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년 5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5/01(일)
‘상카-라’ 또는 ‘윈냐-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명백히 붓다 담마에 대한 책을 저술할 자격이 없다!
( If someone does not understand saṅkhāra or viññāṇa, that person obviously is not qualified to write books about Buddha Dhamma!)
출처 : 포럼 포스트 #37341 에서, ‘How Early Buddhism Differs From Theravada’라는 저술 및 그 저자에 대한 Ven. Lal 님의 입장
댓글)
상카-라와 윈냐-나를 이해하는 관계는 아닛짜-둑카-아낫따를 이해하는 관계와, 제1성제 내지 제4성제를 이해하는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카-라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윈냐-나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이며, 윈냐-나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상카-라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2연기의 아눌로마 연기에서 상카-라 중의 ‘아비상카-라’만이 윈냐-나 중의 ‘깜마 윈냐-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12연기의 빠띨로마 연기에서 ‘상카-라가 그친다’는 것은 ‘아비상카-라가 그친다’는 것이고 ‘윈냐-나가 그친다’는 것은 ‘깜마 윈냐-나가 그친다’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2/05/03(화)
<세상은 공평하고, 주고 받는(얻는) 것이다>
세상은 공평하고, 주고 받는(얻는) 것이며, 업(깜마, 깜마 윈냐-나)과 과보(위빠-까, 위빠-까 윈냐-나)의 자연법칙에 따라 세상(유정체에 따라 분류된 31 영역 세상)은 형성되고 유지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고 자신이 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아직 업과 과보의 자연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므로, 붓다 담마의 세간 정견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이며, 현생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만으로 판단한 것이다.
<추가 설명>
업과 과보의 자연 법칙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행한 자신의 행위에 따라 빚을 지고 갚게 하고 있으며, 현재에 받는 과보(위빠-까, 위빠-까 윈냐-나)에 따라 행해지는 업(깜마, 깜마 윈냐-나)은 아라한이 되어도 반열반에 들지 않은 한, 미래에 반드시 과보(위빠-까, 위빠-까 윈냐-나)로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불공평한가? 이런 세상이 불공평한가?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못한가는 밖으로 드러난 어떤 업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판단일 뿐이다.)
참고:
1. Jethavanarama Buddhist Monastery 사이트의 상단 베너, “What you give is What you get.”
2. https://hojanyun.tistory.com/6043135 (그대가 주는 것이 그대가 받는 것이다).
2022/05/04(수)
‘마음이 만든 즐거움’이 무엇이며,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마음이 만든 즐거움은 세상의 무엇에 들러붙음으로 인해 생기는 슬픔과 불만족감, 그리고 근심과 두려움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남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얻기 위한 필수 요건이 세상의 무엇에 들러붙는 것이며, 이 들러붙음에서 마음이 만든 즐거움이 유래하며, 그래서 범부 중생들은 세상의 무엇에 들러붙지 않기가 어려워 항상 들러붙을 것을 찾고 있으며, 마음이 만든 즐거움에 숨겨진 괴로움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추가 설명>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얻기 위해 세상의 무엇에 들러붙고, 그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되었을 경우의 슬픔과 불만족감,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에 그것이 사라질까 근심과 두려움을 경험하고, 이 슬픔과 불만족감, 또는 근심과 두려움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노력으로 일시적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윤회이며, 이것이 비극이다.
(이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앗사-다’라고 하며, 이 앗사-다의 나쁜 결과/위험함을 알고 앗사-다를 구하지 않고 즐기지 않도록 들러붙지 않는 노력을 하는 것이 수행인데, 그 수행을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인 들러붙는 것이 의미/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2022/05/05(목)
욕계의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까-마 라가, kāma rāga)에는 두 가지 강도가 있다.
‘낄레사 까-마(kilesa kāma)’는 감각적 즐거움(쾌락)에 대한 들러붙음을 의미하고, ‘왓투 까-마(vatthu kāma)’(‘왓투_vatthu’는 ‘재산/소유물’을 의미함)는 그러한 감각 대상을 소유하기를 또한 원하기 때문에 더 강하다.
