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냄-1
(담마와나 선원 밴드의 업로드 글 첫번째입니다.)
<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냄-1>
나모 붓다야, 나모 담마야, 나모 상가야.
아닛짜, 둑카, 아낫따.
둑카 삿짜, 사무다야 삿짜, 니로다 삿짜, 막가 삿짜.
6/16 pure dhamma 교재로서 간답바(gandhabba)에 대한 포스트를 올리고 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요즘 저가 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오해가 없도록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합니다.
재가자와 관련된 교단 이사회 및 임원 구성에 대한 스님들과의 의견 차이는 저에게 큰 문제가 아니며, 스님들의 뜻대로 정관을 고치는 것에도 동의했고 임시총회의 최종 의결을 위한 마무리 초안을 잡아드리면서 저가 임시이사회의 임시임원으로서 해 드려야 할 일을 해 마쳤으며, 오히려 저는 이제 홀가분합니다
(붓다의 날에 교단 임시총회가 열리지 못한 것은 저 때문이 아니라 사무국장님의 예기치 못한 가정일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 붓다의 날 법회를 포함하여 요즘 법회에 불참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붓다 담마에서 가장 중요하고 듣고 숙고하고 파악해야 하고 이에 따라 바르게 수행해야 할 정견의 문제 때문입니다.
현재 청정도론을 부동의 준거로 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테라와다불교와 가장 크게 상충되는 부분인 이 간답바(gandhabba) 부분만이라도,
상가 스님들이 pure dhamma를 자세히 검토하고 입장표명이 없는 한, 저는 현재 한국테라와불교 상가의 어떤 스님의 법문에 대해서도 의례적인 사두를 말할 수 없습니다.
입장표명에 따라 앞으로 저의 방향과 처신이 확실하게 다를 것입니다.
입장표명이 없는 한, 현재 저의 처신과 같은 상태로 법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도와 과에 이르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정견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저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상가는 ‘붓다의 바른 가르침에 따르는 출가자의 모임’을 말하므로, 바른 가르침이 아닌 왜곡된 가르침에 따르는 출가자의 모임은 당연히 ‘진정한 상가’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경전에 따르면 열가지 그릇된 견해 중의 하나가 ‘간답바 또는 그 세계(하계)에 대한 부정’입니다(참고 사항에서 인용한 10가지 그릇된 견해 중의 6번 참조).
출세간적 팔정도의 정견이 확립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세간적 팔정도의 정견에 따르는 모임만이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출가자의 모임인 ‘진정한 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답바 또는 그 세계(하계)에 대한 부정’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윤회를 인정해도 윤회의 메카니즘(연기)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도와 과에 이르는 길에 방해가 되게 하는 잘못된 견해이므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조차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간답바를 부정하는 전통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생을 제외한 세계에서 간답바를 부정하면 설명될 수 없고 모호한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간답바는 대승불교에서 왜곡하여 말하는 중유(antarā bhava)와는 다르며, 화생하지 않는 인간계와 축생계로 재생연결될 때 ‘human bhava’ 또는 ‘animal bhava'로 형성되어 재생연결의 업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되는 ‘Manomaya Kaya’입니다.
이 ‘Manomaya Kaya’에 관련된 세계가 paralowa(하계) 이며, 이 paralowa(하계)는 육도 세계 중의 인간계(입태되지 않은 인간 포함) 또는 축생계(입태되지 않은 축생 포함)에 포함되는 세계입니다.
Manomaya Kaya(간답바)는 Kammaja Kaya와 Cittaja Kaya와 Utuja Kaya로 이루어지는 Mental Body이며 이것이 바로 재생연결의 12연기에서 말하는 NamaRupa(명색)입니다.
이 Manomaya Kaya는 Karaja Kaya로 이루어지는 Physical Body(Manomaya Kaya와 연결이 없을 때 죽은 몸, 즉 통나무 같은 시체)와는 다른 몸입니다.
Physical Body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자 하는 욕계에서만 형성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형성되지 않는 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색(NamaRupa)은 인간계와 축생계의 유정체에서는 화생하는 유정체의 명색과 구분하여 ‘간답바’라고 칭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명색(NamaRupa)은 색계와 무색계에서도 형성되어 찟따 형성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미세한 루빠(fine rupa)에 속합니다.
재생연결의 12연기에서 상카라-식-명색으로 이어지는 연기와, 삶의 과정의 12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상호연기를 나마와 루빠의 관계에 따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붓다 담마가 바르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루빠(Rupa)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나오는 나마루빠(명색)가 모호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Manomaya Kaya(NamaRupa)를 무시하고 주석하는 청정도론에서는 Kaya Passaddhi나 Kaya Lahuta 등을 제따시까(Cetasika)의 무더기와 관련된 것이라고 왜곡하여 주석하고 있습니다.
선심소에 속하는 Kaya Passaddhi 등은 Manomaya Kaya와 관련된 것이 명백합니다.
