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년 10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10/01(토)
아윗자로 시작된 윤회의 마노마야 까야에서 빤냐가 일어나서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작용하기 시작하면, 윤회의 끝(더이상 마노마야 까야가 형성 안됨)이 있게 되며, 괴로움이 끝나게 된다. 이것이 반열반이다. 빤냐에 의한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작용하지 않는 한, 즉 성자에 이르지 못하는 한(범부 중생으로 남아 있는 한), 각자의 윤회(각자의 세상, 각자의 괴로움)는 끝이 없게 된다.
(여기서, 각자는 ‘마노마야 까야’로 이어지는 생명흐름을 말하며, 연기하는 것이며, 자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
2022/10/02(일)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아윗자-’로 시작하는 데, 이는 사성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를 ‘아꾸살라 물라’라고 할 수 있으며,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아꾸살라 물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윤회를 증장시키는 빠띳짜 사뭅빠-다임).
마찬가지로,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꾸살라 물라’로 시작하는데, 이는 사성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빤냐’라고 할 수 있으며,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빤냐’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마음이 열반을 향하여 열반에 다가가는 빠띳짜 사뭅빠-다임).
2022/10/03(월)
영혼과 같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동하는 변하지 않는/영구적인 실체는 없다. 그런 실체가 있다면, 재탄생 과정을 멈추고 닙바-나(Nibbāna)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구적 실체가 어떻게 존재하기를 멈출 수 있겠는가?
다음 생으로 가는 것은 아누사야(anusaya) / 가띠(gati) / 상요자나(saṁyojana)다. 그 중 어느 것도 영구적이지 않다. 각각은 순간적으로도 바뀔 수 있다!
더욱이, 그 모든 실체는 괴로움(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아누사야/가띠/상요자나를 제거하는 것은 영혼 또는 아-뜨만과 같은 실체의 끝이 아니라 괴로움(고통)의 끝이다.
출처: 불교에서 무한대 문제( https://puredhamma.kr/the-infinity-problem-in-buddhi )
2022/10/04(화)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의 땅하-(들러붙음)과 우빠-다-나(집착)은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찟따 빠사-다(마음의 고요함/평온함)과 아디목카(결단/결의)로 바뀌어져 있다.
이는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지 않음에 따른 마음의 고요함/평온함과 그에 따라 마음이 닙바-나를 향하여 결정적으로 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2/10/05(수)
딧티 위빨라사, 산냐 위빨라사, 및 찟따 위빨라사 때문에 위빠까- 윈냐-나도 오염된 식이다.
위빠까 윈냐-나의 판단/인식은 그때까지의 각자의 정신계의 판단 기준인 오온과 비교되어 순간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판단/인식된다.
그러므로 위빠까 윈냐-나에 기본 7가지 쩨따시까만 있지만 오염된 것이다.
2022/10/06(목)
아라한과에 이르는 길에서 얻어지는 세 가지 유형의 냐-나(앎/지혜)가 있다.
첫번째 냐-나는 소따빤나 아누가미(수다원도) 단계에서 얻어지는 아난냐-딴낫사-미-띤드리야(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다.
두번째 냐-나는 안닌드리야(Aññindriya)고, 중간 6단계(수다원과에서 아라한도)서 얻어지고 최적화된다.
세번째 냐-나는 안냐-따-윈드리야(Aññātāvindriya)고, 아라한과 순간에 얻어진다.