삭까-야 딧티(유신견)가 제거된 성자라도 소따빤나(수다원) 성자에게는 ‘낄레사 까-마’와 ‘왓투 까-마’가 모두 일어날 수 있고, 사까다-가-미(사다함/일래자) 성자에게는 ‘왓투 까-마’는 일어나지 않고 ‘낄레사 까-마’만 일어날 수 있으며, 아나-가-미(아나함/불환자) 성자에게는 ‘왓투 까-마’와 ‘낄레사 까-마’가 모두 일어날 수 없다.
2022/05/07(토)
공동체에서 서열에 따라 대우를 하는 것은 그 지위에 대한 것이지, 자신의 에고(마나)에 대해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보이는 행동은 에고에 따른 행위이며 나쁜 것이다.
참고 출처: https://youtu.be/_0_yglwx5LY (Powerful anger management techniques)
<추가 설명>
에고가 없는 자(아라한-무학성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있는 자(범부 중생과 유학성자)에게는 지위에 따른 대우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지위에 따른 대우를 하지 않는 것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에고에 대해 대우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고/판단하므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유신견이 우선 제거된 사띠가 필요한 것이며, 최소한 수다원도에 우선 이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유신견이 있는 범부 중생의 사띠는 자신의 에고를 포함한 번뇌를 근본적으로 줄이는데 별 효과가 없으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일시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효과는 있음).
에고/마나가 없는 것, 즉 아라한에 이르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며, 범부 중생에게는 기약없이 먼 훗날의 이야기다.
2022/05/08(일)
<‘오취온이 둑카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초전법륜경에서 제1성제의 둑카를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에서, 흔히 사람들은 ‘오취온이 둑카다’라고 하며 ‘오취온’과 ‘둑카’를 동치시켜 말하고 있으나, 그 정확한 의미는 ‘오취온으로 인한(오취온에 의한) 둑카’를 의미한다. 이는 원문의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가 그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즉,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는 ‘오취온이라는 둑카’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취온으로 인한(오취온에 의한) 둑카’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제1성제는 어떤 원인에 의한 ‘둑카’라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므로, 제1성제와 제2성제를 구분할 때 원인과 결과면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2022/05/10(화)
<(모든) 느낌도 둑카(고통)다>
느낌, 즉 유쾌한(즐거운) 느낌 / 불쾌한(괴로운) 느낌 / 무덤덤한(중간) 느낌도 둑카(고통)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말씀하신 느낌이 없는 행복이 참된 행복, 즉 열반의 행복이다.
따라서, 아라한에 이르러도 멸진정(상수멸)이나 반열반에 들지 않는 이상,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에서는 필수적으로 느낌이 함께 하므로 둑카(고통)를 겪게 된다(느낌이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든 기본적 압박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추가 설명>
위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세상은 정말로 둑카다’라는 ‘둑카의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게 되며, 마음은 열반을 구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연기가 ‘아윗자-’로 시작하지 않고 ‘꾸살라 물라’로 시작하는 ‘꾸살라 물라 연기’이며, 최소한 수다원 도의 성자에게만 일어나는 연기다.
그러므로, 범부 중생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공덕행의 마음(선정 수행하는 마음을 포함)은 위 사실을 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 즉 ‘아윗자-’로 시작하는 일반적 12연기로 일어난다.
(‘아윗자-’의 더 강한 버전인 ‘모-하’로 시작하는 일반적 12연기는 사악처에 재탄생하는 업 씨앗을 형성하는 ‘아꾸살라 물라 연기’다.)
2022/05/11(수)
<세상의 행복과 열반의 행복, 그리고 행복을 경험하는 ‘개념적 나’>
열반(멸진정 및 반열반)의 행복에서는 느낌도 없지만 그 열반의 행복을 경험하는 ‘개념적 나’도 없다(개념화에 필수적인 산냐-도 없기 때문).
그러나 세상의 행복(즐거움)에서는 느낌도 있고 그 느낌에 의한 세상의 행복을 경험하는 ‘개념적 나’도 있다.
<추가 설명>
그 느낌을 경험하는 ‘개념적 나’를 실재(실체)로 착각(간주)하는 자에게는 유신견(또는 딧티 위빨라사)에 의한 ‘개념적 나’가 작용하고 있으며 에고(마나), 즉 산냐 위빨라사에 의한 ‘개념적 나’도 작용하고 있다.
