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Dhamma 공부/PD 관련 포스트

2022년 6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빠띠고사 호잔 2022. 6. 30. 13:35

2022년 6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6/01(수)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의 두 가지 형태>

보통 사람들이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으로 윤회를 지속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 담마를 참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욕망을 줄이고 소멸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으로 윤회를 그치는 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붓다 담마에서 '세상/세상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첫 번째 형태의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일 뿐이며, 세상/세상것에 아무 관심도 가지지 말라거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2022/06/02(목)

 

사람들은 평온한 느낌(무덤덤한 느낌)으로도 불선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 느낌으로 하는 불선행은 탐함을 뿌리로 하는 마음 또는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불선행이며, 모든 불선행에 공통적인 부도덕적인 행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심소와 부도덕적인 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심소가 지배적으로 작용한다.

보통 사람들(참된 붓다 담마를 모르고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포함)은 평온한 느낌(무덤덤한 느낌)으로 행하는 불선행을 대개 알아차리지 못한다.

 

2022/06/03(금)

 

세상(윤회)에서 인간과 동물에게는 물질적 몸(육체)이 건강하게 잘 유지되기 위해서 네가지 필수품(의/식/주/약품)이 원활히 공급/유지될 필요가 있다.

이 필수품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이 필수품을 통해 윤회(세상)를 계속하는 목적으로 사는 자가 탐진치에 지배당한 범부 중생(삿따, 뿌툿자나)이고, 이 필수품을 통해 윤회(세상)를 끝내고 열반(또는 반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자가 탐진치에 지배당하지 않은 성자(뿍갈라, 아리야 뿍갈라)다. 

 

2022/06/04(토)

 

<윤회, 즉 무지한 삶의 첫번째 국면과 두번째 국면과 이 국면의 반복>

세상/세상것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가지게 되면 기뻐하고, 가지지 못하면 슬퍼하거나 가로막은 외부 대상에 대해 화내게 되는데, 이것이 무지한 삶의 첫번째 국면이다.

(가지기를 바라서) 가진 세상/세상것이 유지되기(없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그래서 유지되면(없어지지 않으면) 평온해 하고, 유지되지 못하면(없어지면) 슬퍼하거나 유지되지 못하게 한 외부 대상에 대해 화내게 되는데, 이것이 무지한 삶의 두번째 국면이다.

이 모든 경우(다양한 첫번째 국면 및 두번째 국면과 이 국면의 반복, 즉 윤회)가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있다(갈애/갈망한다)는 것이며, 그 근본원인은 사성제/삼특상/연기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다.

 

* 주1: 위 첫번째 국면과 두번째 국면은 세상/세상것에 대해 가지기를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가지지 않고 유지되지 않기(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에도 유사하게 적용됨.

* 주2: 위 무지는 세상/세상것을 아무리 많이 알고 깊이 알아도, 사성제/삼특상/연기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무지하다는 의미임.

 

2022/06/06(월)

 

참된 붓다 담마를 이해하여 최소한 수다원도 성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세상것(부, 권력, 미모, 건강 등)을 원하는 대로 받아 일정기간 동안(또는 수많은 겁 동안) 즐거움을 확실히 반드시 누릴 수 있으나 참된 붓다 담마를 이해하지는 못하게 되어 그 즐거움이 끝난 후 사악처에 떨어져 수많은 겁동안 괴로움/고통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것과, 세상/세상것을 원하는 대로 받지 못하여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참된 붓다 담마를 이해하여 사악처에는 결코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주저없이 자동적으로 두번째를 선택하는 마음가짐(즉, 그 어떤 경우에도 사악처에 떨어지는 행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추가 설명> 

수많은 겁동안 즐거움을 누린다는 말에 유혹되어 생각하며 무엇을 선택할까 망설이며 선택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면(이것은 윤회를 믿지 못하거나 지옥 등을 믿지 못하는 거의 모든 현대인에게 해당됨), 그 자는 아직 수다원도의 성자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며, 성자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선정의 즐거움에 취한 수행자도 역시 첫번째를 선택한 자에 해당한다. 

