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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빠띠고사 호잔 2024. 2. 29. 07:46

2024년 2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4/02/01(목)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삭까-야(sakkāya), 즉 ‘빤쭈빠-다-낙칸다’가 수카(sukha)(행복)로 이끈다는 잘못된 견해다. 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고 빤쭈빠-다-낙칸다가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고 소따빤나(Sotapanna)가 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noble-truth-of-suffering-pancu 

 

2024/02/02(금)

 

우리가 루빠(또는 아-람마나)를 알게 될 쯤에는 마음은 우리의 가띠(gati)에 기반하여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벌써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띠와 잘 맞는 모습을 보면, 그 처음 끌림은 벌써 일어났고, 그것을 알게 될 쯤에는 이미 ‘두 번째 보기’를 하고 있다.

마음챙김의 배후에 있는 개념은 모든 나쁜 끌림/아-람마나를 가능한 한 일찍 포착하고 그것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생각/말/행동으로 이어지는 좋은 아-람마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and-pancupadana 

 

2024/02/03(토)

 

세상에 들러붙는다는 것은 세상을 결국 세상을 닛짜/수카/앗따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상/세상것에 탐진치와 세간적 불탐부진불치로 들러붙게 된다.

 

2024/02/04(일)

 

붓다 담마(출세간 담마)는 글 또는 문자로 전해지더라도, 성자가 포함된 상가가 없으면 올바르게 전달될 수 없다.

상가(Sanga)라는 말이 원래 성자의 모임(또는 성자가 포함된 모임)을 말하며, 원래 의미의 상가가 없어지면 담마에 관한 책(경전)이 남아 전해지더라도 그 내용의 핵심(사성제/띨락카나/연기)이 그릇되게 이해되어 전해지므로 성자가 출현할 수 없으며 붓다 담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성자가 출현할 수 없는 가르침은 올바른 붓다 담마가 아니다.

 

2024/02/05(월)

 

붓다 담마를 배운다는 것은 사성제를 배운다는 것이고,

붓다 담마에 따라 행한다는 것은 사성제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사성제를 얼마나 잘 배우고 사성제에 따라 얼마나 잘 행하는가에 따라 도과의 레벨이 정해진다.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아라한은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산가띠 또는 산쩨따나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사성제를 완벽히 잘 알고 사성제에 따라 완벽하게 잘 행하는 상태, 즉 끼리야 행의 상태다.

 

2024/02/06(화)

 

세상은 원인(탐진치 및 세간적 불탐부진불치)에 따라 조건지어진 상태고,

열반은 원인(탐진치 및 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이 뿌리까지 제거되어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다.

세상이 형성되는 원인이 뿌리까지 제거됨에 따라 유여열반 또는 무여열반에 이른 것이지, 세상이 형성되는 원인이 조금이라도 남은 상태로 조건지어지거나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은 유여열반 또는 무여열반에 이른 것이 아니다. 

유여열반은 육체가 형성된 유정체에게만 아라한 또는 붓다라는 말과 함께 한시적으로 쓰이는 말일 뿐이며, 육체가 형성되지 않은 유정체에게는 유여열반은 없으며 무여열반만 있을 뿐이며 아라한 또는 붓다라는 말도 쓸 수 없다.

 

2024/02/07(수)

 

열반에 이르는 출세간 수행은 사성제(연기와 틸락카나 포함)를 이해하고 이를 상기하면서 출세간 아나빠나사띠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에서 아나함 또는 아라한에 이르는 기간을 보장하신 수행이다.

출세간 아나빠나사띠가 간단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2959 에 올려진 자막파일의  p5~6에 녹취되어 있다. 