수다원에 이르면 그 ‘개념적 나’를 실재(실체)로 착각(간주)하게 하는 유신견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으며,
아라한에 이르면 그 ‘개념적 나’로 인해 둑카(괴로움/고통)가 일어나게 하는 에고(마나)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
2022/05/12(목)
붓다 담마를 공부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세상/세상것에 대한 들러붙음(갈애/갈망)을 줄이고 제거하는 것, 즉 마음이 세상/세상것에서 떨어지는 공부를 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악처에서 떨어지고, 욕계에서 떨어지고, 색계/무색계에서 떨어지는 것을 단계적으로 공부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보충 설명>
붓다 담마를 공부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사악처에 붙어 태어나게 되는 업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욕계에 붙어 태어나게 되는 업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색계/무색계에 붙어 태어나게 되는 업행(아나리야 선정을 포함)을 단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2/05/13(금)
모든 행은 의도적 행위이며 모든 행에는 행의 에너지가 있는데,
들러붙음(보답을 바라는 바람/기대가 있음)이 있어 업행의 에너지가 있는 의도적 행위와, 들러붙음이 없는 단지 행의 에너지만이 있는 의도적 행위가 있다.
2022/05/14(토)
업행의 에너지에는 악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구르게 하는 아꾸살라 업행의 에너지와, 선처로 가는 업씨앗을 형성하는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구르게 하는 뿐냐 업행의 에너지와, 번뇌를 줄이고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게 하는 꾸살라물라 연기가 구르게 하는 꾸살라 업행의 에너지가 있다.
들러붙음이 없는 행의 에너지는 번뇌가 소멸된 상태로 단지 행하기만 하고 꾸살라물라 연기도 그친 의도적 행의 에너지다.
2022/05/15(일)
담마(붓다의 가르침)에도 들러붙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담마(붓다의 가르침)도 세상/세상것에 속하며 아닛짜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계속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으므로 그 가르침에 들러붙으면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둑카 특성과 아낫따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가르침을 공부하지도 말고 가르침을 유지하지도 말고 그에 따라 실천하지도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음).
열반은 세상이 아니며 들러붙지 않는 상태가 열반이므로, 열반에도 들러붙지 말라는 것은 원래 말이 되지 않는다.
2022/05/16(월)
담마(붓다의 가르침)에도 들러붙지 말라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거나 담마가 어떻게 되어도 좋으며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담마(세상/세상것에 속함)를 유지하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유지하도록 노력하되 들러붙어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며, 들러붙는 한 둑카 특성과 아낫따 특성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2022/05/17(화)
(붓다 담마 공부에서) 사람은 자신이 이해한 것만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이해하지 못한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해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에고(‘마나_mana’, 자만)이며, 이 에고 때문에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는 학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말은 (배운/이해한 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무학성자)이 되지 않은 이상, 가르치더라도 가르치면서 배우는 학생이 되라는 말이며, 이런 자세(단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학생의 자세가 아니라 숙고하고 탐구하며 배우는 학생의 자세)에서만 가르치거나 배우는 과정에서 배운/이해한 것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추가로 이해되며, 접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 잘 이해된다.
참고 법문: https://youtu.be/Ipk2PUdXG74 (How to manage your ego)
2022/05/19(목)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사람이 사는 최종 목적이 열반이라고 하면 동의하지 못할 것이지만, 최종 목적이 행복이라고 하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유사) 행복과 올바른(참된) 행복이 있다.
잘못된(유사) 행복은 들러붙음에 따라 생기는 짜증/골치아픔(vexation)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즐거움/안도감이며, 불행의 근본원인을 문제삼지 않고(사성제를 모르는 또는 사성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아윗자-’로) 해결된 일시적 행복이다.
올바른(참된) 행복은 들러붙음이 없는 상태, 즉 열반이며, 불행의 근본원인을 문제삼아(사성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윗자’로) 해결된 영구적 행복이다.
