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년 4월 한두줄 메모장 글 모음
2022/04/01(금)
불교가 그외 모든 종교와 가장 큰 차이는 불교에서 세상의 특성이 무아(no-self)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특성이 아낫따(anatta)라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특성이 아낫따(anatta)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궁극적 행복(앗따 상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들러붙음(갈애)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이 갈애가 뿌리까지 완전히 없으면 그 유정체에게는 더 이상 세상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것이 세상에서 벗어난 궁극적 행복(앗따 상태)이다.
2022/04/02(토)
붓다 담마에서는 세상의 특성은 아닛짜, 둑카, 아낫따이므로, 세상에서는 행복이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붓다 담마는 범부 중생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며, 이해하기 어렵기에 정토 세상을 설정하는 등으로 붓다 담마가 세속화되기가 쉽게 되고 범부 중생들에 의해 오염되기가 쉽고, 오염된 붓다 담마를 범부 중생들이 이해하기 쉬우므로 더욱 널리 퍼져 붓다 담마가 사라지게 된다.
2022/04/03(일)
붓다 담마는 현명한 자를 위한 가르침이지, 어리석은 자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현명한 자란 선처로 향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자고, 어리석은 자는 악처로 향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자다. 즉, 기본적으로 윤회를 믿고 선처로 가기 위해 노력하기에 업과 과보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내생이 없으므로 죽고 나면 끝이므로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자나, 무아이므로 내가 없으므로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2022/04/04(월)
붓다 담마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은 붓다 담마를 공부하거나 공부한 것을 되새겨 숙고하기 위한 것(결국 사성제를 숙고하여 깨닫기 위한 것)이지, 그 고요함을 즐기고 그것에 머무르기 위한 것(다른 대상이 일어나지 않게 호흡 등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고요함을 즐기는 수행(선정을 즐기는 수행)이 되었을 때 그것을 선정 수행에 중독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붓다 담마에 따라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에서 벗어난 수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담마를 듣는 것, 즉 ‘닷사네나 빠하땁바’가 우선이며, 이 닷사네나 빠하땁바를 위한 행위가 우선이다.
2022/04/05(화)
<세상/세상것이 모두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다면 모두 유지할(살) 필요도 없는가?>
마음이 열반을 향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특성(띨락카나)을 통해 세상/세상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가 살기 위해 필요한 세상/세상것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어 유지할 가치가 없고 들러붙어 유지할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22/04/06(수)
세상/세상것에 들러붙지 않고 해야할 일과 필요한 일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열반을 향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세상을 살아갈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상/세상것에 완전히 들러붙지 않는 상태(아라한)에 이르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위해 해야할 일도 없고 필요한 일도 없으므로 가치와 의미 등으로 인한 모든 정신적 괴로운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2022/04/07(목)
<10가지 불선한 행의 4가지 형태>
불자들이 하지 말아야 10가지 불선한 행(다사 아꾸살라)의 첫번째가 살생이고 마지막이 잘못된 견해(밋차- 딧티)다.
이 ‘살생 ~ 잘못된 견해’에는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하거나 가지는 것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그것들을 하거나 가지도록 하고, 다른 이가 그것들을 하거나 가지도록 돕고, 다른 이가 그것들을 하거나 가지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포함된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거나 가지는 ‘쓸데없는 말’이나 ‘잘못된 견해’를 다른 이가 하거나 가지도록 시키거나, 다른 이가 하거나 가지도록 돕거나, 다른 이가 가지거나
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2022/04/08(금)
<선행을 하면서 불선행을 하거나 불선행을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경우>
선행을 하면서 불선행을 하거나 불선행을 하면서 선행을 해도, 선행이 불선행이 되거나 불선행이 선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은 그 선행에 따른 업씨앗이 생기는 선행이고 불선행은 그 불선행에 따른 업씨앗이 생기는 불선행이다.