(세간 수행과 출세간 수행의 차이에 대해서는 https://cafe.naver.com/puredhamma/2589 을 참조하여 함께 이해해 볼 수 있음)

 

2024/02/08(목)

 

찰나의 순간에 여러 감각 입력을 처리하고 식별하는 마음(보다 정확하게는 하다야 왓투, hadaya vatthu)의 이 환상적인 능력은 모든 그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 ‘사람’의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모든 감각적 경험이 한 번에 하나씩 마음을 통과하는 개별적인 사건의 매우 빠른 자동 진행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셨다.

따라서, 모든 여섯 가지 감각 입력을 동시에 경험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단지 한 번에 하나의 감각 입력이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seeing-is-a-series-of-snapshot 

 

2024/02/09(금)

 

우리가 (시각 대상의 경우에) ‘루빠’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에 전송된 일련의 ‘스냅사진’을 사용하여 ‘마음이 만든 그 외부 루빠의 복합적인 인상’이다. 게다가, 마음은 그 대상에 대한 그 자체의 견해/인식을 병합하는데, 그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대상이면, 마음은 까-마구나(kāmaguṇa)를 생성하고 그것들을 그 ‘루빠’에도 귀속시킨다.

따라서, 마음이 만든 ‘루빠’는 그 대상의 근본적인 성질이 아니다! 마음(윈냐-나)는 그 때에 일어나는 오염(까-마구나)에 기반하여 광경, 소리, 등에 대한 그 자체의 버전을 나타낸다.

출처: https://puredhamma.kr/seeing-is-a-series-of-snapshot 

 

2024/02/10(토)

 

먼저 찟따(citta)를 ‘생각’이나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각 순간(thought-moment)’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찟따(citta)가 매우 빠르게 마음을 통하여 흐르기 때문에 마음이 빠르게 나타난다.

찟따(citta)는 인지의 가장 작은 단위다. 1초에 마음에서 수십억의 찟따(citta)들이 일어난다. 오직 붓다만이 찟따(citta)를 보거나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에 마음을 통하여 흐르는 수백만의 찟따(citta)의 누적 효과를 경험할 뿐이다.

찟따(citta)는 윈냐-나(viññāṇa) 단계로 진화한다. 우리는 그런 윈냐-나(viññāṇa)의 ‘묶음’ 또는 ‘무더기’의 효과를 경험한다. 그것이 붓다 담마에서 많은 경우에 윈냐-나(vinñāṇa) 대신에 ‘윈냐-낙칸다(viññānakkhandha)’를 사용하는 이유다.

출처: https://puredhamma.kr/seeing-is-a-series-of-snapshot 

 

2024/02/11(일)

 

탐진치로 오염된 마음(윈냐-나)에서는 세상 문제(생사, 둑카)가 풀리지 않는다. 세상이 윈냐-나로 인해 형성된(또는 형성되는) 연기/윤회/생사 상태(업씨앗/깜마바와 또는 마노마야까야/웁빳띠바와의 형성 상태)로 아닛짜/둑카/아낫따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상태의 해결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윈냐-나가 일어나지 않도록 실천하기 위해서는 끼리야 찟따(아라한)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꾸살라 물라 윈냐-나(유학성자)는 일어나는 상태(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나는 상태, 즉 출세간 팔정도의 실천 상태)가 되어야 한다.

 

2024/02/12(월)

 

<붓다 담마를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과 그 궁극 목적>

붓다 담마를 배운다는 것은 우선 삼마- 딧티(로끼야 삼마- 딧티 10가지 및 틸락카나를 포함하는 로꿋따라 삼마- 딧티)를 공부한다는 것이고, 붓다 담마를 실천한다는 것은 이 삼마- 딧티를 주축으로 다사 꾸살라행(마노 상카-라 3가지, 와찌 상카-라 4가지, 및 까야 상카-라 3가지)을 한다는 것이며, 이 공부와 행의 궁극 목적은 (빠리)닙바-나의 성취다.

이것이 사성제로 요약되는 가르침의 핵심이며, 이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붓다 담마가 아니다.

 

2024/02/13(화)

 

사마타 상태가 반드시 자-나(jhāna)는 아니다.