2022/05/20(금)
괴로움을 괴로운 느낌으로 한정해도 세상/세상것에 대한 갈애/갈망(들러붙음)은 문제다. 왜 그런가?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갈애/갈망(들러붙음)이 있더라도 그것이 충족되는 조건이 되면 즐겁거나 평온한 느낌이 생기므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세상/세상것은 아닛짜 특성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때가 오기 때문이다.
<보충 설명>
누구도 괴로운 느낌을 좋아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괴로운 느낌이 없어지기를 바라지만, 그 느낌을 받아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된다.
상카라 둑카로 그 느낌을 없애는 노력도 할 수 없으므로 가장 난감하고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며 비참한 때가 사악처에 떨어졌을 때인데, 사악처 중에서도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것을 붓다께서 묘사하신 것을 보면 전율하게 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보통 사람은 담마를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무시하거나 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오늘도 육문으로 입력되는 감각대상에 들러 붙어 윤회를 계속하며 그것을 강화시키는 행을 계속하게 된다.
특히, 현대의 대부분 지식인들(불자 포함)은 예전의 필자와 마찬가지로 사악처(특히 지옥)를 포함하는 31존재계를 지어낸 이야기로 알고 있으며, 불자라고 하면서 현대의 물질과학 이론(특히 유물론 : 물질에서 정신이 유래하며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등의 이론)에 따라 붓다 담마를 왜곡시키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연기를 오해하고 윤회가 없다고 말하는 자칭 불자가 대표적이다.
현대과학에서 붓다 담마를 확인/입증하여 주는 고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부분도 있으나, 붓다 담마(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인해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
2022/05/21(토)
부처님의 세계관을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세상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누구이고 세상이 무엇인지는 올바른 견해에 대한 것이므로 수행에 의해 확립되는 것(바와나 빠하땁바)이 아니고 성자로부터 올바른 법문을 듣는 닷사네나 빠하땁바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며, 열반을 향한 길에서 가장 먼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2022/05/22(일)
도덕적(선한)/비도덕적(불선한) 행의 최종 심판자와 집행자는 인위법(또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법(또는 담마/연기법)이다.
즉, 세상의 모든 행에는 자연법(담마/연기법)에 따른 결과 또는 과보가 있다.
이 자연법(담마/연기법)을 배우고 그에 따라 실천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법(연기법)에서 벗어난 상태(연기하지 않는 담마, 즉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불교다.
참고 사항:
세상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윤회하게 하는)는 연기가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고,
세상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 연기가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인데,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사성제를 깨달은 최소한 수다원 도의 성자 이상에게만 일어나는 연기다.
약 1500년 이상 동안, 붓다 담마의 왜곡으로 인해 이 ‘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불교에서 감추어져 있다가, 최근에 자띠 소따빤나(와하라까 테로)의 출현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2022/05/24(화)
재가자가 지계와 관련하여 5계만 잘 지켜도 도과에 이를 수 있다는 것(물론, 다른 요건이 필요함)은 오계에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오계는 결국 다사 아꾸살라(10가지 불선행)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오계의 깊은 의미에 대한 구체적 인용 설명>
5계 중의 세 번째 계인 ‘성적 비행(잘못된 성행위)을 피하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감각적 즐거움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말라’는 것이며, 사실 이 계에는 과도한 음주, 도박 등이 포함된다(‘까메수 밋짜짜라 ~’의 참된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음).
5계 중의 네 번째 계인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에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칠 거친 말, 중상 모략, 잡담(쓸데없는 말)을 포함하여 자기 말의 모든 남용이 포함된다.
5계 중의 마지막 계인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것은 ‘술, 마약, 돈, 힘(권력) 등 [빚갚는 것]을 미루게 하는 것에 취하는(중독되는) 마음가짐(심적 경향)을 피하라’는 것이다(‘수라메라야 맛짜빠마 닷타나~’의 참된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음).
(https://puredhamma.kr/the-five-precepts-what-the-b 참조).