따라서, 어떤 결정적인 것이 소따빤나 아누가미(수다원도) 단계에 이를 때 일어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797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anannatannassamitindriya-at-the-sotapanna-anugami-stage/#post-38797 )
2022/10/07(금)
모-하(mōha)는 두 단계로 아윗자-(avijjā)로 강도가 감소한다. (1) 소따빤나 단계 전에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의 제거 단계, (2) 소따빤나 단계에서 ‘변하지 않는 자아/영혼/아뜨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단계다. 둘째 단계는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소따빤나 단계 후에 ‘변하지 않는 자아 또는 나라는 인식’은 아라한 단계까지 아스미 마나(asmi mana)로 지속된다. 물론 그것은 사까다가미 단계와 아나가미 단계에서 그 강도가 감소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인식’은 매우 일찍 감소하기 시작한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은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을 강화한다. 따라서, 그것은 소따빤나 단계 전에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40302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defilements-removed-at-each-stage-of-magga-phala/#post-40302 )
2022/10/08(토)
의식(마음)을 일으키는 물질 자국(숫닷-타까)이 있고 그것은 하다야 왓투(hadaya vatthu)다. 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현대 과학의 원자보다 훨씬 작은) ‘마음 자리’는 깜마(업) 에너지에 의해 창조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426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ghandhabba-jati-vinnana-consciousness/#post-37426 )
2022/10/09(일)
아라한은 아꾸살라 상카라도 생성하지 않고 꾸살라 상카라도 생성하지 않을 것이다. 아꾸살라 상카라를 생성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꾸살라 상카라를 생성하지 않는 것은 아라한은 제거할 어떤 오염원이 없기 때문이다. ‘꾸살라’는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37467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kamma-vinnana/#post-37467 )
2022/10/10(월)
세상이 영구적인(무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연기하는 것이며, 둑카인 것이다.
아윗자가 남아 있는 중생에게 세상/연기/둑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며, 영구적인(무한한) 것이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열반은 연기가 그친 것이며, 둑카가 그친 것이다(즉, 열반은 세상의 끝이며 세상이 그친 것이다).
아윗자가 없는 아라한에게 세상/연기/둑카는 시작은 없었지만, 끝이 있는 것이며, 비영구적인(유한한) 것이다.
<보충 설명>
그러나, 중생에게 세상/연기/둑카는 영구적인(무한한) 것이므로 자아라고 말하거나, 아라한에게 세상/연기/둑카는 비영구적인(유한한) 것이므로 무아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중생은 연기하는 것이며, 아라한은 연기가 그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중생들에게는 이런 것을 (누군가) 가르칠 필요가 있고, 중생들은 이런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위에서, 세상과 열반에 대해서는 ‘로히땃사 숫따’를 참조하여, 물리적 세계와, 자신의 물질과 정신의 세계를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참조).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이런 것을 (누군가) 가르칠 필요도 없고, 아라한들은 이런 것을 배울 필요도 없다.
붓다 담마는 중생들을 위한 것이지, 아라한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아라한에게 세상/연기/둑카의 시작이 없었다고 한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의 중생 상태를 합한 생명흐름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아라한이 되는 순간부터 말하면 아라한은 세상/연기/둑카가 아윗자로 시작되었음을 명확히 알므로, 즉 연기를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므로 아라한에게 세상/연기/둑카는 시작도 있다.
유학성자도 연기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유학성자에게는 아눗사야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연기를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연기를 이해하는 것으로 유정체를 분류하면, 범부 중생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유학성자는 연기를 이해하지만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학성자(아라한)은 연기를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022/10/11(화)
의식이 없는 동안에 뇌는 전혀 활동하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뇌는 대부분 활동적이지 않다.
하다야 왓투(마음 자리)에서 찟따(마음)가 일어나려면, 감각 대상이 6가지 감각 중의 하나를 통해 들어와야 한다.
따라서,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면, 찟따 위티(인식 과정)가 촉발될 수 없고, 따라서 의식도 없다.
하지만, 간답바(하다야 왓투와 빠사다 루빠)는 항상 살아 있다. 그러나 하다야 왓투가 촉발되기 전까지는 어떤 찟따 위티도 일어날 수 없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995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vinnana-conscioiusness-hadaya-vathu/#post-37995 )
2022/10/12(수)
신통력은 자-나(선정)에 이르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통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4선정에 도달한 다음, 먼저 [간답바가] 육체에서 나오는 연습을 해야한다. 그것도 첫 단계일 뿐이다.
필자(Lal)는 육체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으나, 그들은 누구도 신통력이 없다.