사람을 살리거나 먹여 살리기 위해 동물을 죽이거나 해치는 경우(인간을 위해서는 동물을 죽여도 좋다는 종교 등의 행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경우(전쟁 등의 경우), 또는 동물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는 경우(극단적 동물보호주의자 등의 행), 어떤 동물을 살리기 위해 어떤 동물을 해치거나 죽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2022/04/09(토)
<선행을 하면서 불선행을 하거나 불선행을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것을 선택받아야 할 경우>
선행을 하면서 불선행을 하거나 불선행을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것을 선택받아야 할 경우에는, 그 선행 또는 불선행으로 인한 업씨앗의 무게를 잘 알고 선택하여 행해야 하지만, 범부 중생들, 특히 붓다 담마를 접하지 못한 범부 중생들은 쉽지 않을 것이며, 담마에 따른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에 따라 이성/논리적 판단 또는 그 때의 감정에 따라 행하게 된다.
유학성자에 이르면 가띠(성향)의 변화로 인해 어떤 불선행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상황)에도 그 불선행을 행하지 않게 되며, 무학성자에 이르면 가띠(성향)가 완전히 제거되었으므로 모든 불선행/선행에 대해서 어떤 경우(상황)에도 그 불선행/선행을 행하지 않게 되며 자동적으로 끼리야 행(업 씨앗이 생기지 않는 찟따에 의한 행)을 하게 된다.
2022/04/10(일)
<선행이면서 불선행도 되는 행위를 할 때 행위 대상에 따른 업씨앗의 무게>
선행이면서 불선행도 되는 행위를 할 때 업씨앗의 무게를 가늠할 때, 가장 중요하고 조심해야 하는 경우가 그 행위 대상이 사람일 때다.
업 씨앗의 무게는 행위 대상의 마음 성향(가띠)에 따라서도 정해지게 되는데, 동물일 경우에는 동물로서 태어날 때 가지는 그 동물의 기본 가띠를 넘어선 변화가 그 동물에게 있을 수 없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그 사람의 기본 가띠 외에 길러진 일반적 가띠와 세간 수행 또는 출세간 수행에 따라 크게 변화된 가띠 레벨 및 자신과의 인간관계 빚(예를 들어, 낳아준 부모님의 은혜)에 따라 그 반작용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무게의 업씨앗을 만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성향(가띠)의 사람인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외에는 어느 누구도 대상이 되는 사람의 마음성향(가띠) 레벨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므로, 모든 사람을 기본적으로 자애의 마음으로 대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유정체(중생)에게도 자애의 마음으로 대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22/04/11(월)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아라한의 마음성향이 되는 지혜가 일어나 제4성제(도성제)가 완성되어 세상/세상것에 대한 들러붙음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세상/세상것의 특성을 마음깊이 이해하여 자연적으로 세상/세상것의 무가치함과 위험함이 인식되어 연기(아꾸살라물라 연기 및 꾸살라물라 연기)가 작동하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말한다.
이것은 또한, (빠쩨까 붓다와 같이) 말로써 표현하여 전달할 수는 없어도 틸락카나와 연기도 완전히 이해하여 그에 따라 사성제가 완전히 이해되어 끼리야 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 꾸살라물라 연기는 유학성자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연기고, 빠쩨까 붓다는 삼마삼붓다의 가르침으로 전달되는 참된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만, 즉 현재 지구에서는 약 2500년 후에만 출현할 수 있는 붓다임.)
2022/04/12(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한 행위의 우선 순위>
괴로움의 소멸(닙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올바른 담마를 듣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견해의 확립), 자신의 욕망을 줄이는 것을 1차로 생각하여 행하고, 다른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2차로 생각하여 행하며, 다른 이들이 욕망을 줄이도록 도와주는 것을 3차로 생각하여 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우선 순위를 망각하고 행할 때, 특히 재가자들에게는 재가생활에 있어서 자신과 타인에게 여러가지 문제와 장애가 생기게 된다.