위에서 ‘자동적으로 선택’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한 ‘마노 상카라’ 레벨의 선택, 즉 가띠에 따른 선택을 말하며, 바와의 전환시에 일어나는 대상에 따라 그 가띠에 의해 자동적으로 선택되어 다음 생이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붓다 담마의 핵심은 사성제를 이해하여 꾸살라 물라로 시작하는 꾸살라 물라 연기를 통해 가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과 성취)에 있는 것이지,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하여 아윗자로 시작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띠를 변화시키는 것(자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다. 

 

2022/06/07(화)

 

붓다께서 ‘나는 괴로움(둑카)와 괴로움의 소멸만을 가르친다’고 하신 말씀은 ‘나는 세상(윤회)과 세상(윤회)의 그침(닙바-나, 열반)만을 가르친다’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붓다 담마에서 괴로움(둑카)은 곧 세상/윤회이며, 괴로움(둑카)의 그침은 곧 세상/윤회의 그침인 닙바-나(열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추가 설명>

이 말씀은 더 자세하게 괴로움(세상, 윤회)의 원인과, 괴로움(세상, 윤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포함하는 사성제만을 가르친다는 말씀이다.

괴로움(둑카)를 가르친다는 것은 괴로움(둑카)의 원인도 가르친다는 것이며, 괴로움(둑카)의 그침을 가르친다는 것은 괴로움(둑카)의 그침에 이르는 길(팔정도)도 가르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성제는 띨락카나와 연기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띨락카나와 연기도 가르친다는 말씀이다.

 

2022/06/08(수)

 

세상/세상것을 좋아하거나(즐기거나) 싫어하는(혐오하는) 것은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 즉 세상/세상것을 갈애/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며, 세상/세상것에서 영구적 행복이 가능하다는 무지가 마음깊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없다는 것이며 마음이 열반을 향하여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보충 설명>

이것은 사성제를 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세상/세상것을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즉, 범부 중생에게 세상/세상것을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중도는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을 반반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로 인식될 수 밖에 없으므로 수행에서도 의미가 없다.

따라서, 범부 중생들은 올바른 담마를 배워 이해하는 것(닷사네나 빠하땁바)이 우선이며, 실천 수행(바와나 빠하땁바)은 최소한 수다원 도에 이른 후의 그 다음의 문제다.

(자신이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했는지, 즉 최소한 수다원 도에 이르렀는지 이르지 못했는지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은 https://blog.naver.com/hojanyun/222713962885  참조)

 

2022/06/09(목)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호흡 명상)도 무지의 범주에 속한다>

백일몽 또는 ‘마음챙김 없음’은 로바(또는 라가), 도사(또는 빠띠가), 모하(또는 아윗자)와 관련된 생각을 수반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쉽다.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호흡 명상)도 무지의 범주에 속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18786

[역자의 코멘트: 그러나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여 사성제를 생각/숙고하며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은 무지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성제를 생각하며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올바른 아나빠나사띠’도 아니고 ‘올바른 호흡명상(사마타 수행)’도 아니다.]

 

(원문: “Day dreaming” or “not being mindful” involves thoughts that are related to greed, hate, and ignorance (lobha, dosa, moha or lower versions of them). That is the easiest way to think about it.
Focusing one’s mind on breath also belongs to the ignorance category.)

 

2022/06/10(금)

 

~ 물론, 음악을 듣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나가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방해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때쯤이면 음악을 듣는 것의 결실없음(실속없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관련되어 있다. 최근 포스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닙바-나(열반)에 이르는 것은 단계별 과정이다.

출처: 포럼 포스트 #18802

 

(원문: ~ Of course, I am not saying that listening to music is bad. But if one is working to get to the Anagami stage, that can be a hindrance. Of course, by that time one would have seen the “unfruitfullness” of listening to music. It is all relative. As I pointed out in a recent post, it is a step-by-step process to Nibbana.)