자-나(jhāna)는 더 깊은 사마-디(samādhi) 상태다. 그것은 윅캄바나 빠하-나(vikkhambhana pahāna)를 통해 도달된 윅캄바나 사마타(vikkhambhana samatha) 상태라고 한다.

5가지 장애가 영구적으로 더 낮은 수준으로 줄어들면,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도달한다. 그것은 웃체다 빠하-나(uccheda pahāna)다. 딧티와 위찌낏차-가 제거되면, 아빗자(abhijjha)와 브야-빠-다(vyāpāda)는 영구적으로 까마 라-가(kama rāga)와 빠띠가(patigha) 수준으로 감소된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에서

 

2024/02/14(수)

 

닙바-나는 지구를 떠나는 로켓과 같은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완전한 닙바-나를 얻는 것은 순전히 정신적 현상이다. 

(Nibbāna is not a physical event, like a rocket leaving the Earth.

Attaining “final Nibbāna” is purely a mental phenomenon.) 

출처: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why-is-the-universe-so-cold/#post-48242 

 

2024/02/15(목)

 

잘못된 견해(밋차- 딧티, micchā diṭṭhi)로 닙바-나(Nibbāna)를 얻기를 바랄 수는 없다(얻을 가망이 없다).

그런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는 도덕 규율(위나야 또는 실라)[의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 도덕 규율[의 완성, 즉 지계의 완성]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에서

 

2024/02/16(금)

 

아낫따(anatta)는 이 세상의 특성이지, 자아(self)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낫따(anatta)를 무아(no-self)로 번역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대신, 이 세상의 어떤 것이 ‘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여겨져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다.

출처: https://puredhamma.kr/anatta-is-a-characteristic-of

 

2024/02/17(토)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둑카(dukkha)의 특성(특성)은 마음이 경험한다.

고통(괴로움)은 우리가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의 것들에 들러붙을 때에만 일어난다.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을 가진 그것들은 항상 세상에 있을 것이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에서

 

2024/02/18(일)

 

띠나 밋다(tina middha)와 위찌낏차-(vicikicchā)의 장애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까-막찬다(kāmaccandha), 브야-빠-다(vyāpāda), 및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는 까-마 라가(kāma raga), 빠띠가(patigha), 및 웃닷짜(uddhacca)로 줄어든다. 이 소-따빤나 단계에서 나머지 3개는 더 이상 니-와라나(nīvarana, 장애)가 아니다. 까-마 라가(kāma raga)와 빠띠가(patigha)는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사다함) 단계에서 줄어들고,  아나-가-미(Anāgāmi, 아나함) 단계에서 사라진다. 웃닷짜(uddacca)는 아라한뜨(Arahant, 아라한) 단계에서만 사라진다.

출처: https://puredhamma.kr/key-to-calming-the-mind-the-f 

 

2024/02/19(월)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는 주어진(특정) 루빠에 들러붙는다. 그러나, 그 들러붙음은 과거의 루빠(rupa)와 심지어 미래의 유사한 유형의 루빠(우리가 생각했던 루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친구를 보는 것을 단지 그의 스냅사진(snapshot)을 찍는 것에 비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볼’ 뿐만 아니라 그가 누구인지 인식하고 그에 대한 어떤 느낌(감정)을 생성한다.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 빠른 과정에는 5가지 무더기(빤짝칸다, pañcakkhandha)가 모두 포함된다.

출처: https://puredhamma.kr/anatta-in-anattalakkhana-s-p1 

 

2024/02/20(화)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은 세상 것들(우리 자신의 몸과 생각까지 포함) 거기에 있다. 세상 것들은 우리가 만족할 만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것들은 생겨나서  한정된 수명을 가진다. 또한, 그것들은 예기치 않게 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에서

 

2024/02/21(수)

 

아라한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는 아라한(Arahant)이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 즉 ‘보편 쩨-따시까(universal cētasika)’만 있고 그 산냐 쩨-따시까(saññā cētasika)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찟따’를 경험하는 상태다. 닙바-나(Nibbānā)는 팟사 쩨-따시까(phassa cētasika)로 접촉한 생각 대상이며, 웨-다나(vēdana)와 산냐(saññā)는 그것에 기반한다(우리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른다). 자-나 사마-빳띠(jhānā samāpatti)에 들어 있을 때와 같이, 거기 어떤 것을 듣거나 보는 등을 하지 못한다.