출처:포럼 포스트 #38059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kasina-meditation-2/#post-38059 )
댓글)
본문에서 ‘육체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으나, 그들은 누구도 신통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간답바가 육체에서 나왔을 때 육체적 눈과 육체적 귀를 통하지 않고 보고 듣고 물체를 관통하는 능력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루빠)을 많이 생성하고 여럿 명을 만들거나 자신의 간답바를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이게 변형시키거나 전생을 보거나 타인의 마음을 보는 능력 등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큰 신통력인 번뇌를 제거하는 능력(누진통)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2022/10/13(목)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는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 세계관을 보고 삼마- 사마-디/막가 팔라(Sammā Samādhi/magga phala)에 이르기 위해 자-나(jhāna) 또는 사마-빳띠(samāpatti)를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람은 우선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올바른 세계관)에 이르고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팔정도를 육성함으로써만 삼마-사마-디/막가 팔라(Sammā Samādhi/magga phala)에 도달할 수 있다.
팔정도에서 첫 단계는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에 이르는 것이다. 단지 그 올바른 세계관으로, 미래에 아빠-야-(악처/사악처)에 재탄생하는 가능성이 그친다.
출처: 사마-디, 자-나, 및 삼마- 사마-디( https://puredhamma.kr/samadhi-jhana-and-samma-samadh )
2022/10/14(금)
‘빠타위(지대) ~ 와-요(풍대)’를 단지 (생명이 없는) ‘빠따위 ~ 와-요’로 알고, ‘빠타위 ~ 와-요’의 참된 본질을 알며, ‘빠타위 ~ 와-요’를 자신으로 여기지도 않는(4가지 ‘마하- 부따’로 만들어진 까-마 로까에 있는 것들에 들러붙지 않음) 그것만으로는 괴로움/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염된 의식’, 즉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를 정화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사성제, 틸락카나, 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출처: 아닛짜 특성(본질) ㅡ 이 세상에서는 괴로움을 극복할 수 없음 https://puredhamma.kr/anicca-nature-not-possible-to
2022/10/15(토)
보통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을 채우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감각적 욕망을 채워주는 것을 타인을 위한 것이므로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을 위한 행위이기에 자신의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줄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덕이 되는 것이다.
<추가 설명>
참으로 타인을 위한 행위는 타인이 감각적 욕망을 줄이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줄이는 원인은 그 자신만이 만드는 것이므로 그 타인에게 원인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이 견해의 확립이 업자성 정견(깜마사까따 삼마-딧티, 업의 주인과 책임은 자신임)의 확립이며 불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우선 확립해야 하는 세간 정견이다. 이 견해가 확립되지 않으면 항상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외부 탓으로 돌린다. 모든 타력 신앙의 종교(기복불교 포함)는 업자성 정견이 기본적으로 결여된 사견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유신견이 강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큰 장애 요인이 된다.
2022/10/16(일)
마음이 초점을 맞추는 곳이 세상의 대상(흙덩이, 물 한 그릇, 호흡, 등)인 모든 명상은 불교 명상일 수 없다.
세상것을 응시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그것들의 결실없는 특성(본질)을 숙고해야 한다. 그것이 (‘아-나-빠나사띠 숫따/MN 118’에 설명되어 있고 훨씬 더 상세하게 ‘사띠빳타-나 숫따/MN 10’에 설명된 바와 같이) 위빠사나- 명상이다.
출처: 자-나, 자-야, 및 자-이 ㅡ 다른 의미들 ( https://puredhamma.kr/jhana-jhaya-jhayi-different-me )
2022/10/17(월)
아나리야 자-나(세간 선정)는 화염이 보이지 않는 정도로 꺼진 석탄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석탄은 남아서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따뜻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 반면에, 아누사야(잠재성향)가 제거되면, 그 불은 물이 부어져 꺼진 것과 같으며, 불이 완전히 꺼져서 다시 불붙을 수 없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116 (https://puredhamma.net/forums/topic/mahasaccakasutta-translation/#post-38116 )
2022/10/18(화)
윤회를 연장시키지 않고 공덕행을 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 방법은 ‘선뿌리 연기(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의 중요한 이 부분이 지금까지 2천년이 넘도록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공덕행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공덕행에 대한 보답을 바라는 그러한 마음은 ‘탐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상카-라, 깜마, 깜마 비-자, 깜마 위빠까 https://puredhamma.quv.kr/23
2022/10/19(수)
닙바-나(nibbāna, 열반)에 이르는 열쇠는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 감각적 즐거움/마음이 만든 즐거움)에 대해 가치를 두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 감각적 즐거움(마음이 만든 즐거움)이 결국에는 실속없는 것,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및 아낫따(anatta)임을 볼 때까지는 이를 멈출 수 없다.
