌 간답바)과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들만이 육체에 갇히지 않은 상태에서 인식할 수 있는 paralowa 인간(육체에 갇히지 않은 간답바)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간답바가 육체에 갇힌 인간)은 paralowa 인간을 인식할 수 없지만, paralowa 인간(육체에 갇히지 않은 간답바)은 일반적인 인간(간답바가 육체에 갇힌 인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욕계 천상의 존재는 보통상태에서 우리 인간의 즐거움에 별관심이 없지만, paralowa 인간(육체에 갇히지 않은 간답바)은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자 하지만 즐길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 보통 인간의 행에 항상 관심이 많으므로, 우리 보통 인간은 보통 축생이나 paralowa(하계)의 인간 또는 축생이 항상 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저가 앞으로 올리는 아비담마의 간답바에 대한 포스트를 보시면 간답바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계 및 축생계와 관련된 이 간답바를 무시하거나 왜곡하게 되면, 경장과 논장에 언급된 윤회와 연기관련 모든 설명이 애매모호하거나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간답바를 부정하는 것을 포함한 10가지 사견이 하나라도 있는 한, 팔정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견에 따라 팔정도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인 정견에 따라 수행하는 자 또는 수행 모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 명백하게 나오는 간답바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가르침에 따르는 상가는 해탈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불자가 그 목적으로 예경해야 할 ‘진정한 상가’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출가자의 모임이라고 해도 모두 ‘진정한 상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과 붓다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해탈 열반을 목적으로 예경(삼배 등)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사견에 따르는 스님에게 개인적 일반 예의도 갖추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의 현재 판단으로 사견(표면화된 사견, 즉 드러난 사견을 기준)에 따르는 스님이나 모임(상가)에 ‘해탈 열반을 목적으로 삼배하며 예경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 메일을 보낼 수 있는 모든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에게 Pure Dhamma 내용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내어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보려고 생각도 하시지 않았는지 현재의 테라와다불교의 해석(청정도론의 모든 설명)에 따라 법문을 계속하는 한, 법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상태에서는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의례적인 사두도 말할 수 없습니다.
[참고 사항]
추가로 참고사항을 인용합니다.
pure dhamma와 관련하여 현 정통테라와다불교의 해석과 크게 다른 문제로, 삼법인과 관련 문제와 아나빠나 사띠와 사띠빠타나 수행(위빠사나 수행)의 상이한 문제에 대해서는 위 설명에서 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가지 크게 다른 오해 문제는 스님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현재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해석에서 세 가지 큰 오해’로 언급하였습니다.
1. The 10 types of micca diṭṭi
(팔정도를 위해 버려야 할 10가지 그릇된 견해)
1) Giving (dāana) has no merits
2) being grateful and responding in kind (for what others have done for oneself) has no merits
3) respecting and making offerings to those with higher virtues has no merits
4) what we enjoy/suffer in this life is not due to kamma vipāka but they “just happen”
5) this world does not exist
6) paralowa or the world of gandhabba does not exist
7) there is no special person as a mother
8) there is no special person as a father
9) there are no opapatika (instantaneous) births
10) there are no samana brahmana (basically Ariyas or yogis) with abhinnā powers who can see both this world (imanca lokam) and paralowa (paranca lokam)
2. 현재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해석에서 세 가지 큰 오해
1) Misinterpretation of anicca, dukkha, anatta: “Anicca, Dukkha, Anatta – Wrong Interpretations“.
https://puredhamma.net/key-dhamma-concepts-that-have-been-hidden/anicca-dukkha-anatta/
2) Misinterpretation of breath meditation as Ānāpānasati: “Is Ānāpānasati Breath Meditation?“.
https://puredhamma.net/bhavana-meditation/is-anapanasati-breath-meditation/
3) Insisting that the gandhabba (manomaya kaya) is a Mahayana concept : “Gandhabba State – Evidence from Tipitaka“.
https://puredhamma.net/living-dhamma/mental-body-gandhabba/gandhabba-state-evidence-from-tipitaka/
3. 간답바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포함한 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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