출처: https://puredhamma.quv.kr/129

 

2024/02/22(목)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의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것들에 들러붙는 것을 멈출 수 있다. 그것은 세상 것들에 들러붙는 것의 나쁜 결과(아-디나와, ādinava)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들러붙는 그 사고 방식(마음 성향)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이 세상 것들에 들러붙지 않으면 고통(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할 수 없이 난감하게 될(아낫따, anatta) 위험이 없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에서

 

2024/02/23(금)

 

<흐름과 가띠(성향)-1>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사악처(괴로움이 지배적인 곳)에 떨어지는 흐름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은 우선 세상의 흐름에 반대방향으로 1차적으로 노력하고, 그 다음에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가는 흐름(수다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범부중생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가띠(탐진치의 성향)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고, 유학성자는 열반으로 가는 흐름에 따라가는 가띠(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의 성향)를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2024/02/24(토)

 

<흐름과 가띠(성향)-2>

범부 중생의 수행은 탐진치의 성향에서 그 흐름의 반대방향으로 가는 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의 성향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유학성자의 수행은 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의 성향 흐름에서 아라한의 성향인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의 성향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탐진치의 성향과 세간적 불탐부진불치의 성향은 산가띠고, 출세간적 불탐부진불치 성향은 산가띠가 아니다. 

아라한에게 산가띠가 없는 것을 ‘가띠가 제거되었다’거나 ‘가띠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2024/02/25(일)

 

<붓다담마 수행의 가장 좋은 명상주제>

붓다담마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거나 청정하게 하기 위한 명상주제(깜맛타나)의 설정은 매우 중요한데, 가장 좋은 명상주제(깜맛타나)는 화두나 호흡이나 까시나 등의 명상주제가 아니라 업자성정견(세간정견)과 틸락카나(출세간정견)라는 담마개념이다.

즉, 어떤 행위(또는 일)을 하든 세상의 업과 과보의 법칙를 항상 함께 생각하며 올바른 아나빠나사띠를 행하는 한편, 세상의 틸락카나(아닛짜, 둑카, 아낫따) 특성을 항상 함께 생각하며 올바른 아나빠나사띠를 행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담마개념을 각자의 상황과 레벨에 따라 바꾸어 가며 수행하거나, 함께 생각하면서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붓다담마에 따른 수행은 어떤 기교가 필요한 어려운 수행이 아니며, 특별한 장소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어디서나 언제나 수행할 수 있다. 들러붙는(갈망/집착하는) 것은 견해와 가치에 따른 산가띠의 문제일 뿐이다. 즉 업자성정견과 틸락카나를 모르는 견해와 가치에 따른 산가띠가 문제인 것이다.

(본 내용은 2024/02/24 퓨어담마 공부모임 카페의 정기 모임에서 언급한 수행 문제를 다듬어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카페 댓글)

제제 2024.02.25. 06:39 

견해(딧티)와 인식(산냐)에 따른 산가띠

라고 표현하는건 어떨런지요?

요즘 왜곡,오염된 산냐에 대한

포스트도 많고하여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띠고사 호잔 2024.02.25. 06:48

제안하신 방향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견해에서 세상/세상것(또는 세상일)의 가치로 이어지는 것으로 견해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저의 의도대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빠띠고사 호잔 2024.02.25. 07:05

제제님의 제안대로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산냐라는 것을 고려하여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나. 결국 그 산냐도 가치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산냐의 근본은 견해에 따른 가치이며 그에 따라 형성되는 가띠가 산냐(생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빠띠고사 호잔 2024.02.25. 09:00

잘못된 견해(세가지 상요자나)를 제거해도 오염된 인식(산냐-)이 일어나므로 산냐의 근본은 견해라고 보는 것이 의문스러운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댓글을 추가합니다.