 

2022/06/11(토)

 

쩨따나(cetana)는 찟따(citta)의 본질(본성)을 결정짓는 쩨따나 쩨따시까(cetana cetasika)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의도(intention)가 아니다. 쩨따나(cetana)는 작용하는 많은 쩨따시카(cetasika)의 누적 효과를 결합(조합)한다.

~

‘의도’는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ā)의 경우에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 중의 하나다. 그 의도는 어떤 쩨따시까(cetasika) 세트가 지배적인 사람의 가띠(gati) 때문에 일어난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intention-in-kamma 

 

2022/06/12(일)

 

의도(intention)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 중 하나(또는 그 이상)를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쩨따나(cetana)는 그 자체로 ‘의도(intention)’가 아니고,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또한 그 결심(결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달려 있다. 붓다께서 “cetana ham Bhikkave kammaṃ vadami”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붓다께서 의미하신 바다. 그 특정한 의도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는 관련된 나쁜 쩨따시까(cetasika)의 세트(집합)에 달려 있다.

꾸살라 깜마-(kusala kammā)의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의도(intention)’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꾸살라 깜마(kusala kamma)를 행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도덕적(소바나, sobhana) 쩨따시까(cetasika)의 세트(집합)가 작용한다.

출처: https://puredhamma.kr/what-is-intention-in-kamma 

 

2022/06/13(월)

 

수행이란 외부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작용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이고 지혜롭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말하며,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새기며 지혜롭게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닷사(네)나 빠하땁바(올바른 견해의 확립)이고, 그 말씀을 새기고 지혜롭게 행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와나 빠하땁바(위빠사나 수행)다.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은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없이 할 수 있으나, 붓다 담마에 따른 위빠사나 수행은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2022/06/14(화)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로 요약되는 붓다 담마를 접하고 사람들이 붓다 담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하지/새기지 못하는 아윗자-로 인해 들러붙어) 안타까워하면서 전법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뿐냐 깜마의 큰 공덕을 짓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출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못하여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는 범부 중생은 열반을 향하는 마음으로(즉, 대상 사람들에게 들러붙지 않고) 전법을 할 수는 없으나, 열반을 향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도과에 이르는 가능성을 높이는 업 씨앗을 축적하는 것이란 점에서 물질적 보시 등 다른 공덕에 비해 월등히 큰 공덕을 짓는 행위임에도 틀림이 없다.

 

2022/06/16(목)

 

<행과 업과 과보에 대한 간단한 정리/설명>

우리(한국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은 ‘상카-라 또는 아비상카-라’고, 업은 ‘아비상카-라에 의한 깜마 윈냐-나’ 또는 ‘이 깜마 윈냐-나로 인해 형성되는 깜마 또는 깜마 비자(업씨앗)’며, 과보는 ‘위빠까 윈냐-나’다.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위빠까 윈냐-나’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업을 짓는다’ 또는 ‘과보가 열매 맺는다’는 것은 물질계의 대상(형색/소리/냄새/맛/촉감) 또는 정신계의 대상(나마 곳따_기억 기록, 또는 깜마 비자_업 씨앗)이 하다야 왓투에 들어와 ‘위빠까 윈냐-나’로 마음(하다야 왓투)에 일어날 때, 그것에 들러붙음과 동시에 움켜잡아 ‘새로운 깜마 비자’가 형성되거나(삶 중의 연기, 이답빳짜야-따-/빠윳띠 연기 ), ‘새로운 마노마야 까야’가 형성되는(재생연결시의 연기, 우빠빳띠/웁빳띠 연기) 것을 말한다.

(더 자세한 것은 https://cafe.naver.com/puredhamma/988https://cafe.naver.com/puredhamma/1328 참조)

 

2022/06/17(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각자의 가띠에 따라 들러붙음에 따라 마노 상카-라로 생기는 것이다.

