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담마와 열반, 그리고 이를 경험하는 성자
붓다 담마와 열반, 그리고 이를 경험하는 성자
붓다 담마는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지혜가 성숙하게 됨에 따라 서서히 명확하게 되는 것이지,
마음이 심하게 오염되고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자에게도 갑자기 전광석화와 같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붓다 담마가 명확하게 된다는 것은 열반이 명확하게 되는 것과 같다.
붓다 담마는 윤회를 지속하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열반을 목표로 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목표와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최소한 수다원 도(열반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을 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항상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세상의 여러가지 가르침에 따른 환상이나 신기루를 쫓아갈 가능성이 있다.
열반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도 전혀 보지 못한 상태가 범부 중생이며 그 열반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을 따라 갈 수 있게 되어(흐름에 든 자) 계속 가게 됨에 따라 열반에 더욱 가까워지면서 모든 붓다 담마가 더욱 명확하게 되며 열반이 더 명확하게 보이게 된다.
그 열반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강하게 되는 것이, 출세간 팔정도를 따라 가는 길이며, 아라한과 단계에서 이 세상에서 유여열반을 경험하는 해야 할 일을 해 마치게 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멸진정 상태(일시적)와 무여열반 상태(영구적)는 열반을 경험하는 상태가 아니라, 열반 그 자체(열반을 경험하는 ‘출세간(로꿋따라) 찟따’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다
성자들의 각 단계에서 경험하는 열반은 그 질이 모두 다르다.
성자들은 동일한 열반을 경험하지만, 그 열반 상태에 가까이 다가간 정도에 따라 그 빛의 세기와 명확도 면에서 그 열반을 경험하는 인식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 성자가 열반을 경험하는 그 막가 팔라 찟따의 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각 성자는 모두 열반을 경험한다고 하고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왜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지 못하는가는 그 근접 정도에 따라 열반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에 따른 인식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소멸되는 번뇌가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을 경험하더라도 10가지 족쇄가 단계적으로 풀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일한 열반이 각 성자의 단계에 따라 명확하게 되는 정도가 각 성자가 경험하는 열반인 것이다.
이것을 각 성자의 열반이라고 하며, 수다원의 열반, 사다함의 열반, 아나함의 열반, 아라한의 열반이라고 하며, 하나의 동일한 열반을 경험하는 정도에 따른 상이한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은 소멸되는 번뇌(풀리는 족쇄)에 따라 동일한 열반을 경험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게 구분되는 것과 같다.
각 단계의 열반은 각 성자에 따라 어떤 번뇌(의 뿌리)의 영구적 소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열반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담마)의 한 유형이다.
아비담마를 공부한 사람들은 잘 알다시피, 네 가지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담마)는 찟따, 쩨따시까, 루빠, 및 닙바-나(열반)다.
찟따, 쩨따시까, 루빠는 세상에 속하고 세상을 이루는 조건화된(형성된) 담마고, 닙바-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조건화되지 않은(형성되지 않은) 담마다.
즉, 열반은 세상에 속하는 어떤 담마를 형성함에 따라 형성되는(조건화된) 상태가 아니라, 각 유정체에서 세상의 어떤 것(근본 원인)이 근본적으로 소멸(뿌리가 뽑힘)됨에 따라 도달되는(형성되지 않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