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자신이 그 여부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
깨달음과, 자신이 그 여부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
이 포스트는 2022/04/28 한두줄 메모장의 글( https://blog.naver.com/hojanyun/222713962885 )을 깨달음과 관련하여 정리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도과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 ( https://blog.naver.com/hojanyun/222537378619 )이라는 한두줄 메모장의 글에서, 깨달음은 “삼법인을 깨닫고 사성제 또는 연기를 이해하여, 마음이 열반으로 향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했고, 더욱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은 ‘도과(8 유형)에 이르는 것’, 즉 ‘도과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열반을 향한다는 것과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https://blog.naver.com/hojanyun/222639302258 을 참조하세요.
그러면, 자신이 도과를 성취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즉, 자신이 최소한 수다원도에 이르렀는지(성자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퓨어 담마의 ‘세 단계 실천’ 섹션의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 서브섹션을 통해(하나의 포스트로는,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자신이 수다원에 이르렀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아래 한두줄 메모장의 글(2022/04/28)에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에서 ‘꾸살라 물라 연기’는 범부 중생에게는 일어날 수 없고 성자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연기이며, 그 연기가 어떤 연기인지는 https://puredhamma.kr/kusala-mula-paticca-samuppada 에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지만, 재작성 개정된 것은 ‘Kusala-mūla Paṭicca Samuppāda’에서 원문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뿐냐 깜마(및 뿐냐비 상카라)와 꾸살라 깜마(및 꾸살라 물라 상카라) 사이의 차이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https://puredhamma.kr/kusala-mula-sankhara-are-neede 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 래-
사람들(삿따 또는 뿌툿자나, 범부 중생)은 붓다 담마를 공부/수행한다고 해도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세상에 계속 있기를(윤회하기를) 구하지, 참으로 열반을 구하지는 않는다(어떤 경우에는 세상/윤회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며, 이것이 아윗자-다. 이런 범부 중생에게 ‘꾸살라 물라 연기’가 일어날 수 없으며 열반을 향한 수행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로까’와 ‘괴로움-둑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ttps://puredhamma.kr/what-did-the-buddha-mean-by-l 및 https://puredhamma.kr/future-suffering-starts-with-s 을 참조.).
[참고 추가글]
자신이 사성제를 참으로 이해했는지(최소한 수다원의 도에 이르렀는지)는 사성제 문구와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본문에서와 같이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가로 간단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세상것에 들러붙는가 들러붙지 않는가는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가와는 또 다른 것이며, 이 들러붙음의 정도 문제는 도과의 레벨에 따라 다릅니다.
참고 추가글에서 오해할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단멸론자는 되는 대로 살아있는 동안 즐기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하며 세상에서 사라지는(없어지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결국,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려워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세상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따라 사성제의 문구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는(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단멸론자의 두려움없음과 성자의 두려움없음은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