출처: 상카-라, 깜마, 깜마 비-자, 깜마 위빠까 https://puredhamma.quv.kr/23
2022/10/20(목)
유학 성자(수다원도 ~ 아라한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깨달아 마음이 열반을 향하는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올바른 버전의 틸락카나 또는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함에 따라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붓다 담마를 많이 알고 무엇을 많이 깨닫고 마음이 고요하게 되어도 마음이 세상을 향하는 수행(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수행)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아꾸살라 물라 연기밖에 일어날 수 없는 자는 수다원도에도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이다.
<보충 설명>
자신이 최소한 수다원도의 성자가 되었는지는 참으로 자신의 마음이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지 솔직/정직하게 자문해보면 누구나 자신이 간단히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유신견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없으므로,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으며, 참된 붓다 담마를 접하고 있더라도 그냥 그것을 알고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상견이 남아 있어서 자신이 사라짐을 두려워하거나, 단견 또는 무아견이 남아 있어서 괴로움을 겪는 자가 없으므로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견해로 (아라한은 커녕 수다원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굳이 열반을 향하는 수행의 노력도 필요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유물론적 일반인들이 ‘죽으면 그만인데 뭘 그리 애쓰나? 되는대로 즐기면서 살면 그만이지.’라고 하는 말들에서 볼 수 있으며,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대승불교에서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참고: 마음이 열반으로 향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010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132337626 )
2022/10/21(금)
우리는 빚을 갚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이것은 재탄생의 사이클(윤회)을 보는 또 다른 방식(관점)이다. 자연(자연 원리)은 자동적으로 가장 큰 빚이 먼저 갚아지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다음 존재(bhava, 바와)’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출처: 위나야 - 자연은 평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 https://puredhamma.quv.kr/167 )
2022/10/22(토)
신체 접촉으로 인한 유쾌함 또는 불쾌함을 제외하고, 눈/귀/코/혀/마음을 통해 입력되는 모든 감각 입력에 대해 즐거운 느낌 또는 괴로운 느낌은 모두 ‘삼팟사 자- 웨다나’, 즉 오염된 자와나 마음이 만든 느낌(소-마낫사 웨-다나- 또는 도-마낫사 웨-다나-)이다.
중립적인 느낌 즉, 우뻭카 웨-다나-는 ‘위빠-까 웨-다나-’일 수도 있고 ‘삼팟사 자- 웨다나-(아미사 웨다나-)’일 수도 있고 ‘니라-미사 웨다나-’일 수도 있다.
‘아미사 웨다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니라-미사 웨다나-’는 ‘니라-미사 두카 웨-다나-’, ‘니라-미사 수카 웨-다나-’, 및 ‘니라-미사 우뻭카 웨다나-’로 나눌 수 있다.
2022/10/23(일)
위빠-까 웨-다나-는 우뻭카로 경험될 필요가 있고, 삼팟사 자- 웨-다나-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며, 니라-미사 웨-다나-는 길러야 한다.
즉, 위빠-까 두카 웨-다나-(vipāka dukha vēdanā)가 나타나는 조건을 만들지 않도록 하여 그 웨-다나-(vēdanā)를 피하도록 노력하고, 위빠-까 수카 웨-다나-(vipāka sukha vēdanā)가 일어날 때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 jā vēdanā)를 억제하고 점차적으로 제거하고, 니라-미사 웨-다나-(nirāmisa vēdanā)를 기르는 것, 이것이 웨-다나-누빳사나(vēdanānupassanā)에 대한 모든 것이다.
출처: 웨-다나-와 삼팟사 자- 웨-다나- ㅡ 단순한 느낌 이상의 것, https://puredhamma.quv.kr/146
2022/10/24(월)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는 이전 깜마(kamma)의 결과이며 멈춰질 수 없다. 우리가 멈추어야 할 것은 각자의 가티(gathi)로 인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다.