Citta Passaddhi 등은 제따시까를 포함하는 찟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찟따는 삶의 과정에서 Manomaya Kaya(NamaRupa)를 토대로 하여 일어나는 순수 Nama(오염된 찟따인 윈냐나도 포함하는 말이므로 순수 찟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입니다.
dhamma와 dhammā(mano rūpa, kamma beeja), āsava와 anusaya 및 gathi도 바르게 구별하여 설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주석은 dhamma와 dhammā를 전혀 구별하여 설명하지 않으며, āsava와 anusaya도 서로 거꾸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pure dhamma에서 “What are Dhamma? – A Deeper Analysis” 및 “Gathi (Gati), Anusaya, and Āsava” 항목을 보면 그 설명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은 Manomaya Kaya(NamaRupa)를 무시하는 한편 이러한 용어의 설명에서도 니까야와 아비담마를 왜곡하여 주석하고 있습니다.
아빗짜-(로바)와 라-가, 브-야-빠-다(도사)와 빠띠가, 모하와 아윗짜-, 바와(bhava)와 자띠도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알 필요가 있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한편, ‘빛나는 마음(pabhassara citta, radiant citta, 순수 찟따)’을 주석서에서는 ‘바왕가(bhavanga citta)’라고 주석하고 있는데, 이것도 명백히 잘못된 주석입니다.
‘빛나는 마음’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순수 찟따)을 말하며, 아라한 성자가 ‘아라한 과선정(Arahant phala samapatti : Arahant phala citta 가 연속되는 상태)’에 들었을 때의 마음을 말합니다.
물론 Arahant magga citta 다음에 이어서 일어나는 Arahant phala citta도 ‘빛나는 마음’에 속합니다.
Arahant phala samapatti는 animitta, appanihita, 또는 suññata samādhi 라고도 하며, 이 상태는 마음의 흐름이 그친 nirōdha samāpatti(상수멸, 멸진정)과는 다른 상태입니다.
바왕가는 모든 유정체에서 인식과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의 기본 마음상태이며, 유정체에 따라 오염도가 서로 다른 오염된 마음일 뿐입니다.
아라한의 끼리야 마음도 오염진행 9단계 중의 ‘3단계(manasan)’에 속하는 마음이므로 ‘빛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빛나는 마음’에서 오염이 진행되어 최소한 3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는 마음이며, 마음의 오염은 실제로 4단계(hadayan)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에서 NamaRupa Pariccheda ñāṇa는 단순히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아는 지혜가 아니라 재생연결의 12연기에서 말하는 명색(NamaRupa)을 명확하게 아는 지혜를 말하며, 이 명색을 명확하게 아는 지혜가 확립되어야 견청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NamaRupa Pariccheda ñāṇa는 마음이 어떻게 물질과 연결되고 관계되어 있는가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재생연결의 12연기에서 ‘윈냐나를 조건으로 나마루빠가 연기되는 단계’와, 삶의 과정의 12연기에서 ‘윈냐나와 나마루빠의 상호연기’와 ‘윈냐나(식)가 일어나는 물질적 토대(나마루빠, 즉 간답바)’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이나 유사-위빠사나 수행으로 아무리 마음청정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 명색(NamaRupa, 나마루빠)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지혜가 일어나지 않으면 견청정이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정도론은 위빠사나 수행의 7청정도 잘못 해석하고 주석하여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에 대해 그릇된 견해로 인도하여 도와 과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첫 단계가 사견이 제거되는 ‘수다원 도와 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청정도론의 저자는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분이였습니다.
저가 청정도론의 저자를 폄하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청정도론의 싱할리본 후기에 명백하게 저자의 고백으로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청정도론의 미얀마본에는 이러한 저자의 고백이 빠져 있습니다.
미얀마본 출간시 미얀마 스님들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정합니다.
수다원에 이른 성자가 이와 같이 경전(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명백하게 나오는 간답바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사견을 가지면서 간답바에 대한 문제 의식없이 경전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소한 수다원에 이르지 못한 자는 극히 예외적이고 명백한 경우를 제외하고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주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현재 한국에도 경전(니까야와 아비담마)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하고 설명하며 주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되돌아보고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뇌를 일부 또는 전부 제거한 도와 과에 이른 분들도 경전 용어 또는 어구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patisambidha nāṇa”라는 특별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경전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만 할 뿐,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거나 주석하지 않습니다.
삼마삼붓다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번뇌를 모두 제거하신 벽지불(빠쩨까 붓다)들도 삼마삼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전하려고 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반열반에 드신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범부 중생들이 자기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경전 용어 또는 어구의 의미를 왜곡하며 혼란스럽게 할 뿐이며, 사견 또는 자만이 함께 하는 마음의 발로일 뿐입니다.
아비담맛타 상가하는 아비담마에 접근하기 위한 요점 정리에 해당하는데, 그 요점 정리 원문은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아비담마 길라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 그 원문을 해석하고 주석한 내용은 모두 청정도론을 근거로 하므로 문제가 있습니다.
아비담맛타 상가하를 법문하시는 분들은 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자기 나름대로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고 주석해서는 더욱 안된다고 봅니다.
(계속)