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환상의 세상과 실제의 세상)과 해탈과 완전한 열반(빠리닙바나)
세상(환상의 세상과 실제의 세상)과 해탈과 완전한 열반(빠리닙바나)
세상에 얽매인 상태에서도 행위에는 자유가 있으며, 이 자유는 자신이 다사 꾸살라행(10가지 선행)과 다사 아꾸살라행(10가지 불선행)을 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기에 세상의 업과 과보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유이며, 그래서 세상에 얽매인 상태가 되며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세상에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는 해탈이라고 하며, 겉으로 보기에 다사 꾸살라행과 유사하지만 과보가 생기지 않으므로 세상의 업과 과보의 법칙에서 벗어난 자유이며,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자유이며, 현생의 마지막에 빠리닙바나에 들 수 있는 해탈이라는 자유다.
세상 모든 것은 연기법(빠띳자 사뭅빠-다)에 따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원래 존재하거나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은 연기하는 것이며, 연기하는 것은 세상의 특성, 즉 아닛짜, 둑카, 아낫따 특성을 지닌다.
연기한다는 것은 아윗자로 인한 갈애(갈망)이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아윗자로 인한 갈애(갈망)가 있는 한, 연기하며 세상이 형성되면서 윤회한다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연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붓다 담마(불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떤 특성을 지닌 곳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고(삼특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수행을 통해 세상에서 벗어나는(세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결국 반열반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세상은 없고 환상이라는 것)은 10가지 사견 중에 속한다.
즉, 어리석은 자가 인식하는 환상의 세상과, 지혜로운 자(성자)가 인식하는 실제의 세상과, (지혜로운 자가 추구하여 이르는) 세상이 아닌 열반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환상의 세상과 실제의 세상이 있다.
환상의 세상은 각자의 무지와 갈망에 따라 마음에서 형성된 세상이며, 이로서 범부 중생들에 의해 잇짜/숙카/앗따 특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세상이다..
실제의 세상은 아닛짜 특성으로 인해, 각자의 무지와 갈망에 따라 둑카 특성과 아낫따 특성이 되며, 범부 중생들은 그 무지와 갈망으로 인해 이 아닛짜 특성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 실제의 세상이 둑카가 되고 아낫따가 된다.
(여기서, 아닛짜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둑카는 숨겨진 괴로움을 포함하는 의미고, 아낫따는 실속없음/결실없음/난감함 등을 의미한다.)
환상의 세상(잇짜, 수카, 앗따 특성이 있다고 간주된 세상)에서 벗어난 상태가 실제의 세상(아닛짜, 둑카, 아낫따 특성의 세상)이고, 이 아닛짜/둑카/아낫따의 특성을 지닌 실제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반열반(빠리닙바나/완전한 열반) 상태다.
이 환상의 세상에 언제까지나 머무는 자가 범부 중생이고, 마음이 열반을 향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의 세상을 깨닫고 이 실제의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유학 성자(수다원/사다함/아나함)고, 이 실제의 세상을 형성하는 원인/근본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실제의 세상에서 해탈함으로써 빠리닙바나(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자가 무학 성자(아라한)며, 빠리닙바나인 반열반(완전한 열반)은 범부 중생과 유학 성자와 무학 성자가 있는 세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