출처: 깜마 윈냐-나 ㅡ 마음과 물질 사이의 연결고리 ( https://puredhamma.quv.kr/152 )
2022/10/25(화)
위빠까 윈냐-나(vipaka viññāna)가 비록 결정적으로 나-마(nāma) 범주에 속한다 하더라도,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깜마]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루-빠(rupā)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때로 윈냐-나(viññāna)가 나-마(nāma)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출처: 아니닷사나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 https://puredhamma.quv.kr/153 )
2022/10/26(수)
붓다 담마에서는 무주상 보시(대가를 바라지 않는 보시)가 최상의 공덕이라고 하는 데, 이는 꾸살라 물라 연기에서 탐함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는 범부 중생에게 이 보시를 권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 무주상 보시는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리석음이 작용하여 무관심하게 보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보충 설명>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없는 범부 중생들이 세간 정견도 없이 무관심하게 보시하는 행은 선처에 태어나는 바람(대가)으로 행하는 것보다 더 못한 보시행이 될 뿐이다.
즉, 범부 중생들이 세상의 어떤 것에 무관심하는 것은 부도덕한 행에 관심을 가지는 것(로바/도사/모하를 강화시킴)보다 낫지만, 도덕적인 행에 관심을 가지는 것(세간 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를 강화시킴)보다 못한 것이다.
유학 성자에 일어나는 꾸살라 물라 연기에서 행해지는 보시행은 빤냐의 작용으로 출세간 버전의 아로바/아도사/아모하를 강화시켜 열반으로 향하는 관심을 가지는 무주상 보시가 된다.
2022/10/27(목)
붓다 담마를 전하는 율장 상가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보시를 통해 운영되고 상거래를 통해 운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붓다 담마는 물질적인 것(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줄이고 제거하기 위한 것이므로, 보시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상거래는 그것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붓다 담마를 전하는 매체(서적, 전자책 등)도 예외가 아니며, 테라와다불교의 담마 관련 모든 전법 매체도 상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2022/10/28(금)
결국에는 자신을 도울 수 있거나 해칠 수 있는 자도 없고 ‘최고 존재’도 없다. 각자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렸다. 붓다께서는 ‘아따- 히 앗따노- 나-토-, 코- 히 나-토- 빠로-시야-(attā hi attanō nāthō, kō hi nāthō parōsiyā), 즉, ‘자신이 참으로 자신의 피난처이다. 어떻게 다른 이가 자신의 피난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이라도 그 길(담마)만 가르칠 수 있었다.
출처: 가띠에서 바와로 그리고 자-띠로 ㅡ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 ( https://puredhamma.quv.kr/54 )
2022/10/29(토)
각자가 다음 생에서 사람이 될 것인지, 천신이 될 것인지, 동물이 될 것인지는 우리가 바라는 것(또는 기도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발하는 가띠(gati)의 종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따빤나(Sōtapanna)의 가띠(gati)’ 즉, ‘아리야 가띠(Ariya gati)’를 계발함으로써 바로 이번 생에서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담마(올바른 세계관)를 배우고 이해함으로써 삼마 딧티(Samma Ditthi, 정견)를 기르고 계발하는 것이다.
출처: 가띠에서 바와로 그리고 자-띠로 ㅡ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 ( https://puredhamma.quv.kr/54 )
2022/10/30(일)
우리는 집을 떠나 짧은 여행을 하거나 좀 긴 여행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집으로 돌아온다. 붓다께서는 4개의 가장 낮은 영역(apāya, 아빠-야, 사악처)이 대부분 유정체의 본집(본거지)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처: 닙바나를 달성하는 네 단계 https://puredhamma.quv.kr/28
2022/10/31(월)
순전히 의지력, 즉 강제해서는 탐욕과 증오를 제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재산을 버리더라도(포기하더라도) 탐욕을 없앨 수는 없다. 이해없이 그렇게 하면(재산을 포기하면), 후회와 증오로 이어질 수 있다.
출처: 닙바-나를 맛보는 방법 ( https://puredhamma.kr/how-to-taste-nibba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