2022/05/26(목)
사실이 아닌 것, 또는 죄없는 사람을 자신의 이득과 욕망 때문에 중상 모략하는 자의 말을 믿고 동조하며 그와 동일한 중상 모략을 하는 자의 언행의 업 씨앗 및 과보의 크기는 그 자신의 언행시의 산가띠(sangati)의 마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모르고 그랬다고 해서 업 씨앗 및 과보의 크기가 줄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추가 설명>
사실이 아닌 줄 알았다면, 죄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또는 중상 모략하는 자의 말인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아무리 변명해도 업 씨앗과 그 과보의 크기가 줄어들 수는 없으며 그 변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행한 것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 업 씨앗의 과보를 받아 괴롭게 되더라도 더 진전되어 열매맺지 않도록 자신의 나쁜 마음성향, 즉 나쁜 가띠(산가띠, 탐진치가 지배하는 가띠)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명하며 그 중상 모략한 사람 때문이라며 탓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되며 과보가 더 진전되어 열매맺게 하는 마음이 작용하는 것인데, 항상 남을 탓하며 변명하는 보통 사람들은 과보를 받을 때 그 열매맺음(바와의 형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열매맺는 마음이 (자신의 마음 성향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항상 외부 대상을 바꾸려고 하는 산가띠(sangati)가 작용하는 마음이다.
(참고 포스트: ‘과보를 받는 것과 과보로 열매맺는 것의 차이와 그 관계’,
https://cafe.naver.com/puredhamma/1328 또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361304396 )
2022/05/27(금)
연기 사이클(아꾸살라물라 연기 및 꾸살라물라 연기)이 시작되어 중간에 멈추는 경우는 없다.
즉, 아꾸살라물라 연기에서 중간에 팟사(삼팟사)단계에서 멈추거나, 땅하- 단계에서 멈추거나, 우빠다나 단계에서 멈추는 경우는 없으며, 사람들이 12연기 사이클의 중간 단계에서 멈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순간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이클이 끝까지 진행된 후에 다른 새로운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시작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2022/05/28(토)
아윗자-(또는 모하)로 시작되는 아꾸살라물라 연기(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12연기)는 순간적으로 수없이 많이 진행되며 언제나 늙음과 죽음/슬픔/비탄/고통/비참함/절망 단계로 끝나고, 꾸살라물라로 시작되는 꾸살라물라 연기(현재 대부분의 불교 가르침에서 언급하지 않으며, 유학 성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연기)는 순간적으로 수없이 많이 진행되며 언제나 늙음과 죽음 단계로 끝난다.
꾸살라물라 연기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kusala-mula-paticca-samuppada
2022/05/29(일)
범부 중생이나 성자(아라한 포함)들에게 모두 일어나는 ‘위빠-까 윈냐-나와 관련한 아브야-까따 연기(과보 연기)’는 범부 중생과 유학 성자들에게 아꾸살라물라 연기나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기 전단계에서 일어난다.
무학 성자(아라한)들에게는 아브야-까따 연기(과보 연기)만 일어나며, 아꾸살라물라 연기나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브야-까따 연기는 일반적으로 빠띳짜 사뭅빠-다(연기)라고 말하지 않으며, 붓다 담마에서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연기가 아니며, 붓다 담마에서 문제되고 해결해야 할 연기는 찟따 위티(인식과정)의 자와나로 형성되는 아꾸살라물라 연기 및 꾸살라물라 연기다.
아브야-까따 연기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avyakata-paticca-samuppada-for
2022/05/30(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무관심하고 무덤덤하거나 다른 사람(싫어하는 사람)의 그 불행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불행에 무관심하고 무덤덤하거나 자신의 불행을 좋아하는 무지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충 설명>
그 이유는 자신도 그 사람과 동일하게 윤회하며 살아가며 동일한 유형의 불행을 겪게 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며 어떻게 윤회하며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게 되는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며, 이는 곧 사성제/삼특상/연기를 전혀 모르거나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무지 때문이다.
2022/05/31(화)
타인이나 자신의 불행에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것은 무지가 작용하기만 하는 해로운 행의 업씨앗을 생성하는 것이지만, 타인이나 자신의 불행을 좋아하는 것은 그 무지에 탐함이나 성냄이 작용하여 더욱 해로운 행의 업씨앗을 생성하는 것이다.
참된 붓다 담마를 모르고 보통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 해로운 행의 업씨앗을 많이 생성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대상에 무관심하고 무덤덤해도 첫 번째 해로운 행의 업씨앗을 생성하는 것임을 자신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