(물론, 여기서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은 사악처에 태어나게 하는 레벨의 욕망은 제외되며, 욕망을 줄인다는 것은 사악처에 태어나게 하는 레벨의 욕망을 우선적으로 줄인다는 것을 말한다.)
2022/04/13(수)
<불선행과 위선행과 선행>
불선행(bad deed)을 하는 것보다 불선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 것이고,
선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위선행(hypocrisy)이라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위선행이 불선행을 하는(또는 불선행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위선행이 아니라 불선행이며, 위선행은 열반으로 향하는 선행이 될 수는 없다.
위선행을 하는 것보다 선행(good deed)를 하는 것이 당연히 좋은 것이며, 위선행은 참된 선행이 아니며, 말 그대로 선행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의 행일 뿐이며, 그렇다고 하여 이 목적의 위선행이 불선행은 아닌 것이므로 ‘위선행을 하지 말라’고 강조할 것은 못된다. (선행을 강조하여, ‘위선행을 하지말고 선행을 하라’는 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위선행을 한다고 비난하며 강조하는 행은 불선행임을 알 필요가 있다.)
2022/04/15(금)
토론의 목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이 토론이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고 이기는 목적을 위한 것이 될 때, 그 토론은 그 목적의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없으며 그 당사자에게는 해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토론의 주제보다 토론의 목적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를 생각하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바람직한 방향은 우선 악처에서 벗어나 선처에 태어나게 하는 방향이며, 범부중생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한 먼 이야기이지만 더 나아가 선처에서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방향이다.
2022/04/16(토)
<붓다 담마에서 세상이 생겼다는 것>
붓다 담마에서 세상이 생겼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 세상이 생겼다(윤회 세상의 생성)는 것이다.
내부 세상이 생겼다는 것은 괴로움(숨겨진/미래 괴로움, 업 씨앗)이 생겼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생겼다는 것은 세상(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에 대한 들러붙음(땅하-, 갈애/갈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들러붙음이 생겼다는 것은 무지(아윗자- 또는 모하)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무지가 작용한다는 것은 12연기 사이클(아꾸살라물라 연기)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붓다 담마에서 분류하는 세상/세계에 대해서는 도표 ‘https://cafe.naver.com/puredhamma/11 -마노마야까야에 따른 분류’, 및 ‘https://cafe.naver.com/puredhamma/7 -물질과 비물질에 따른 분류’를 참조.).
(‘세상-로까’와 ‘괴로움-둑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및 https://puredhamma.kr/future-suffering-starts-with-s 을 참조.).
2022/04/17(일)
<붓다 담마에서 세상이 그쳤다는 것>
붓다 담마에서 세상이 그쳤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 세상이 그쳤다(윤회 세상의 생성이 그침)는 것이다.
내부 세상이 그쳤다는 것은 괴로움(숨겨진/미래 괴로움, 업 씨앗)이 그쳤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그쳤다는 것은 세상(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에 대한 들러붙음(땅하-, 갈애/갈망)이 그쳤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들러붙음이 그쳤다는 것은 무지(아윗자- 또는 모하)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지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12연기 사이클(아꾸살라물라 연기)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 담마에서 분류하는 세상/세계에 대해서는 도표 ‘https://cafe.naver.com/puredhamma/11 -마노마야까야에 따른 분류’, 및 ‘https://cafe.naver.com/puredhamma/7 -물질과 비물질에 따른 분류’를 참조.).
(‘세상-로까’와 ‘괴로움-둑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및 https://puredhamma.kr/future-suffering-starts-with-s 을 참조.).
2022/04/18(월)
감각적 즐거움과, 감각적 욕망(까-마,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갈애/들러붙음)이 있다.
세상/세상것과, 세상/세상것에 대한 정신적 인상과, 세상/세상것에 대한 정신적 인상에 대한 갈망/갈애/들러붙음이 있다.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이 있다.