"올바른 견해에서도 아라한이 아닌 경우에는 오염된 산냐가 일어나고 잘못된 견해에서도 오염된 산냐가 일어난다. 오염된 산냐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오취온의 견해)가 제거되는 것에 더하여 오취온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유학성자의 수행은 오취온의 견해를 제거하는 수행이 아니라 오취온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빠띠고사 호잔 2024.02.25. 09:57

바로 위 저의 댓글에서, "오염된 산냐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는 것에 더하여 오취온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는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었는데도 오취온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비담마의 마음 분류에서 탐함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가지 중에서 잘못된 견해가 포함된 마음 4가지 및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마음 1가지(의심관련)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잘못된 견해가 포함되지 않은 탐함을 뿌리로 하는 마음 4가지와 나머지 3가지에 의해 오취온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비담마의 마음분류를 공부해야 하며, 그래서 분석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은 분석적 사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 사고를 가졌더라도 그에 따라 의문을 제거한 상태로 붓다 담마의 올바른 견해를 상기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2024/02/26(월)

 

세상에 부처님과 같은 전지자(일체지자인 유정체)는 출현할 수 있으나 하느님과 같은 전지전능자(절대자인 유정체)는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유정체와 무정체)는 ‘업/과보의 법칙을 포함하는 원인/결과의 법칙’ 또는 ‘연기법(빠띳짜 사뭅빠-다)’의 지배를 받으며 세상의 특성은 ‘아닛짜/둑카/아낫따’기 때문이다. 

이런 연기의 세상 또는 아닛짜/둑카/아낫따 특성의 세상을 명확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 연기하지 않는 닛짜/수카/앗따 특성의 열반에 이르는 길/방법을 보여주는 진리 또는 가르침이 사성제며 팔정도다.

 

2024/02/27(화)

 

아닛짜 특성에 위빠리나마 특성이 내장되고 그것이 일어나면 위빠리나마 둑카고, 들러붙어 행하는 것이 상카-라 둑카며, 들러붙어 생기는 것이 둑카 둑카다.

출처: 닙바-나에 이르는 방법(와하라까 테로 스님의 법문 일부)’ 중의 p57~p59에서 발췌 편집

 

2024/02/28(수)

 

수다원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람(붓다 또는 성자)에 대한 의심이든 가르침(담마)에 대한 의심이든 믿음(삿다)이나 지혜(빤냐)를 통해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

여기서, 성자는 상가의 원래 의미인 아리야 상가의 멤버이므로, 이 말은 수다원과에 이르면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이 삼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않고 확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담마는 왜곡된 담마가 아니라 붓다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의미를 담고 있는 순수한 담마를 의미한다. 따라서, 경전이 글로써 전해지더라도 상가(성자)가 없으면 순수한 담마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다.   

 

2024/02/29(목)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즐겁고 평온한 느낌과 선행은 좋은 것이고 괴로운 느낌과 불선행은 나쁜 것이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것을 어떤 행위를 하는 판단의 1차적 가치 기준으로 하고, 선/불선행을 하는 것을  2차적 가치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행하는 자가 불행한 곳(사악처)을 향해 가는 세간의 어리석은 자다. 좋은 행(선행)을 하는 것을 어떤 행위를 하는 판단의 1차적 가치 기준으로 하고,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것을 2차적 가치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행하는 자가 행복한 곳(선처)을 향해 가는 세간의 지혜로운 자다.

업과 과보의 법칙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업자성 정견이 확립되지 못한 자)는 결코 세간의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으며, 당연히 열반을 향해 가는 출세간의 지혜로운 자도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