아라한에 이르지 않은 우리는 산가띠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대상에 따라 산가띠로 반응하며 일어나는 마노 상카-라는 어쩔 수가 없다.

(대상에 따라 산가띠로 반응하며 일어나는) ‘마노 상카-라’ 다음 단계의 와찌 상카-라와 까야 상카-라가 불선한 방향으로 계속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 수행 단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못한 범부 중생들은 세간 정견에 따라 올바른 사띠 수행의 노력을 하고, 성자들은 출세간 정견에 따라 올바른 사띠 수행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2022/06/18(토)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들을 갈망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감각적 즐거움에 계속 빠져 있으면, 그로 인한 나쁜 결과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810

 

2022/06/19(일)

 

빠알리어를 배우는 것과 붓다 담마를 배우는 것은 다른 것이다.

띠삐따까(삼장)로부터 붓다 담마를 배워야 한다면, 빠알리어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빠알리어에 완전한 학자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띠삐따까(삼장)를 읽고 붓다 담마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붓다로부터 직접, 또는 도과를 얻은 붓다의 참된 제자로부터 붓다 담마의 기본을 배워야 한다.

출처: 포럼 포스트 #37423

 

2022/06/20(월)

 

12연기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별해야 할 각 단계의 용어부터 기본적으로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즉, 

1. ‘아윗자-’와 ‘모-하’의 차이, 

2. ‘상카-라’와 ‘아비상카-라’ 사이의 차이, 

3. ‘윈냐-나’와 ‘찟따’ 사이의 차이, 

4. ‘나마’와 ‘루빠’와 ‘나마-루빠’ 사이의 차이, 

5. ‘아-야따나’와 ‘인드리야’의 차이,

6. ‘팟사’와 ‘삼팟사’의 차이, 

7. ‘웨-다나-’와 ‘삼팟사 자- 웨-다나-’ 사이의 차이, 

8. ‘땅하-’와 ‘우빠다-나’의 차이, 

9. ‘바와-’와 ‘자-띠’의 차이를 우선 기본적으로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2022/06/21(화)

 

‘내가 있다’는 견해와, 세상의 개념적 진실인 각 개별 유정체를 부정하는 ‘내가 없다’는 견해가 잘못된 견해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 것이다’는 견해와, 세상의 개념적 진실인 각 소유권을 부정하는 ‘내 것(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다’는 견해도 잘못된 견해다.

‘내가 없다’는 견해는 ‘살생도 없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내 것(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다’는 견해는 ‘훔치는 것도 없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올바른 세상 생활(도덕 생활) 또는 올바른 세간 수행(공덕행)이 불가능하고 잘못된 대승불교(세상과 열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모든 것을 부정, 세상을 부정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벗어난 상태인 열반도 부정하는 것임)로 빠지게 되어 올바른 출세간 수행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2022/06/22(수)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고 소따빤나(Sotapanna)가 된다. 그 다음, 성스런 팔정도를 따라 아라한(Arahant)이 되어 닙바-나(Nibbāna)를 얻는다.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따빤나(Sōtapanna)는 잘못된 견해(diṭṭhi, 딧티)를 제거했지만, 잘못된 인식(saññā, 산냐-)은 제거하지 않았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2/06/23(목)

 

‘자아’(또는 ‘아-뜨마’라고도 하는 ‘영혼’)에 대한 이 인식(saññā, 산냐-)은 띠삐따까(Tipitaka)에 따르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에서 생으로 옮겨온 산냐-(saññā)다. 

~

‘자아(self)’ 또는 ‘나’라는 선천적 감각으로 깊이 내재된 관념은 마-나(māna) 쩨따시까(cetasika)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sakkaya-ditthi-wrong-view-of-m 

 

2022/06/25(토)

 

담마에 따라 실천 수행한다는 것은 들러붙지 않음(위라-가-야, virāgāya)과 그침(니로다-야, nirodhāya)을 통해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실천/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ōniso manasikāra)(아닛짜, 둑카, 아낫따, 및 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기본 개념)로 행하는 것이다.