정신적 인상은 가띠(성향)에 의해 형성되며, 이 가띠에 탐진치의 잠재성향(아누사야)이 있으며, 이 탐진치의 잠재성향(아누사야)이 탐진치의 번뇌(아사와)로 나타난다.
2022/04/19(화)
(2022/04/18 한두줄 메모장과 관련하여)
참된 붓다 담마에 따른 수행은 감각적 욕망(까-마,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갈애/들러붙음)을 줄이고, 세상/세상것에 대한 정신적 인상에 대한 갈망/갈애/들러붙음을 줄이며,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을 줄여,
정신적 인상을 형성하는 가띠(성향)에 내포된 탐진치의 잠재성향(아누사야)를 줄이고 제거하여 탐진치의 번뇌가 영구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과, 세상/세상것과,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에 괴로움/고통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문제삼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2022/04/20(수)
들러붙지 않는다(갈애/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세상/세상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들러붙지 않으면서(갈애/갈망하지 않으면서) 세상/세상것에 관심을 가지고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들러붙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범부 중생들로서는 불가능하다. 범부 중생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들러붙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들러붙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유학 성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에 따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부 중생들은 들러붙지 않고 행하려는 수행(사마타 수행 또는 잘못된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고 하지 말고, 우선 올바른 담마를 듣고 최소한 수다원의 도에 이르러 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일어날 수 있는 단계, 즉 올바른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는 단계가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 널리 알려진 전통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청정도론에 따라 삼장을 해석하고 수행했기 때문에 ‘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22/04/21(목)
<범부 중생들과 성자들이 세상/세상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의 차이>
범부 중생들(삿따 또는 뿌툿자나)이 세상/세상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바람/원함/기대를 충족시키는 것과 관련이 없기에 무관심하다는 것이고,
성자들(뿍갈라 또는 아리야 뿍갈라)이 세상/세상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신 또는 다른 이들의 바람/원함/기대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과 관련이 없기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2022/04/22(금)
세상에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도덕적이 되도록 강제할 수는 없으며, 단지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부도덕한 것인지 지적할 수는 있다. ‘무엇을 심고 거둘 것인가’를 결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붓다 담마에서, 도덕적인 것은 다사 꾸살라행(열가지 선행)이고, 부도덕한 것은 다사 아꾸살라행(열가지 불선행)이며, 세간 10가지 정견에 따라 다사 꾸살라행을 하는 것이 세간 팔정도이고, 출세간 정견에 따라 다사 꾸살라행을 하는 것이 출세간 팔정도다.
참고 포스트: https://puredhamma.kr/is-eating-meat-an-akusala-k 및 https://puredhamma.kr/ten-immoral-actions-dasa-a
2022/04/23(토)
실재(빠라맛타 담마)와 개념(빤냣띠)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세상을 이루는 실재(루빠, 찟따, 쩨따시까)는 실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세상을 이루는 개념(자아 개념, 공동체 개념, 국가 개념 등)은 가상으로 형성되거나 가상으로 영원한 것이다.
하지만, 실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실재나 가상으로 형성되거나 가상으로 영원한 개념에 대한 ‘기록(나마곳따)’은 세상의 정신계에 영원히 남아 있다.
열반(닙바-나)인 실재(빠라맛따 담마)는 세상이 아닌(세상과 배타적인) 실상으로 영원한 것이다.
2022/04/24(일)
실재(빠라맛타 담마)는 개념(빤냣띠)을 통해 드러난다.
개념에는 의사소통과 이해를 위해 실재(빠라맛타 담마)를 기술하는 개념과, 개념을 기술하는 개념이 있으며, 개념이 없이는 우리는 실재(빠라맛타 담마)를 이해/인식할 수 없다.
이 개념/개념화는 ‘산냐-’라는 실재의 기능/작용/특성이며, ‘산냐-’를 통해 견해가 확립된다.
