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과 붓다 담마 및 이에 따른 수행
삶의 목적과 붓다 담마 및 이에 따른 수행
(이 포스트는 2023/10/22~2023/10/24의 한두줄 메모장 글을 정리/재배열하고 편집한 것임.)
붓다 담마(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또는 살아가고자 하는) 참된 불자라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산다’고 바로 생각하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생각과 말은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산다는 생각과 말과 같으며, 세상에서 닙바-나(또는 궁극적 행복)를 구하는 상견과 단견에서 벗어난 생각과 말이며, 유신견을 제거하고자 하거나 제거한 상태의 생각과 말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정신적 몸(마노마야 까야)이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 정신적 몸으로 열매맺는 업씨앗을 더 이상 형성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또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재생연결의 연기에서 ‘웁빳띠 바와’가 더 이상 형성되지 않고, 삶 중의 연기에서 ‘깜마 바와’가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것이 이루어진 자를 아라한이라고 하고, 유여열반을 이룬 무학성자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아닛짜/둑카/아낫따 산냐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상기하면서 마음을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올바른 ‘출세간 아나빠나사띠(또는 사띠빳타나)’ 수행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수행시에 괴로운 느낌(정신적/육체적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띨락카나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기하지 못하고 세상의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 윤회 괴로움(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숨겨진 괴로움을 포함)을 더욱 증가시키는 팔사도 또는 세간/평범한 팔정도다.
괴로운 느낌(정신적/육체적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띨락카나를 참으로 이해하고 상기하여 세상의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을 추구하지 않고 닙바-나를 추구하는 것이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 윤회 괴로움(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숨겨진 괴로움을 포함)을 감소시켜 닙바-나에 이르게 하는 출세간/성스런 팔정도다.
출세간/성스런 팔정도에 의한 행은 성자만이 가능한 행(꾸살라 깜마)이며, 유학성자가 아나빠나사띠 또는 사띠빳타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세간/평범한 팔정도에 따른 행(뿐냐 깜마)은 일어날 수 있지만 팔사도에 따른 행(아꾸살라 깜마 또는 빠-빠 깜마)은 일어날 수 없다.
팔사도 또는 세간/평범한 팔정도에 따른 행은 틸락카나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참으로 이해했더라도 일시적으로 잊은 상태의 행이다. 즉, 세상 것에 피난처를 구하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고, 괴로움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유익하지 않고 쓸모없다는 것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참으로 이해했더라도 일시적으로 잊은 상태의 행이다.
무학 성자(아라한)는 모든 족쇄가 제거되었으므로 일시적으로 틸락카나를 잊은 상태의 행이라도 아꾸살라물라 연기에 의한 뿐냐 깜마 또는 꾸살라물라 연기에 의한 꾸살라 깜마도 형성되지 않는 끼리야 행, 즉 완전한 해탈행이 된다. 유학 성자는 꾸살라물라 연기에 의한 평온한 느낌의 행이라도 꾸살라 깜마가 형성되는 행이므로 완전한 해탈행이 아닌, 일시적 해탈의 행일 뿐이다.
위의 이것은 붓다 담마 수행의 핵심을 말한 것이다.
간단한 것인데, 사람들에게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며 틸락카나를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즉, 붓다 담마에 따른 참된 수행이 가능한 성자에 이르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붓다 담마가 간단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법구경 183의 말씀을 다르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선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라는 간단한 말씀이지만, 틸락카나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즉, 세상의 특성을 닛짜/수카/앗따로 인식하고 있고 참으로 아닛짜/둑카/아낫따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므로, 선행(뿐냐행)을 한다고 해도 마음이 열반을 향하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서 평온함과 즐거움 또는 행복의 피난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며, 범부 중생의 마음에서 근본적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과 또는 해탈의 레벨 점검/확인할 때,
자신이 수다원 또는 사다함에 이르렀는지는 느낌(웨다나-)으로 알기가 어렵지만, 자신이 아나함에 이르렀는지는 느낌(웨다나-)로 알기가 쉽다.
도사는 일어나지 않지만 빠띠가가 일어나는 수다원 또는 사다함이 정신적 괴로운 느낌을 야기하는 도사와 빠띠가를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도사와 빠띠가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 아나함이 정신적 괴로운 느낌을 야기하는 도사와 빠띠가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 상태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나함에 이르면, 그 정신적 즐거움 또는 평온함으로 자신이 아라한의 해탈에 이르렀다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나함은 정신적 즐거움과 평온함만 있는 범천(정거천)에 태어나서도 결코 욕계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완전한 해탈에 이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세간) 선정에 중독된 범부 중생은 자신이 도과 또는 해탈에 이르렀다고 착각하기가 쉬운데, 왜냐하면 선정이나 선정에 가까운 상태에서는 도사 또는 빠띠가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간) 선정에 중독된 범부 중생은 세상 사람들과 고립된 곳에서 생활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어느 정도만 접하는 곳에서 어느 정도만 생활해 보면, 자신은 해탈(아라한)은 커녕 유학 성자의 도과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환경과 대상에 따라 빠띠가(짜증나는 느낌을 유발함) 또는 도사(화나는/성나는 느낌을 유발함)가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행과 관련하여 TV와 유튜브에 대해 말하면,
최소한 수다원도에 이르기 위해 붓다 담마를 공부/수행하고자 하는 자와, 더높은 도과에 이르기 위해 붓다 담마를 공부/수행하고자 하는 자는 TV와 유튜브는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뉴스와 이야기로 인해 붓다 담마를 이해하거나 수행하기 위한 고요한 마음 상태를 얻고 지속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공부/수행 정도를 점검/확인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TV와 유튜브를 보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세상의 뉴스와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 반응하며 일어나는 마음의 탐진치 강도와 질을 관찰하여 보면, 이전에 그런 세상의 뉴스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응하며 일어났던 마음의 탐진치 강도와 질과 비교하여 매우 쉽게 점검/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