출처: https://puredhamma.kr/manasikara-and-paticca-samuppahttps://puredhamma.kr/dhammanudhamma-patipatti-co

 

<추가 설명>

따라서, 닷사네나 빠하땁빠가 이루어지지 않은 중생은 붓다 담마에 따른 참된 의미의 실천 수행을 할 수 없다.

즉, 붓다 담마에 따른 참된 실천 수행은 수다원도의 성자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대상을 단순히 알아차리거나 대상에 단순히 집중하는 수행은 붓다 담마에 따른 실천 수행이 아니다.

대념처경에 따른 수행결과의 보증은 닷사네나 빠하땁빠가 이루어진 최소한 수다원도의 성자를 기준으로 보증한 것이며, 올바른 붓다 담마에 따라 실천 수행할 수 없는 범부 중생들에게 보증한 것이 아니다. 

 

2022/06/26(일)

 

붓다 담마에서 세상을 모른다는 것은 시공간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바와의 유형에 따라 형성되는 31존재계를 모른다는 것이다(이 단계의 세상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며, 세간 정견이 확립될 때 세간 팔정도에 따라 ‘열반을 향할 가능성이 있는 수행’이 시작된다.)

더 깊게는 빠띳짜 사뭅빠다에 따라 31존재계가 형성되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형성된 31존재계의 보편적 특성(띨락카나)를 모른다는 것이다(이 단계의 세상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출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며, 출세간 정견이 확립될 때 출세간 팔정도에 따라 ‘열반을 향한 수행’이 시작된다.) 

 

2022/06/27(월)

 

목표가 미래의 행복이라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추구하는데 부도덕한 행위를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결과는 자신의 바람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업 에너지의 종류에 따른다.

출처: 포럼 포스트 #38280

 

2022/06/28(화)

 

법구경 183에서 불선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하라는 것은, 말로 하는 불선행 4가지와 몸으로 하는 불선행 3가지를 하지 말고, 말과 몸으로 선행을 하라는 것이다(우리가 수행으로 직접 통제 가능한 ‘와찌 상카라’와 ‘까야 상카라’에 대한 것임).

법구경 183에서 마음을 청정히 하라는 것은 말과 몸으로 선행을 우선 행함에 따라 마음의 불선행 3가지가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우리가 수행으로 직접 통제가 불가능하고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마노 상카라’에 대한 것임). 

참고 포스트 :  https://cafe.naver.com/puredhamma/1425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448115635

 

보충 설명: 위에서 와찌/까야/마노 상카-라는 단순한 상카-라(업씨앗이 생기지 않는 상카-라)가 아니라 업씨앗이 생기는 '아비상카-라'를 의미한다. 상카-라는 문맥(맥락)에 따라 그것이 단순한 상카-라인지 '아비상카-라'인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2연기에서 말하는 상카-라는 모두 아비상카-라다.

 

2022/06/29(수)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nkhāra paccayā viññāna)” 과정을 멈추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강한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로 이어지는 강한 와찌 아비상카-라(vaci abhisankhāra) 및 까-야 아비상카-라(kāya abhisankhāra)를 멈추는 것이다.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항상 처음에 마노- 윈냐-나(manō viññāna)로 일어난다. 

출처: https://puredhamma.kr/kamma-vinnana-link-between-mam 

 

보충설명: 12연기에서 말하는 ‘상카-라’는 모두 ‘아비상카-라’인 것과 같이, 12연기에서 말하는 ‘윈냐-나’는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가 아니라 모두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다.

아라한은 이 ‘아비상카-라’와 ‘깜마 윈냐-나’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아라한들은 ‘행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흔히 말하기도 하는데, 아라한들이 무엇을 행하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도라도 십중팔구 붓다 담마를 오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