물론, 견해에는 열반에 이르게 하는 올바른 견해과 윤회를 계속되게 하는 그릇된 견해가 있다.
2022/04/25(월)
외부 대상의 특성은 그 외부 대상이 빠라맛타 담마의 특성이라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인식하는 특성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빠라맛타 담마의 특성이 아닌 대상의 ‘아름다운/추한’, ‘높은/낮은’, ‘긴/짧은’, ‘고귀한/천한’, ‘부유한/가난한’ 등의 특성은 산냐-에 의한 개념화의 특성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띨락카나에 속하는 아닛짜 산냐, 아낫따 산냐 등도 이 개념화의 특성이며, 빠라맛타 담마에 속하는 산냐에 의한 개념화가 없으면 빠라맛타 담마는 물론이고 빤냣띠도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고, 붓다 담마를 배우거나 실천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열반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22/04/26(화)
<닙바-나에는 더 이상 세상이 되는(일어나는) 조건이 없다>
불교에서 최상의 행복인 결과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의 결과, 즉 닙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이 최상의 결과는 한 유정체(생명흐름)에서 아윗자가 완전히 소멸됨에 따라 욕망/갈망/갈애(들러붙음)의 완전한 소멸의 조건에 따라 달성된다.
이 닙바-나(열반)라는 결과에서는 세상 법칙에 따르는 결과(과보)의 조건이 더 이상 없으므로 세상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이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며, 더 이상 세상에 태어남이 없다.
(세상 법칙에 따르는 결과(과보)의 조건이 아윗자(무지)와 땅하(갈애)이며, 이 아윗자와 땅하가 한 유정체(한 생명 흐름)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이 열반의 결과가 되는 조건인 것이며, 더 이상 세상이 되는 조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닙바-나에는 더 이상 세상이 되는(일어나는) 조건이 없다.)
2022/04/27(수)
사람들(삿따 또는 뿌툿자나, 범부 중생)은 조건지어진 상태의 결과, 즉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일어남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는 것을 모르며, 이 때문에 제1성제를 이해하지 못하며, 괴로움이 세상이라는 것을 모르며 괴롭지 않은(둑카가 없는) 세상이 있다고/있을 것이라고 계속 망상을 하게 된다.
(‘세상-로까’와 ‘괴로움-둑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및 https://puredhamma.kr/future-suffering-starts-with-s 을 참조.).
2022/04/28(목)
사람들(삿따 또는 뿌툿자나, 범부 중생)은 붓다 담마를 공부/수행한다고 해도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세상에 계속 있기를(윤회하기를) 구하지, 참으로 열반을 구하지는 않는다(어떤 경우에는 세상/윤회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며, 이것이 아윗자-다. 이런 범부 중생에게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으며 열반을 향한 수행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로까’와 ‘괴로움-둑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및 https://puredhamma.kr/future-suffering-starts-with-s 을 참조.).
[참고 추가글]
자신이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했는지(최소한 수다원의 도에 이르렀는지)는 사성제 문구와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본문에서와 같이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가로 간단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세상것에 들러붙는가 들러붙지 않는가는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가와는 또 다른 것이며, 이 들러붙음의 정도 문제는 도과의 레벨에 따라 다릅니다.
댓글)
참고 추가글에서 오해할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단멸론자는 되는 대로 살아있는 동안 즐기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하며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결국,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려워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세상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따라 사성제의 문구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는(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단멸론자의 두려움없음과 성자의 두려움없음은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2022/04/30(토)
불교는 포기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세상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것에 관한 것이다.
불교는 세상/세상것을 갈망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세상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깨달아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자연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그 단계에 따라 포기할 것이 없게 되어 자연적으로 세상/세상것을 갈망하지 않게 된다.
세상/세상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포기하려고 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 법문: https://youtu.be/rW5n9xKxuV8 (Buddhism is not about letting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